문경의 길과 고개, 문경새재박물관 조사연구총서 제7집(2002년도)

 

 

  머리글

  1. 고갯길의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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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대로와 문경최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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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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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대로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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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대로 발달의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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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대로의 성립
        
역제의 확립 / 영남대로의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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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대로의 특성
        
도로의 기능 / 도로의 실측 / 영남대로와 자연환
        
/ 영남대로의 노폭 / 영남대로의 건설 / 교통양
        
식-문경의 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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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발자국 관갑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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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적 사례로서의 영남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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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도로 본 문경의 옛길 │양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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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지도에 표현된 문경과 문경의 옛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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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별지도에 표현된 문경과 문경의 옛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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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현지도 및 분도에 표현된 문경과 문경의 옛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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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지에 보이는 문경과 문경과 문경의 옛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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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 지역의 백두대간 고갯길 │김하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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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시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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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고갯길의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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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지역의 백두대간 고갯길
        
갓바위재와 고모치 / 밀재,블란치재, 버리미기
        
/ 은티재,지름티재,미전치 / 이화령 / 새재 /
        
늘재 / 부리기재,차갓재 / 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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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맺으며

  2. 갯길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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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육상 교통로 계립령 │서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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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립령 그 이름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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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립령·계립령로의 개척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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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세기 신라·고구려의 전쟁과 계립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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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문화 전파와 계립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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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 지역의 역과 원 │조병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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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 지역의 역(驛)
        
유곡역의 유래와 유곡도의 편성 / 유곡역의 구조
        
와 운영 / 요성역의 유래와 운영규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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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 지방의 원
        
조선시대 원의 설치와 운영 / 문경지역의 원
    circle03_yellow_1.gif 문경의 고갯길과 관방유적 │박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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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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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의 옛 고갯길
        
계립령길 / 조령길 / 이화령길

      circle01_green.gif 문경지역의 관방유적
         
하늘재산성 / 조령산성 / 고모산성 / 석현성 /
        
부산성 / 마고산성 / 노고성 / 희양산성 / 근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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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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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길의 풍속과 여정 │차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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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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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길을 떠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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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길의 여정과 풍속(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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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길의 여정과 풍속(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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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3. 고갯길의 문화
    circle03_yellow_1.gif 나그네의 쉼터 옛 주막 │배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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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져가는 주막과 나그네의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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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막의 형태와 기능
        
주막의 발생과 형태 / 주막의 기능과 이용 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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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지역 주막의 흔적과 특성
        
문경새재의 주막촌과 그 성격 / 마성면 신현리
        
돌고개 주막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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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갯길의 이야기와 노래 │한양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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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재가 새재인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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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재 성황신과 최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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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재와 신립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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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산신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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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녀담을 각색한 민중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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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가는 산, 주저앉은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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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재의 노래, 아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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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공동체의 신앙. 길손들의 믿음 │
      
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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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손들의 믿음에 주목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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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을마다 마을마다 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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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는 나그네의 정성-문경새재 성황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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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영차 상량을 밀치니-돌고개 성황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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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없이 변하는 세월을 따라-유곡역의 국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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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공동체의 신앙, 길손들의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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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새재 넘어가면 새 세상이 있다는데
     
안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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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새재 서른 굽이 먼저 넘은 벗 따라가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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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재속의 이상세계 여우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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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재의 현장 목계-새재-연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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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재가 낳은 노래 두 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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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세상이 숨쉬는 문경새재

   우리 고장은 예로부터 문경새재 등의 길과 고개로 인해 널리 알려진 고장입니다. 문경새재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영남대로가 이곳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달리고 있으며,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고개인 하늘재(鷄立嶺)와 관갑천(串岬遷) 같은 고개와 길의 유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청운의 꿈을 안고 넘나들던 선비에서부터 삶의 역경을 참아가며 눈물로 드나들던 민초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과 문물이 스쳐가면서 남겨 놓았던 저마다의 사연들이 길가의 바위 하나, 풀 한 포기에도 삼아 숨쉬고 있습니다. 또한 이들 고갯길은 우리 역사의 고비 때마다 희망과 좌절이 교차한 곳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 모두가 인상 깊게 생각하는 곳이 문경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문경새재박물관에서우리나라 길의 역사, 고개 문화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는 지리, 역사, 문화 등 다양한 접근을 통해 우리 지역의 문화적 다양성과 특수성, 독창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이 책이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작은 밑거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집필에 응해 주신 여러 선생님들과 실천문학사에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2001.  12

문     경     시     장

영남대로와 문경

최영준(고려대학교 지리교육학과 교수)

도로는 높은 수준의 과학기술·경제력·정치권력체제 등이 갖추어져 있는 사회에서나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로는 하나의 사회적 사실로 존재한다.

1. 길이란 무엇인가

  길은 인간의 역사가 시작되기 전부터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선사시대의 길은 야생동물의 이동로였거나 원시인들이 사냥을 다닐 때, 야생동물을 채집하러 다닐 때, 또는 샘터를 드나들 때 사용한 통로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그러한 길도 사람과 동물의 반복되는 왕래를 통하여 지표상에 뚜렷한 흔적으로 남게 되지만, 사람이 의도적으로 닦지 않은 그러한 길은 지리학적으로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렇다면 길이란 무엇인가? 국어사전에 의하면 길이란 첫째, 차(車), 우마(牛馬), 사람 등이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오갈 수 있게 만들어진, 거의 일정한 너비로 뻗은 땅 위의 선(線), 둘째, 사람으로서 의당 행하거나 지켜야 할 도리나 의리, 셋째, 방법 또는 수단, 넷째, 방면 또는 전문 분야, 다섯째, 발전이나 활동의 방향 등의 의미를 가진 말로 정의하고 있다.1)
  국어사전의 첫 번째 풀이는 길을 하나의 인공시설물로 보는 견해이다. 한자에는 경(徑),진(畛),도(도),도(道),로(路) 등 길을 나타내는 문자들이 많은데, 이들은 모두 사람과 물자의 이동을 의미하고 있다.『주례』에 따르면 경(徑)은 우마가 다닐 수 있는 오솔길이고, 진(畛)은 대거(大車)가 다닐 수 있는 소로이며, 도(도)는 승차(乘車) 한 대가 나란히 갈 수 있는 길이다. 도(道)는 승차 두 대, 로(路)는 승차 세 대가 나란히 갈 수 있는 넓은 길이라고 하였다.2) 국어사전의 두 번째 정의는 당위적 행위의 규범, 즉 한자의 도(道) 비슷하다. 도(道)는 철학적 개념에서 실제 행위의 도구화를 의미하는 바, 인간의 신체 가운데 생각하는 능력을 가진 기관, 즉 머리(首)와 인간이 움직이는 행동을 나타내는 ‘지(之)’ 자가 결합된 문자이다. 다른 한편으로 ‘수(首)’는 지도자 또는 우두머리 등을 의미하므로, 도(道)란 지도자가 무리를 이끌고 서서히 움직이는 방향의 뜻도 가지고 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지방 행정기관 중에 가장 상급에 속하는 것을 도(道)라고 하였는데, 이는 아마도 수도로부터, 각 지방으로 뻗는 길을 도(道)라 부른 데서 연유하는 것으로 사료된다. 도(道)보다 더 넓은 길이라고 생각되는 로(路)는 사람의 두 발이 움직이는 행동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로(路)는 본래 보행자들이 다니는 길을 의미하였을 것이다.
  우리나라 말에는 한자에서와 같이 길의 넓이에 따라 붙여지는 여러 가지 용어가 없다. 넓은 길은 한길[大路]이라 하고, 시골 동네의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은 고샅이라 하며, 사잇길, 산길, 고갯길, 지름길 등 길의 특성에 맞는 명칭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중앙에서 각 지방으로 뻗는 서로(한양~의주), 북로(한양~서수라) 등 대로에는 한자로 된 접미사인 로(路)를 붙였다.
  서구문명 세계에서 도로와 관계되는 가장 오래된 말은 산스크리트의 Vah이다. ‘이동’이라는 이 말에서 산스크리트의 Vahana와 라틴어의 Vehiculum이 나왔고, Vehiculum은 영어의 Vehicle의 어원이 되었다.
  영어의 road라는 말은 본래 라틴어의 rad(말 타고 여행하다)에서 유래되었으며, path(오솔길)는 ‘발로 다져진 길(foot-trodden track)’을 의미하는 pad에서 나온 말이다. 이처럼 서양에서는 동양과 달리 길에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기보다는 수레, 말 등 사람과 재화의 이동을 돕는 수단 또는 기관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우리말 가운데 영어의 Vehicle에 비유되는 것으로 발구(slide car), 썰매(sled), 달구지(cart), 수레(wagon) 등이 있어나, 이러한 말들 가운데 그 어느 것도 도로라는 말의 어원이 된 것은 없다. 그러므로 한국인에게 도로는 명백히 형이상학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리학자들이 관심을 갖는 도로는 어떠한 것인가? 그러한 도로는 인간이 지표상에 많은 노동력을 투입하여 일정한 너비로 닦고, 도로변에는 일정한 표지를 세우는 동시에 여러 가지 시설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러한 도로는 높은 수준의 과학기술, 재력, 정치권력체계 등의 뒷받침이 있는 사회에서나 만들 수 있으며, 도로의 운영과 유지에 있어서도 사회·경제·문화적으로 양호한 배경하에 건설되는 도로는 인간집단 간의 각종 정보교환과 재화의 유통을 촉진시켜 준다. 그러므로 도로는 하나의 사회적 사실로 존재한다.

2. 영남대로 개관

  조선시대의 영남대로 지역은 한양과 그 주변, 경기도 남동부, 충주분지, 소백산지, 상주분지, 대구분지, 낙동강 델타지구 등으로 구분되었다. 이 지역은 행정적으로 경기도의 10여 개 군현, 충청도의 10여 개 군현, 경상도의 70여 개 군현 등 약 90여 개 군현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조선조 5백여 년간 부(富)와 인재의 보고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근대화기 지연되었으므로 수도권을 비롯하여 대구, 부산 등 대도시권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은 경제·문화적으로 매우 낙후되어 있는 실정이다.
  영남대로는 총연장이 약 380㎞로 조선시대에는 한양과 동래를 잇는 최단코스였다.
5)<최영준,「영남로의 경관변화」,『지리학』28,1983,9쪽> 현재 영남대로 지대에서는 경부간(京釜間) 고속전철 공사가 진행되고 있으며 경기도 여주와 경북 구미를 연결하는 중부내륙 고속도로가 건설중인 바, 그 노선의 설정에 앞서 영남대로에 대한 조사 및 평가 작업이 선행되었어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이 도로는 현재의 경부 국도나 경부선 철도보다 70~80㎞나 거리가 짧으며, 통과 지역의 인구밀도가 비교적 낮고 지가(地價)도 대체로 저렴하여 지가보상으로 인한 공사비 절감이 가능하며, 낙후된 지역의 개발을 촉진하는 효과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연구를 시작하기에 앞서 설정해야 할 중요한 문제의 하나는 도로의 명칭이다. 조선시대에는 주요 도로의 명칭을 한양을 중심으로 종착지를 연결하는 방향에 따라 서로(의주 방면), 북로(경성 방면) 등으로 정하였다. 한양에서 동래 부산포에 이르는 도로는 경상충청대로, 경상대로,
6)<『대동지지』권6,충청도 연풍 산수조> 혹은 동남저부산제사로(東南抵釜山第四路)라 칭하였고,7)<『임원경제지』권5,「예규지」팔역정리표> 일제시대 초에는 이 길을 동남지동래로(東南之東萊路)라고 불렀다.8)<경성부,『경성부사』제2권,1936,1018쪽> 그러나 문헌상에 나타나는 이와 같은 명칭들을 지방의 주민들은 거의 사용하고 있지 않고 있었다. 그러므로 필자는 한양과 동래 사이의 도로에 적절한 명칭을 선정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으며, 이 도로를 영남대로라고 명명하기로 하였다.
  영남이라는 명칭은 본래 계립령 또는 조령 남쪽지방, 즉 상주·문경 일대를 가리키는 도로였으나,
9)<이수건,『영남사림파의 형성』,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1980,14쪽> 오늘날에는 경상남북도 전역을 포함하는 용어로서 널리 통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영남대로는 한양에서 영남 방향으로 향하는 큰길이란 의미를 가지며, 제4번 도로라든가 또는 경상충청대로라는 명칭에 비하여 지리적 용어로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명칭은 일제 초의 신작로 개수공사에 의하여 확정된 현재의 경부 국도와 쉽게 구별된다. 또한 조령의 북쪽지방을 영남이라 부르고, 영남대로는 ‘영남(또는 경상도)으로 가는 큰길’ 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와 같은 지방 주민들의 영남에 대한 인지를 구체화시켜 주는 좋은 자료가 읍지도이다. 이 도로가 통과하는 양지, 죽산, 선산 등의 읍지도에는 도로선을 따라 영남대로라고 쓴 글자가 보이는데, 이 명칭은 일본인들이 경성과 부산의 머리글자를 따서 만든 경부가도(京釜街道)라는 이름보다 역사·지리적으로도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3. 영남대로 발달의 배경

  우리나라의 도로 발달에 영향을 끼친 몇 가지 요인을 들면, 장소에 매이는 문화 전통(place-bound tradition), 지형, 관계적 위치 등을 들 수 있다.
  한국인은 귀소성이 강한 민족이어서 한 곳에 자리를 잡으면 쉽게 이동하지 않고, 그곳에서 자급자족하며 폐쇄적 생활을 영위해 왔다. 그러므로 지역간의 교통이나 국제교류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한반도와 같이 산맥이 서남 방향으로 놓여 있는 경우에는 남북 방향의 도로 발달에 지장이 많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북쪽과 남쪽에는 각각 중국과 일본이란 정치세력이 놓여 있어 종관(從貫) 교통로 건설이 불가피한데, 영남대로는 바로 이 교통로의 남부에 해당된다.
  영남대로는 한강 유역과 낙동강 유역을 잇는 교통로의 주축이다. 소백산맥을 경계로 양분되는 한강 유역과 낙동강 유역은 자연환경의 차이가 크기 때문에 자원분포상으로도 다른 점이 많으며, 문화·역사적 배경에도 상당한 차이가 있어 지역간 교통로 발달에 장애가 많았다.
  역사적으로 한강 유역은 한반도의 정치질서를 좌우하는 전략적 요지 역할을 해왔다. 한강 유역은 삼국시대에 백제,고구려,신라가 차례로 점유했던 곳으로, 마지막으로 이 지역을 차지했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였다. 고려왕조는 신라로부터 정통성을 이어받고 한강 유역을 확보함으로써 북진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으며, 조선왕조 역시 한강 유역과 낙동강 유역을 전략적으로 중요시하였다. 여말 왜구 침입으로 인하여 해안지방이 초토화되었을 때 영남대로 지역은 유일한 안전지대였으며, 임진왜란 중 영남대로가 왜적의 수중에 놓여 있던 당시는 조선의 국운이 간두(竿頭)에 처해 있었다. 그러므로 영남대로는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의 생명선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조선시대의 영남지방은 자원과 인재의 보고라 일컬어졌다. 이 지역은 한반도의 수리관개 문명의 요람으로서 우수한 농업기술을 바탕으로 한 농업 선진지역이었으며, 임진왜란 전까지 국가 재정상의 기여도가 전국에서 가장 높은 곳이었다. 그러므로 조정은 이 지역을 행정적으로 중요시하였다.
  한강 유역은 한반도의 중앙부에 위치하므로 역사상 가장 중요한 전략 요충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이 지역은 독자적으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며, 이웃의 다른 지역과 연결되는 경우에만 중심지로 기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신라·고려·조선 등 세 왕조의 경우를 보건대 한강 유역의 중심지 기능을 보충해 준 이웃 지역이란 영남지방이며, 두 지역을 결속시켜 준 대동맥은 곧 영남대로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영남대로를 차지하는 집단이 한반도 통일에 성공하였다.

 4. 영남대로 성립

  1) 역제의 확립

   사학자들 가운데에는 고려시대를 우역제도(郵驛制度)의 정비가, 조선시대를 확립기라고 보는 경우가 있는데,10)<체신부,『한국우정사』,1970,40쪽> 여러 가지 사항을 종합해 보건대 이는 매우 적절한 견해라고 생각된다. 태조는 건국 후에 중앙집권적 양반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삼고 나라의 신경중추라 할 우역제도의 확립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는 지방행정구조의 개편과 병행하여 실시되었는데, 특히 여말의 역로 조폐의 원인을 파악하여 역민과 역토의 확보, 원(院)의 국유화, 도로의 운영 등에 있어서 관의 역할을 보다 강화된 점이 주목된다.
  조선시대의 역제는『경국대전』송포 당시에 거의 완비되었으며, 이 제도는 구한말 외세의 침입과 더불어 우역제도가 철폐될 때까지 기본 골격에는 큰 변화 없이 운영되었다. 그러나 제1기(1392~1456), 제2기(1457~1592), 제3기(1593~1893), 제4기(1894~1913)로 구분되는 조선시대의 역제도는 시기마다 특성을 지니고 있다.11)<최영준,「조선시대의 영남로 연구 : 서울~상주의 경우」,『지리학』12,1975,57쪽> 제1기는 고려의 제도를 답습한 시기로서, 주요 지역에 한하여 찰방(종6품)을 파견하고 그 외의 역로에는 역승(驛丞,종9품)을 파견하였다. 이때 한양 천도에 따라 개성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던 기존의 도로망이 해체되고, 한양을 결절점으로 하는 X자형 간선 역로가 완성되었다. 이 역로의 서북쪽에는 평양과 의주, 동북쪽에는 충주·상주·동래 등의 주요 도시가 분포하였다. 한양에서 동남 방향으로 뻗은 영남대로의 북부는 경기 좌도 찰방 관할의 양재도와 경기·충청 우도 찰방 관할의 연원도로 구분되었으며, 경상도 지역은 유곡도·김천도·성현도·황산도 찰방들이 관리하는 4개의 역도로 나뉘었다.12)<최영준,앞의 글,57쪽>
  제2기는『경국대전』의 반포를 계기로 모든 제도가 정비되었는데, 이때 역제도는 완비되었다. 이때부터 전국의 9대 간선로가 확정되었다. 모든 역도는 찰방도나 역승도의 구별 없이 찰방도로 승격시킴과 동시에 찰방역의 명칭을 곧 역도명으로 정하였다. 영남대로의 역도는 한양으로부터 양재도,연원도,유곡도,김천도,성현도,황산도의 순으로 배열되어 있었다.
  제3기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었기 때문에 주요 역로들이 전화를 입어 다수의 역민들이 유망(流亡)하였다. 특히 왜란중에는 개전 초부터 영남대로가 왜군 주력의 주공격로였으며, 경상도 지방은 수년간 그들에게 점령되어 있었으므로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또한 조선후기의 혼란기에는 중앙의 행정력이 마비되는 틈을 이용하여 일부 몰지각한 세력자들이 법을 어기고 사사로이 역민과 역마를 이용하였으므로 역민 중에는 고역을 이기지 못하여 역무를 이탈하는 자가 속출하였다. 그러나 영·정조 시대의 중흥기를 맞이하여 우역제도가 정비,개편되었다. 이 기간 중의 큰 변화는 양제도를 폐쇄하여 그 기능을 영화도(迎華道)로 이전 한 것과 황산역의 위치를 양산읍 북쪽으로 옮긴 것이었다. 또한 군사통신만을 전담하는 파발제를 신설한 것도 특기할 일이다.
  제4기는 개화기의 외래문물 수입에 따르는 구우역제도의 철폐기이다. 이때부터 통신은 전신과 우편 제도로 분리되고 도로는 수송로의 기능만 보유하게 되었다. 철도가 개통되고 신작로 공사가 이루어져 구도로의 노선이 수정되거나 폐도화되었고, 구역사(舊驛舍)·관아 등은 헐리거나 방치되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서양문물의 수입을 위하여 공포된 갑오개혁은 실시된 사항은 많지 않았으나 조선의 정치·경제구조를 근본적으로 동요시킨 사건이었다.13)<김운태,「조선왕조의 개항이후에 있어서의 행정근대화 과정에 관한 연구」,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1969,113쪽> 특히 역제에 미친 영향을 보면, 과거에 병조 관할이었던 역무를 도로, 교량, 나루 등을 관리하는 내무아문 소속의 지리국과 공무아문의 역체국에 분산시키고 역둔토의 관리는 농상공부로 이관시킨 점이었다. 또한 재래식 우역제를 부분적으로 개혁하여 충주, 청주, 상주, 대구, 부산 등을 중심으로 그 주변지역에 새로운 우편제도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그 외의 지역에는 1913년까지 구제도가 병용되어 통신체제상의 혼란이 있었다.14)<최영준,앞의 글,58쪽>
  신교통기관, 즉 철도를 이용하는 기차와 신작로를 이용하는 자동차의 도입으로 구제도가 철폐된 것은 사실이나, 이러한 교통기관의 도입 초기부터 교통량이 급증되는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았다. 오히려 신작로와 철도의 건설로 인하여 직접·간접으로 피해를 입은 주민들은 일제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새로운 교통로를 사용하는 사람이 극히 적었다. 또한 기차는 대개 군수물자 수송에 이용되었고 화물과 여객을 수송하는 자동차도 별로 없었으므로 대부분의 지방 주민과 상인들은 변함없이 구도를 따라 여행하였다.

  2) 영남대로의 성립

  한양 천도를 계기로 조선은 한양을 기점으로 하는 새로운 교통망을 구축하게 되었다. 이때에 설정된 간선교통로는 한양에 결절하는 X자형 패턴을 기본 골격으로 삼고 있었다. 한양에서 서북지방으로 뻗은 도로를 ‘서로’라 하고 의주를 종착지로 정하였으며, 동북지방으로 향하는 도로는 ‘북로’라 하고 종점은 함경도의 서수라고 정하였다. 충청도 서쪽을 지나 전라도로 연결되는 길은 소위 ‘삼남로’라 하였는데, 강진을 종점으로 하였으나 여기에서 제주까지 뱃길로 이어졌다. 한양에서 충청도의 동북부지방을 거쳐 경상도의 동래까지 뻗은 길은 ‘남로’ 또는 ‘영남대로’이며 부산포가 종점이었다. X자형 패턴의 우측에 있는 북로와 삼남로는 좌측의 서로 및 영남대로에 비하여 정치·경제·문화적인 비중이 다소 낮았다. 그 이유는 서로가 중국과 연결되고 영남대로는 일본과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왜적들은 주로 서로와 영남대로를 따라 침범해 들어왔으며 외교사절들 역시 이 도로를 이용하였다. 또한 서로는 대륙의 문화를 수입해 온 교통로였으며, 영남대로는 우리 문화를 일본에 전파시킨 도로였다. 그런데 조선 조정이 북로와 삼남로를 서로 및 영남대로와 같은 비중을 두어 중요시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 이유는 북로의 요지인 함흥이 태조의 충생지였고, 선초의 영토확장이 두만강 유역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며, 삼남로의 요지인 전주는 이씨 왕가의 본향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북로와 삼남로는 조선 왕실의 상징적 왕도(王道)였다.
  이 글의 주제가 되는 영남대로는 선초의 삼포 개항을 계기로 그 윤곽이 구체화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 조정은 삼포를 개항함으로써 왜구 침입을 예방하는 동시에 일본 정부와 외교관계를 유지할 수 있기를 기대하였다. 부수적으로 왜사들이 바치는 공물을 수집하는 동시에 상세(商稅)를 거둘 수 있는 효과도 있었다.15)<김병하,『이조전기 대일 무역연구』,한국연구원,1969,27쪽> 왜상들이 가져오는 유황,구리,납,염료,향료,설탕,상아,후추,밀감,도검류 등을 구입하고, 쌀,콩,밀가루,주류,차,약재,면포,비단,마포,서적,문방구,불경,불구,도자기 등을 수출함으로써 우리나라가 얻는 이익도 적지 않았다.16)<김병하,앞의 책,31쪽> 특히 유황,구리,납 등은 무기 제조에 이용되었으므로 중요시되었다.
  대일 교역은 삼포의 지정 교역소에서 행해진 조일 상인 간의 무역과 왜사들이 가져오는 공물을 받고 우리 조정에서 답례로 주는 교역으로 구분되었다. 왜사들은 대부분 한양까지 상경하였는데, 점차 이들의 수가 급증함에 따라 세종대에는 상경로를 좌로·우로·중로·수로 등 4로로 분산시켰다. 이 교통로의 이용은 임진왜란 당시까지 계속되었다. 좌로는 울산의 염포에서 한양에 이르는 교통로인데, 경주,영주,의흥,의성,안동,풍기,죽령,단양,청풍,충주,여주,양근 등을 경유하였으며 단양에서 한양까지는 남한강 수로를 이용하였다. 중로는 동래 부산포에서 상륙한 왜사들이 이용하였는데, 양산,밀양,청도,대구,안동,선산,상주,유곡,조령,음성,이천,광주 등을 경유하였다. 이 길은 영남대로와 대체로 일치하나 조령 이북에서 양재도 대신 경안도 방향을 택한 점이 다르다. 우로는 웅천 내이포에서 김해,현풍,성주,김천,추풍령,영동,청주,죽산,양재 등을 경유하였는데, 죽산과 한양 사이는 영남대로를 이용하였다. 수로는 부산포를 떠나 낙동강 구의 감동포로 들어서고, 소강(遡江)하여 수산, 왜관 등을 경유하여 상주 낙동에서 하선하였다. 이곳에서 충주까지는 조령로를 통과하고, 다시 충주 금천에서 승선하여 남한강 수로를 따라 북상하여 한양에 이르렀다. 이 수로를 이용했던 왜사들은 휴대 화물이 많은 자들이었으므로 한강·낙동강변의 요진(要津)에는 이들을 위한 수참관(水站館)과 창(倉)이 분포하였다. 또한 왜사의 접대, 수로의 안내, 화물의 보관을 책임지는 관리들이 파견, 배치되었다.
  왜사의 방문여행은 경상도의 해안지방과 낙동강안 포구의 상업발달에 자극을 주었다. 특히 낙동강 하구로부터 상류 쪽으로 분포한 불암진, 삼랑진, 수산진, 용당포, 주물연진, 감물창진, 무계진, 왜관, 동안진, 낙동진 등은 우리의 상선과 왜선의 기항지로서 선박이 들어올 때마다 열리는 ‘갯벌장’ 이 발달했었다. 이러한 장(場)은 남한강변의 하진, 황강, 금천, 목계, 흥원, 이포, 갈산 등지에도 분포했다가 철도교통의 발달을 계기로 소멸되기 시작하였다.
  삼포 개항을 계기로 경상도 해안지방의 경계가 강화되었다. 그 이유는 세종대까지는 여전히 간헐적으로 침범하는 왜구가 있었고, 삼포를 출입하는 왜선조차 무장을 갖춘 병선과 다름이 없었으므로 항왜(降倭)라 할지라도 이들을 선량한 상인집단으로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초로부터 조정은 경주와 거제에 각각 병영과 수영을 설치하여 비상시에 대비하게 되었다. 1947년에는 경주의 병영을 울산으로 이설하였고, 거제의 수영은 1592년 고성으로 옮겼다.
  부산은 왜구의 소굴이었던 대마도와 가장 가까운 양항으로서 염포와 내이포가 폐쇄된 후 유일한 대일 개항장으로 지정되어 왜관이 설치되었다. 조정에서는 상주하는 왜인의 감시는 물론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부산포를 중심으로 한 남해안 일대에 수영(水營),진(鎭),보(堡) 등을 설치하였다. 왜관은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한동안 폐쇄되었으나 일본과의 외교관계가 정상화함에 따라서 다시 설치되었다. 국교의 정상화를 계기로 대일 무역이 정상화되었음은 물론 일본 사신의 방문과 우리나라 통신사의 왕래가 빈번해졌다. 비록 양국간의 관계가 개선되었으나 조정에서는 왜의 재침에 대비하여 동래를 중심으로 한 경상도 동남부지방의 방어시설을 재정비하였다. 이러한 정치적·군사적 사실의 영향으로 영남대로의 중요성은 왜란 전보다 더 커지게 되었다.

5. 영남대로의 특성

  1) 도로의 기능

  도로가 없는 교통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교통로에는 수로와 항공로가 있으나 우리가 교통과 도로를 연관지어 생각하게 되는 이유는 모든 교통로 가운데 도로가 지역의 정치·경제·문화의 발달에 미치는 영향이 가장 지대하기 때문이다.
  인체의 모든 부분으로 피가 흐르는 맥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 국토에도 재화와 정보를 전달해 주는 도로망이 있다. 이러한 도로망은 그 중요성에 따라 간선도로와 지선도로, 대·중·소로, 국도와 지방도 등으로 구분된다. 그러나 이 모든 도로가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사는 국민들을 정치·경제·문화적으로 통합시켜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도로를 건설하는 목적은 신속하고 안전하게 사람과 화물을 목적지까지 수송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최소 운송비로 최단시간 내에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을 좋은 도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말해서 좋은 도로란 두 지점을 직선으로 연결하는 것보다는, 다소 우회하더라도 인구가 조밀하고 경제적으로 중요한 도시들을 연결하는 노선을 취해야 하며, 하중에 견딜 수 있도록 견고하게 건설해야 하고, 가능한 한 도로의 경사도를 낮춰 각종 교통기관의 상용에 불편이 없어야 한다. 이와 같은 점에 유의하여 건설된 도로는 효율성이 높고 안전할뿐더러 교통이 신속하다.

  2) 도로의 실측

  외국의 고대 도로 실측방법이 우리나라와 반드시 같을 수는 없으나 도로표지의 형태와 기능을 검토하면 고대 한반도에서도 유사한 방법이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이와 같이 고대국가는 정복사업과 행정통신을 목적으로 도로를 건설하였는데, 그 도로의 모체가 된 것은 염도(鹽道)를 비롯한 원시사회의 교역로였다. 본래 계획도로가 아니었던 고대의 교역로는 강력한 정치집단이 등장함에 따라 간선도로의 노선을 확정짓기 위하여 체계적인 실측과 조사가 단행되었다. 측량 기술자들은 높은 지점에 올라 전방에 보이는 바위, 요지(凹地), 거수(巨樹) 등과 같은 자연물을 실측 목표로 삼았다. 적절한 대상물이 없는 경우에는 나무기둥을 세우거나 돌더미 또는 흙둔덕을 만들 게 되었다. 도로가 완공된 후 이러한 인공 표지들은 후세 사람들에게 성물(聖物) 또는 우상으로 숭배되는 경우가 생겼다. 후세의 정치 지도자들 중에는 사람들이 외경의 대상으로 여기는 이와 같은 유물들을 도로표지로 삼아 편리하게 이용하였을 가능성이 많다. 오늘날 시골에서 간혹 볼 수 있는 장승·정자목·돌무지[積石]·흙둔덕[] 등은 모두 고대의 도로 측량과 관련되는 유물로서 후에 도로표지로 기능이 전환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반도의 도로발달 과정을 체계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자료가 많지 않기 때문에 14세기 이전의 도로에 관한 연구에는 어려움이 많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도로 측량과 설계에 대한 연구는 조선시대를 중심으로 진행하는 것이 합당할 것 같다. 선초의 한양 천도에 따라 조정은 한양을 중심으로 하는새로운 교통체계의 수립에 착수하게 되었다. 당시 전국의 도로는 여말의 내우외환으로 인하여 황폐되었으며 지방에 따라 도로상태가 달라 대대적인 도로정비가 필요하였다. 그러나 조정은 태종대까지 도로정비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세종대에 이르러 비로소 노폭·이정(里程)·노표(路標) 등에 관한 정비계획이 수립되었는데, 이는 병조의 상소문에도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다.

  역간의 거리가 도마다 다른데, 이 사실은 전략상 심각한 문제점을 야기시킵니다. 그러므로 점차 이를 조사하여 시정해야 합니다. 평안도는 사신의 행차가 잦은 지방이니 30리마다 도로표지로 장승을 세우고 돈대를 만들고 나무를 한 그루씩 심게 하십시오.22)<『세종실록』권93,세종23년 9월 계사조>

  세종은 1441년 전국적으로 도리(道里)의 측정 조사를 실시하였는데, 이때 기리고차(記里鼓車)라는 흥미있는 기계가 등장하였다. 거리 측정계가 부착된 이 기계는 매 10리를 갈 때마다 인형이 자동적으로 한번씩 복을 두드리도록 설계되어 있었다고 한다.23)<전상운,『한국과학기술사』,정음사,1976,4324쪽> 이와 같은 측량기구를 사용하여 조정에서는 역간 거리를 조정할 수 있게 되었다.

  3) 영남대로와 자연환경

  영남대로의 위치와 자연환경과의 관계를 검토해 보면 우리나라 고도로의 특성과 도로건설의 수준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이 도로의 전 구간을 지형적 특성에 따라 한강 유역의 하곡·소백산지·낙동분지 등 3구역을 구분하여 그 특성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한강 유역은 서울 남쪽 탄천 유역으로부터 충주분지의 단월역에 이르는 약 140㎞의 구간으로서 하곡과 구릉지가 복합되어 있는 지역이다. 이 구간은 다시 탄천 하곡, 청미천 하곡, 충주분지 등 3개의 소구간으로 구분되며, 소구간 사이에는 광주산맥과 차령산맥이 발달하여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들 산맥은 장기간에 걸쳐 침식을 받아왔기 때문에 안부(鞍部)가 잘 발달하여 고개 높이가 200m가 넘는 곳이 전혀 없다. 각 하곡은 들이 넓고 평탄하므로 도로의 발달에 유리하며, 이러한 평지를 분리시키는 다리내고개, 좌정고개, 임오치 등은 고개가 낮고 영로의 길이도 짧은 편이어서 영의 양쪽에 놓여 있는 하곡의 도로들을 연결하는 데 별로 큰 장애가 되지 않았다.
  소백산맥의 영로는 충주 부근의 달월역에서 문경의 유곡역에 이르는 약 40㎞ 구간에 해당되었으며, 영남대로에서 가장 험준한 지형적 장애였다. 그러나 이 산지 역시 계립령·조령·이화령 등 여러 개의 자연적 통로를 가지고 있었다. 이 고개들은 평균 해발고도가 600m 내외로서 주변의 산지보다 300~400m 정도 낮고 안부의 경사도 비교적 완만한 편이다. 남한강 지류인 달천에 의하여 개석된 소백산맥의 북쪽 사면은 낙동강 지류인 조령천 유역의 남쪽 사면에 비하여 경사가 완만한 편이다. 충주의 단월역지에서 안보역지까지 계곡의 완만한 길을 따라 올라오게 되며, 안보역에서 영로는 조령 방향과 계립령 방향으로 갈라진다. 소백산맥의 남사면은 경사가 급하기 때문에 영마루에서 문경읍까지의 거리는 3~4㎞에 불과하다. 계립령,조령,이화령 등의 영로들은 모두 조령천 상류의 문경분지에 수렴되어 영남대로를 이루며, 이 길은 영강 협곡의 좌안(左岸)에 걸려 있는 관갑천잔도(串岬遷棧道)를 통과하여 유곡역에 이른다. 소백산지와 낙동분지의 접촉부에 발달한 유곡에는 영남지방 각지로부터 상경하는 인마와 수레가 모여들었으므로, 이곳을 ‘영남의 인후지지(咽喉之地)’ 라 일컬었다.24)<『신증동국여지승람』권29,문경현 역원조>
  영남대로의 제3구간은 낙동분지의 중앙부를 대각선으로 통과하였다. 낙동분지는 대체로 중생대 퇴적암층이 널리 분포하며, 지역의 대부분이 낙동강 유역에 속한다. 그러나 이 분지 내에도 소백산맥과 태백산맥의 지맥들이 동서로 놓여 있어 낙동분지는 여러 개의 소분지로 분리되어 있다. 그러나 이 지역 산지의 말단부는 심하게 침식을 받아 고립된 산지를 이루거나 안부를 형성하고 있다. 낙동분지는 상주분지, 해평벌, 달구벌, 밀양강 유역, 낙동강 하구 등 5개 소구간으로 구분된다. 이들 소구간의 경계가 되는 소야고개·팔조령·작천 등의 안부가 잘 발달되어 도로를 건설하는 데 큰 문제는 없었다.
  영남대로변 구릉지대의 임야는 무성한 삼림도 교통로 건설의 장애요인이 되지만 고대로부터 개간되어 농경지로 이용되었다. 따라서 영남대로의 낙동분지 구간에는 상주·대구·밀양·동래 등 연도(沿道)의 주요 도시들을 연결하는 데 장애가 될 만한 지점은 많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4) 영남대로의 노폭

  도량형의 표준화는 왕권의 강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조선 조정에서도 신왕조의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중국의 제도를 본받아 도량형을 재정비하였으며, 이때 주척(周尺)을 이용하여 도성내의 가로와 외방도로의 폭을 정하였다.
  한양성의 대로는   한양성의 대로는 56척, 중로는 16척, 소로는 11척으로 정하고, 가로의 양쪽에 각각 2척의 도랑을 파게 하였다.『주례』에 따르면 황도(皇都)는 대로의 폭을 9궤로 하고, 제후의 도(都)는 7궤로 정하였다. 그러나 한양의 대로는 사실상 7궤 이상(약 20㎝)의 폭을 가지고 있었다.
  외방도로는 노폭보다 마필과 역민의 수를 기준으로 등급을 정하였으므로 도로의 넓이에 대한 분명한 규정은 없었다. 그러나 문헌에 의하면 대로는 대체로 10~15m, 중로는 7~10m의 폭을 가지고 있었다.
  필자가 조사한 바로는 조선시대 영남대로의 폭은 일정한 기준을 설정할 수 없는 정도로 불규칙하였는 바, 대로가 소로보다 더 좁게 나타나는 지역이 적지 않았다. 조선 후기의 노폭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로서 일제 초(1917년)에 작성된 지적도를 사용해 본 결과, 영남대로의 폭이 판교(현 성남시)에서 10m 이상, 충주에서 연원역지와 단월·문경에서는 7~10m, 선산군 해평에서 5~7m 정도에 달하였다. 해평면 일대의 정밀조사 결과 영남대로의 폭은 최소 3m, 최고 10m 정도였다. 3m의 폭은 사인교가 통과할 수 있는 한계이다. 로마시대의 일반도로의 폭은 대로가 약 10m였고 보행로는 2.4m였으므로 우리나라 도로가 결코 좁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한말의 혼란기에 도로변의 주민들이 도로용지를 잠식하여 논밭으로 이용하였기 때문에 노폭이 불규칙하게 좁아지고, 굴곡이 심한 흉한 모습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5) 영남대로의 건설

   오늘날의 우리나라 도로는 근대화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수천 년 동안 조상들이 이용했던 노선을 조정하고 노면을 보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군사작전에는 도로와 교량을 건설 또는 보수하는 특수집단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삼국의 통일을 전후하여 병력과 병참의 수송이 빈번해짐에 따라 동서남북으로 통하는 많은 도로가 건설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기존의 도로 가운데 좁고 굴곡이 심한 것들도 수레와 군마가 다니기 쉽도록 넓혀지고 또 직선화되었을 것이다. 영남대로 지역은 일찍이 한강 유역 진출을 기도했던 신라군에 의하여 개수 되었을 것이다. 또한 삼국통일 후에는 새로 편입된 고구려와 백제의 고토를 통치하기 위한 새로운 제도와 전략이 필요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신라의 수도 경주는 한반도 전체를 통솔하는 정치 중심지로는 지나치게 동남부에 치우쳐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라 조정은 뛰어난 기동성을 바탕으로 교통 및 통신망을 정비하게 되었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도로망은 고려시대 우역제도의 기초가 되었을 것이며, 고려의 교통망은 조선에 계승되어 오늘날의 도로망 발달에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주요 도시의 대부분이 신라 말 내지 고려 초에 이미 현재의 위치에서 발달하기 시작하였으며, 당시에 이미 이들 도시를 연결하는 지역간의 교통망이 성립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의 도로 가운데 대부분은 지금도 사용되고 있으나 일부는 한때 기능이 쇠퇴하였다가 근래에 다시 사용되기 시작하였으며, 또 일부는 완전히 폐도화된 것도 있다.
  때때로 도로를 건설하는 기술자들, 특히 고대의 공병들은 새로은 길을 뚫어 교통로를 창조하기도 하였으나 대체로 기존의 오솔길을 개량하는 경우가 더 많았는데, 정복지의 도로건설로 명성을 얻었던 로마인들이 대표적인 예에 속한다. 카이사르가 갈리아 지방, 이베리아 반도, 영국 등지의 원정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의 하나는 그가 원주민들의 교통로에 대한 정보를 획득하여 효과적으로 이용하였기 때문이며, 로마가 많은 식민지를 지배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도로를 로마의 실정에 맞도록 개량하여 적절히 운영하였기 때문이다.
  고대의 도로공사에서도 기술수준에 따라 어느 정도 지형상의 장애를 극복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우리 선조들은 가능한 한 자연을 손상시키지 않고 길을 닦았기 때문에 영남대로에서는 대규모 토목공사의 흔적이 별로 발견되지 않고 있다. 다만 경사가 급한 영로나 단애(斷崖)의 절벽을 깎아내는 노반 개착을 하거나 저습지를 매우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조령에는 주흘관을 비롯한 3개의 관(關)을 두는 등 교통의 방어를 강화하였다. 이때에 도로의 개수공사가 있었다는 기록은 없으나 대규모의 축성 및 관문 등에 쓰인 석재를 운반하려면 도로의 개수가 선행되었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므로 문경의 조령과 계립령, 칠곡의 가산성 남문 등지로부터 채석장에 이르는 도로는 하중이 무거운 석재의 운반에 견딜 수 있도록 보수되었을 것이다. 1970년대 후반까지 남아있었던 새재 영로의 박석(薄石)포장은 이때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된다.
  영남대로에서 박석 포장이 분포했던 곳은 조령의 신혜원과 주흘관 사이, 고모산성 밑, 팔조령 등지였다. 한편 관갑천과 작천의 잔도는 노면이 암반으로 덮여 있었다. 박석은 대체로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넓적한 돌이었으며 포장석의 틈새는 흙으로 메워져 있었다. 조령의 박석 포장은 폐도화 이후부터 많이 파괴 되었다.
  노면은 인마나 차량의 통행으로 인하여 손상되기도 하지만 자연적 침식작용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파손이 더 치명적인데, 특히 토사로 보수되는 도로는 침식작용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흙길 위에 생기는 수레바퀴의 자국은 폭우가 내릴 때 더욱 깊어져서 수레의 통행을 방해하게 된다. 도로의 곳곳에는 깊은 웅덩이가 생겨서 바퀴가 빠져 움직일 수 없게 되므로 진흙길은 수시로 정비하지 않으면 좋은 길이 될 수 없다.
  봄철의 정비작업은 겨울에 생긴 수레바퀴 자국을 없애고 노면에 생긴 구덩이를 메우는 것이었는데, 보수방법은 도로면을 쟁기로 간 후에 써레질을 하여 흙을 평탄하게 고르는 것이었다고 한다. 가을에는 여름의 장마기에 유수에 의하여 팬 도로면을 흙을 덮는 작업을 행하였다. 주로 사용된 도구는 쟁기· 보습· 쇠스랑· 포미· 삼태기· 지게· 발구 등이었는데, 특히 발구는 노면을 다지는 롤로 역할을 한 기구로, 수레의 밑에 썰매 모양의 무거운 통나무를 붙인 것이었다.
  영남대로의 지형 조건과 나루터 및 교량의 분포상태를 검토해 본 결과 영남대로는 ① 한양성~한강도, ② 한강도~충주, ③ 충주~유곡, ④ 유곡~달성, ⑤ 달성~청도, ⑥ 청도~밀양, ⑦ 밀양~양산, ⑧ 양산~부산 등 8개 구간으로 나눌 수 있다. 이 가운데 ①,②,④,⑥,⑧ 등 5개 구간은 지형이 평탄하여 수레를 사용하는 데 별 문제가 없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그러나 ③구간은 조령과 관갑천, ⑦구간은 작천과 황산천 등 험로가 많아 수레사용이 불가능하였다. 따라서 영남대로의 약 75%(300㎞)는 수레 사용이 가능하였고, 25%에 해당하는 80~100㎞는 불가능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6) 교통양식 - 문경의 발구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와 갈평리에서 고로들의 제보를 토대로 복원시켜 본 발구는 영서 산지의 것보다 형태가 정교하여 일종의 썰매에 가까웠다고 생각된다. 이 기구는 소가 끌었는데 발통과 방틀의 두 부분으로 구분되었다. 발통은 발구의 다리로서 썰매와 같은 역할을 한 부분이었으며, 길이 약 30㎝에 달하는 상수리나무 기둥을 반으로 나누어 만들었다. 나무의 앞부분은 둥글게 깎아서 눈길 또는 진흙땅 위로 잘 미끄러지도록 다듬었다. 오래 사용한 발통은 방틀에서 떼어내고 새것으로 교환하였다. 방틀은 발구의 몸체에 해당하였다.
  발구의 수송 능력은 눈이 쌓인 길일 때 쌀 10~15섬을 싣고 하루에 30리를 갈 수 있는 정도였다. 이 기구는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원거리 수송이나 시각을 다투는 화물의 수송에는 부절합하였다. 발구를 비롯한 민속적 수송 도구들은 오늘날 교통이 불편한 산간지역에 약간 남아 있을 뿐인데, 제작과정이 단순하기 때문에 문경,연풍,단양 등지의 주민들은 손쉽게 만들어 사용했었다.

6. 천년의 발자국 관갑천

  도로 기술자들은 고갯길의 경사를 줄이기 위하여 영마루를 절단하여 토석을 제거하는 예가 많았다. 양재동과 판교 사이 다리내 고개의 안부에는 凹자형으로 절단된 부분이 있었으나 경부고속도로 건설 당시에 옛 흔적이 소멸되었다. 그러나 임오치·조령·계립령·관갑천잔도·팔조령 등지에는 아직도 인공 안부(人工鞍部)의 흔적이 남아 있다.
  156년에 개통된 계립령로는 고려 말까지 중요한 교통로 역할을 했으나 선초에 조령을 공로로 개발함에 따라 쇠퇴하였다. 계립령은 그 위치의 비정에 있어서 학자들 간에 논쟁이 심한데, 현재 수안보에서 미륵리로 넘어가는 초입의 고개를 1:50,000 지도상에는 지릅재 또는 계립령이라 표기하고 있으며, 미륵리와 문경읍 관음리 사이의 안부(鞍部)를 하늘재로 기입하였다. 그러나 하늘재로 불리는 안부가 사실상 계립령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적지 않으며,『여지도서』의 문경현 읍지 지도에도 이 고개를 계립령으로 표기해 놓았으므로 필자도 이를 계립령이라고 생각한다. 이 고개 위에는 둘레가 약 1.5㎞에 달하는 달마산성이 남아 있으며, 아치식 석문과 산정상에 탄항 봉수대가 있다. 산성이 시작되는 포암산 중턱의 평탄면에는 신라시대의 토기편과 고려시대의 기와 조각이 출토되었다. 평탄면에는 커다란 주춧돌들이 흩어져 있어, 이 장소가 계립령의 영애(嶺애)를 지키던 취락터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고개를 넘으면 문경읍내로 통하는 도로와 여우목고개를 넘어 예천,안동으로 가는 길이 나온다.
  조선시대에 조령을 간선도로로 지정하였으나 그 주변에는 계립령, 이화령 등 소로와 간로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임진왜란 후 조정에서는 방위상의 문제를 고려하여 조령 직로 외의 모든 영로를 폐쇄하고자 하였으나 계립령은 역사가 길고 통행자가 많아 남겨두기로 하였다. 그 대신 고갯마루와 문경의 관음리에 책문(柵門)을 설치하여 통행자를 검색하였다. 조령이 관리 및 일반 여행자의 통행이 많았던 것과 달리 계립령은 보부상과 우마의 통행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계립령은 현재 거의 폐도화하였으나 1970년대 말까지 임도로 이용되었다. 문경읍에서 계립령 정상 부근까지 포장도로가 건설되었으므로 옛 도로의 흔적은 거의 소멸되었으나, 미륵리 쪽의 경사면은 통행이 중단되어 부분적으로 과거의 흔적이 남아 있다. 영마루의 노반개간부는 폭과 높이가 각각 약 5m이며, 영마루를 덮고 있는 화강편마암 풍화물질이 유수에 의하여 도로를 따라 미륵리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지면이 가라앉은 상태로 남아 있는 옛 도로의 폭은 약 5m이다.
  영남대로상에는 적어도 네 곳 이상의 천도(遷道)가 있었다. 천도란 하천변의 절벽을 파내고 건설한 길을 말하는데, 주요 천도는 충주 남쪽의 달천 좌안(左岸), 문경새재 조곡관(2관문) 아래의 용추 부근, 문경 남쪽의 관갑천, 밀양의 작천, 양산의 황산천 등이었다. 이러한 천도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관갑천과 작천이었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들 두 천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관갑천은 용연의 동쪽 벼랑을 말하며 토천(兎遷)이라고도 한다. 돌을 파서 만든 잔도(棧道)가 구불구불 6, 7리나 이어진다. 전해오는 얘기에 의하면 고려 태조 왕건이 남정시에 이곳에 이르렀는데 길이 막혔다. 마침 토끼가 벼랑을 타고 달아나면서 길을 열어주어 진군할 수 있었으므로 토천이라 불렀다고 한다.39)<『신증동국여지승람』권29,문경현 형승조>

  … 여러 계곡의 물이 모여 내를 이루어 관갑에 이르러 비로소 커지는데, 이 관갑이 가장 험한 곳이라서 벼랑을 따라 잔도를 열어 인마가 겨우 통행한다. 위에는 험한 절벽이 둘러 있고 아래로는 깊은 내가 있어, 길이 좁고 위험하여 길손들이 모두 두려워한다. 몇리를 나아간 뒤에야 평탄한 길이 되어 내를 건너는데 이것이 견탄이다. 견탄은 호계현 북쪽에 있는데, 나라에서 제일가는 요충이며 경상도에서 가장 험한 곳이다.40)<『신증동국여지승람』권29,문경현 역원조>

  밀양부의 동남쪽 41리에 있다. 원(작원을 일컬음)으로부터 남으로 5, 6리를 가면 낭떠러지를 따라 잔도가 있어 매우 위험한데, 그 한 구비는 돌을 깨고 만들었으므로 아래를 내려다보면 천 길 아래로 검푸른 물이 있다. 사람들이 마음을 졸이고 두려운 걸음으로 지나간다. 예전에 한 사또가 떨어져 물에 빠진 까닭에 원추암(員墜岩)이라고 부른다.41)<『여지도서』하,경상도 밀양부 역원조>

  위의 두 천도는 영남지방에서 가장 유명한 험로들이다. 관갑천 잔도는 영강 수면으로부터 10~20m 위의 석회암 절벽을 깎아서 만든 길이다. 오늘날 이 길은 거의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잡목이 무성하여 녹음기에는 보이지 않으나 건기에는 길의 흔적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항공사진을 보면 도로의 흔적은 쉽게 판독된다.
  총연장 2㎞를 조금 넘는 이 잔도는 비록 초보적인 수준이기는 하나, 세 가지의 공법을 이용하여 건설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잔도의 제1구간은 급한 암벽을 깎아내어 그 토석을 다져 노면을 평탄하게 만들었으며 토석의 유실을 방지하기 위하여 약 3m 높이의 축대를 쌓았다. 제2구간은 벼랑이 가장 가파른 곳으로서, 석회암과 역암(礫岩)을 절단한 흔적이 뚜렷하게 보인다. 노면은 1천여 년간 행인과 우마의 발에 닳아서 반들반들하다. 현재 남아 있는 길의 폭은 0.5~1.0m에 불과하므로 우마의 통행이 전혀 불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사결과와 고문헌의 내용을 검토해 보건대, 과거의 도로가 유실되어 좁아진 것으로 사료된다. 현지 주민들의 제보에 의하면 80~90년 전 등짐을 진 사람, 가마, 길마 등이 능히 이 길을 통하였다고 하는데, 가마나 길마가 통행하려면 길의 폭이 적어도 2~3m는 되어야 하는 것이 상식적인 일이다.42)<1974년 경북 문경군 유곡역지 이한규(76세) 제보>
  필자는 수차에 걸친 정밀조사를 통하여 관갑천 잔도의 폭이 과거에는 현재보다 더 넓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잔도의 폭이 극히 좁아지는 지점에는 축대를 쌓아 길폭을 넓히거나 길 가장자리에 말뚝을 박고, 그 위에 나무로 만든 난간을 설치하여 길을 넓혔음을 입증하는 흔적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잔도(棧道,hanging gallery)라는 명칭 자체도 인공으로 만든 돌사다리와 나무난간에서 연유한 것 같다.
  관갑천 잔도의 제3구간은 산줄기가 뻗어 내려와 고갯마루를 이루는 부분에서부터 시작된다. 2구간과 3구간 사이에는 석회암맥이 돌출한 부분이 나타나는데, 고대의 토목 기술자들은 이 암맥의 가운데를 높이 4m, 밑부분 폭 2m, 윗부분 폭 4m 정도 절단하여 인공으로 암석 안부(岩石鞍部,stone notch)를 만들었다. 이 안부는 영남대로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보존상태도 양호하다. 안부로부터 약 300m는 영강의 공격사면에 해당하는 절벽을 ‘ㄴ’자로 절단하여 도로를 만들었으나 오늘날에는 대부분이 무너지거나 토석으로 덮여 있다. 또한 공격사면이 끝나는 곳은 탄광의 개발로 인하여 옛길이 완전히 소멸되었다.
  영남대로상의 또 하나의 유명한 천도는 낙동강 하류의 동안(東岸)에 있다. 이 천도는 삼랑진읍 동남쪽 2㎞ 지점으로부터 양산군 물금 사이의 약 15㎞ 구간에 건설된 것이다. 이 벼랑길은 작원관에서 중리동의 하주막에 이르는 약 3.5㎞의 작천 잔도와 양산군 원동으로부터 물금에 이르는 약 8㎞의 황산천 잔도(黃山遷 棧道)로 이루어져 있다. 작천 잔도는 낙동강 수면으로부터 약 10~50m의 절벽 위에 놓여 있었으며, 황산천 잔도의 물금 북쪽은 100m 이상의 벼랑길을 이루고 있었다. 1904년 일제가 작천과 황산천을 따라 경부선을 부설함으로써 영남대로의 주요부가 소멸되었다. 삼랑진 부근에 있었던 작원은 철폐되고 관문은 철도 옆으로 이설하였으나, 1925년 대홍수 당시 완전히 유실되어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최근 밀양시에서는 작원관을 복원하였다. 오늘날 작천 잔도의 흔적이 남아 있는 장소는 작원관 부근과 경부선 상·하행선의 터널이 뚫려 있는 벼락바위 윗부분뿐이며 도로 폭은 약 2m이다.
  작천과 황산천은 19세기 말까지 밀양과 부산을 연결하는 간선도로였으며, 양산은 중간 경유지로 발달하였다. 김해 역시 이 도로의 원동에서 도하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경부철도 부설로 이 도로가 소멸됨에 따라 삼랑진과 부산 간은 근거리에 있으면서도 김해로 우회하는, 도로교통상으로는 먼 지역이 되었다. 더구나 원동, 물금 등의 마을은 완행열차를 타지 않고는 부산이나 밀양 등지로 나갈 수 없는 불편한 곳으로 변하였다.
  관갑천이나 작천과 같은 험준한 잔도는 영남대로의 발달에 큰 지장을 주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길은 수레가 통과할 수 없음은 물론 기마(騎馬)의 통행에도 불편하였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지형이 험준하여 도로의 발달에 불리하며, 그로 인하여 수레를 사용할 만한 도로를 만들기 어렵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그러한 주장은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정조대의 사헌 홍양호가 상소문에서 “천하에 촉(蜀)의 도로만큼 험한 곳은 없다. 이곳으로 상여의 필마가 성도로 들어갔고, 제갈의 목우유마 역시 험한 촉의 잔도를 통행하였다” 라고 주장한 바와 같이 관갑천과 작천의 잔도 역시 조금만 더 넓히고 노면을 평탄하게 다듬었더라면 수레도 충분히 통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7. 지리적 사례로서의 영남대로

  영남대로는 고대로부터 조선조 말까지 한강 유역과 경상도 지방을 연결하는 종관(從貫) 교통로 역할을 해왔다. 필자는 이 도로의 연구를 통하여 우리 민족의 생활사와 관련되는 여러 가지 사항들을 역사 지리적 관점에서 고찰한 바 있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첫째, 영남대로는 한강 하류 지방과 낙동강 하류 지방을 연결하는 대동맥으로서 우리 선조들이 수천 년간 왕래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길이다. 그러므로 이 도로의 노선은 시대에 따라 그 위치가 바뀌었는데, 그러한 노선 변화는 외적의 침입,수도 및 감영의 이전, 조세제도의 변경, 행정구역의 개편 등 역사상의 대사건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교통양식의 변화도 노선 변화에 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둘째, 영남대로는 한강 유역과 낙동강 유역을 정치·경제·문화·사회적으로 통합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영남대로의 영향력은 이에 그치지 않고 강원도,경기우도,충청우도에까지 미쳤으므로 이 도로는 한반도의 지역적 통합을 촉진시켜 준 원동력이 되었다.
  셋째, 영남대로는 시대에 따라 그 기능이 조금씩 변하였다. 고대의 영남대로는 병력과 군수물자의 수송로로 발전하였으며, 고려시대에는 행정통신, 세곡의 수송, 문화의 전파 등 다양한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 전기의 영남대로는 유교적 봉건제도를 운영하기 위한 행정적 요구에 따라 설립·운영되었으나 후기에는 상업로의 역할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일제 때에 이루어진 철도의 부설, 신작로 개수 및 근대 교통기관의 도입에 따라 영남대로는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넷째, 우리 민족이 생각하는 훌륭한 도로란 외형적으로 웅장한 것이 아니고 질적으로 좋은 것을 의미하였다. 우리나라의 옛 도로는 대제국의 도로처럼 넓지 못했고, 포장이 안 된 상태였으며, 노변의 시설도 웅장하지 않았다. 그러나 도로는 반드시 필요한 곳에 만들었고, 노폭과 노면은 당시의 사회 및 경제사정에 맞추어 설계·건설되었다. 다시 말하면 토양침식이 심한 자연조건을 고려하여 우리 조상들은 소박한 도로를 만들어 이를 잘 보수, 관리함으로써 도로의 효율성을 높이고자 하였다. 그러나 왕조의 전성기에는 도로의 관리가 철저하여 국가의 기동력이 뛰어났으나 쇠퇴기에는 도로가 파괴되고 각종 시설이 황폐되어 교통이 두절 되는 곳이 많았다. 영남대로가 잘 관리·운영된 시기는 사람과 화물의 이동이 활발하여 사회가 발전했던 시기에 해당된다. 그러나 영남대로가 황폐되었던 시기는 우리나라가 내우외환에 직면하였던 시기와 대체로 일치한다. 그러므로 영남대로의 역사는 우리 민족의 생활사의 축도(縮圖)라고 할 수 있다.

고지도로 본 문경의 옛길

양보경(성신대학교 지리학과 교수)

우리나라 고지도의 특징 중 하나는 회화식 지도이다. 회화식 옛 지도를 들여다보면, 삶의 터전으로서의 지역의 모습과 당시 사람들이 바라보았던 지역의 모습을 찾아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예부터 좌도우서(左圖右書)라 하여 왼편에는 지도를, 오른편에는 서책을 두고 가까이하며 치국과 경륜의 바탕으로 삼았다. 지도는 크게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통치의 행정·군사적인 필요성에서 만들어졌지만, 그에 앞서 작게는 사람들의 모듬살이에 필요한 물자가 있는 곳, 이웃 지역, 길 등에 대한 지식을 정리하고 남기기 위하여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지도에는 자연환경은 물론 인간이 지표상에 만들어 나간 수많은 인문현상들이 반영되어 있다. 곧 지도(地圖)는 지역의 모습을 가장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드러내주며, 지역의 모습을 시각적으로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특히 우리나라 고지도의 특징 중의 하나인 회화식 지도는 당시 사람들이 필요로 하였던 정보와 그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이며, 국토관, 지역관 등을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따라서 옛 지도를 들여다보면 삶의 터전으로서의 지역의 모습과 함께 당시인들이 바라보았던 지역의 모습을 찾아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고지도 중 단독으로 전해지는 것들은 대부분 조선시대, 그것도 조선후기의 것이다. 아마도 이는 고려 말 원나라와의 오랜 전쟁, 그리고 임진왜란·병자호란과 같은 전쟁을 통해 지도들이 유실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문경을 그린 옛 지도에는 직접적으로는 문경의 과거 모습을 보여주지만, 문경의 현재와 미래의 모습을 그리는 바탕이 된다는 점에서 향토문화와 지역문화 연구의 중요한 기초 자료가 된다. 문경을 그린 옛 지도를 통해 문경의 옛 모습과 옛길을 추적해 보기로 한다.

1. 전국지도에 표현된 문경과 문경의 옛길

  문경의 옛 지도는 조선 후기에 편찬된 본들만 남아 있으며,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전국이나 도별 지도책 또는 지도첩 속에 다른 군현 지도들과 함께 부분으로 포함되어 있는 경우이다. 둘째는 개별 군현지도로 독립되어 있는 지도이다. 셋째는 읍지 등 지지류에 포함되어 있는 지도이다. 문경이 표현된 주요한 전국지도는 다음과 같다.『동국여지지도(東國輿地之圖)』,1710년대,개인 소장.『해동지도(海東地圖)』,18세기 중엽,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청구도(靑邱圖)』,1834년,국립중앙도서관 소장.『해좌전도(海左全圖)』,1850년대 후반,개인 소장.『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1861년,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대동여지전도(大東輿地全圖)』,19세기 후반,개인 소장.
  전국지도와 도별지도는 문경 내부의 자세한 모습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문경의 다른 지역과의 관계, 즉 상대적 위치를 일목요연하게 드러내 준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1668~1715)가 1710년경에 그린『동국여지지도』는 18세기 초의 우리나라의 조선전도를 대표하는 지도 중의 하나이다. 이 지도는 세로 114.8㎝, 가로 65.2㎝로 크기는 작지만, 해안지방의 섬들이 상세히 표시된 점이 특징이다. 문경이라는 군현명 옆에 ‘우사일(右四日)’ 이라고 기록하여 문경이 경상우도(慶尙右道) 소속임과 서울에서 4일 거리에 있는 고을임을 표시하였다. 또한 충주에서 조령을 넘어 문경으로 오는 영남대로(嶺南大路)는 굵은 홍선(紅線)으로 그려 간선도로임을 표시하였다.충청도 연풍에서 영남으로 연결되는 길 중에 ‘이화현(伊火峴)’에 고개 이름이 적혀 있고, 다른 길에는 고개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다.
 『해동지도』는 18세기 중엽에 편찬된 8책의 훌륭한 지도책으로, 전국 각 군현의 지도를 모아 수록한 전국 군현지도집이다.『해동지도』에는 주요 산천, 관아, 역원, 면, 창 등이 표시되어 있고, 도로가 적색 선으로 그려져 있다. 또 지지(地誌)에 해당하는 내용을 여백에 기록하여 각 지역에 관한 내용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한 점도 특징이다. 주기에는 호구, 경지면적, 고장의 둘레, 군병총수(軍兵總數), 환곡총수(還穀總數), 각 면과 위치, 연혁, 사방강계, 지형적 특징, 군명, 산천, 고적, 교량, 봉수, 역원, 형승, 토산 등을 매우 자세하게 기록하여 마치 읍지를 요약해 놓은 것처럼 보인다.
 『해동지도』중에는 크기가 큰 전도인 <대동총도(大東摠圖)>(세로 257.7㎝, 가로 157.7㎝)가 포함되어 있다. 이 지도의 문경 부분을 살펴 보면, 백두대간과 문경을 둘러싼 산세가 매우 잘 표현되어 있는 점이 특징이다. 조령의 3개 관문도 산세에 의지해 그려져 있고, 고모산, 토잔(兎棧), 유곡역 등이 보인다.
  토잔은 ‘관갑천잔도’로 부르기도 하는 길로서,『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관갑천(串岬遷)으로 기록하였다. 이어 “용연(龍淵)의 동쪽 언덕이고, 토천이라고도 한다. 돌을 파서 사다릿길을 만들었는데, 구불구불 거의 6, 7리나 된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고려 태조가 남하하여 이곳에 이르렀을 때 길이 없었는데, 토끼가 벼랑을 따라 달아나면서 길을 열어주어 갈 수가 있었으므로 토천이라 불렀다’ 한다. 그 북쪽의 깎아지른 봉우리에 옛날에 지키던 돌 성터가 있다” 고 기록하였다.
 『해좌전도』는 19세기 중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표적인 목판본 조선전도이다. 지도의 윤곽과 내용은 18세기 중엽 우리나라 지도 발달에 전환을 가져온 농포자 정상기(鄭尙驥,1678~1752)의『동국지도(東國地圖)』와 유사하여『동국지도』유형의 지도로 평가받고 있다. 산줄기와 하계망, 그리고 조선시대 지방 행정단위인 부(府)·목(牧)·군(郡)·현(縣), 그리고 군사 요충지였던 진보(鎭堡)를 자세하게 표시하였다. 특히 팔도(八道)의 경계를 점선으로 나타내고 그 위에 채색을 함으로써 도의 구분을 명확히 하였다. 부·목·군·현은 원 안에 이름을 썼는데, 군현명 우측에 서울부터 해당 지역까지의 거리를 이수(里數)로 적어놓아, 각 지역까지의 절대 거리를 파악할 수 있다. 문경은 서울에서 308리의 거리에 위치하였으며, 207리 거리였던 충주에서 약 100리 떨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지도는 크기가 작으므로(세로 97.8㎝, 가로 55.4㎝) 조령과 영남대로, 유곡역 정도가 그려져 있는데, 이러한 모습은 소형 조선전도의 대표적인 구도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산자 김정호의 작품인『청구도』는 2권으로 구성된 채색필사본 전국지도책이다. 『청구도』는 전국지도 중 가장 큰 것의 하나이며, 각 군현의 경계가 표시되어 있다. 문경에 속한 각 면의 이름과 산천, 성곽 등이 자세하다. 호 2,400, 전 2,800결인 요성역도 기록되어 있고, 조령산성 북쪽 ‘탄현(炭峴)’ 에는 ‘고구려 온달이 패몰한 곳’이라 기록되어 있다.
 『대동여지도』는 고산자 김정호가 1861년(1864년 중간본)에 제작한 분첩절첩식 형태의 전국지도이다. 전국지도이지만 축척이 크기 때문에 문경과 그 주변 지역을 살필 수 있다. 문경의 산천의 배치, 주변 지역과의 관계, 도로망 등을 일목요연하게 살필 수 있는 장점이 있다.『청구도』에 비해 산줄기가 뚜렷하고, 도로가 상세하다. 특히 길 위에 10리마다 점을 찍어 가고자 하는 곳까지의 거리를 바로 도로상에서 확인하고, 축척을 지도 내용 중에 표시하는 방식을 고안하였다.
 『대동여지도』에서는 문경 내의 네 개의 주요한 길을 살필 수 있다. 첫째 충청도 충주에서 조령을 넘어와 동남쪽으로 찰방역이었던 유곡역(幽谷驛)을 거쳐 함창으로 향하는 영남대로, 둘째 충청도 연풍에서 이화령을 넘어 문경읍으로 들어오는 길, 셋째 충청도 보은에서 용천을 따라 상류로 올라와 백두대간을 넘어 옛 가은현(加恩縣)을 거쳐 문경읍으로 오는 길, 넷째 문경에서 야운령(野雲嶺)·사불현(四佛峴)·명봉치(鳴鳳峙) 등의 고개를 넘어 동쪽으로 향하는 길이다. 또한 영남대로 외에 유곡역 부근에서 갈라져 나가는 네 갈래 길도 잘 나타나 있다.
  그밖에 충청도와 경상도를 가로막고 있는 백두대간을 넘는 고개로 동북쪽부터 호항령(狐項嶺), 탄항(炭項), 계립령(鷄立嶺), 조령(鳥嶺), 이화현(伊火峴), 이화남령(伊火南嶺), 주현(周峴), 불한령(不寒嶺) 등 여러 고개 이름을 적어놓아, 작은 길들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대동여지전도』는 김정호의『대동여지도』를 바탕으로 하여 축소 요약한 목판본 조선전도인데, 김정호의 작품인지 여부에 관심과 논란이 지속되고 있는 지도이다. 이 지도도 소형 조선전도(세로 114.3㎝, 가로 64.8㎝)이므로『해좌전도』와 비슷한 내용이 수록되었으니, 문경을 통과하는 길로 조령에서 넘어오는 영남대로와 유곡역에서 갈라져 용궁,예천으로 향하는 길만이 표시되어 있다.

2. 도별지도에 표현된 문경과 문경의 옛길

  각 도를 단위로 그린 도별지도(道別地圖) 유형의 지도에는 경상도 지도 중에 문경이 표시되어 있다. 도별지도는 ‘동람도’ 식 유형과 사실적이고 정확한 도별지도 유형으로 크게 나눌 수 있는데, 주요한 지도는 다음과 같다.
 <동람도식 도별지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중<경상도>,1531년,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팔도지도(八道地圖)』중<경상도>,18세기,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지도(地圖)』중<경상도>,18세기 중엽,영남대학교 박물관 소장.
 『해좌승람(海左勝覽)』중<경상도>,19세기 후반,영남대학교 박물관 소장.
 『구폭도(九幅圖)』중<경상도>,19세기 전반,영남대학교 박물관 소장.
 『여지도(輿地圖)』중<경상도>,19세기 전반,영남대학교 박물관 소장.

  <정상기식 도별지도>

 『여지도(輿地圖)』중<경상도>,18세기 말,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경상도지도(慶尙道地圖)』,18세기 후반,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해동도(海東圖)』중<경상도>,18세기 말,호암미술관 소장.
 『각도지도(各道地圖)』중<경상도>,18세기 후반,영남대학교 박물관 소장.
 『대한전도(大韓全圖)』중<경상북도>,1899년,영남대학교 박물관 소장.
 『대한신지지부지도(大韓新地志附地圖)』중<경상북도>,1907년,영남대학교 박물관 소장.

  조선 전기에 여러 차례 시행되었던 지리지 편찬 사업을 집대성한 전국지리지(全國地理志)『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전국지도인 <팔도총도(八道總圖)>와 팔도(八道)의 도별지도가 포함되어 있어 지도와 지지(地志)의 결합을 보여주는데, 이를 ‘동람도(東覽圖)’ 로 약칭하였다. 이는 9장의 지도 판심에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줄여 ‘동람도’ 라고 써 넣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신증동국여지승람』중에 포함된 팔도의 도별지도 중 <경상도>지도에는 문경과 주흘산, 그리고 조령 대신 초참(草站)이 표시되어 있으며, 도로는 나타나 있지 않다. 이는『신증동국여지승람』에 포함된 지도들의 제작 목적과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지도는 지역의 정보를 정확히 전달하려 했던 독립된 단독 지도가 아니고,『신증동국여지승람』이라는 지리지에 포함된 부도적 성격의 지도이다. 특히 이 지도는 주로 산천에 제사 지내는 곳을 표시하였기 때문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린 지도는 매우 간략한 형태였으나 목판으로 인쇄하여 널리 보급된 책에 수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민간에서 지도를 만들 때 원형이 되었다. 후대에 일반인들이 이를 모사하여 제작한 필사본 또는 목판본 지도들이 수없이 보급되었다.
  후대에 이를 모사하여 그린 ‘동람도’ 식 경상도 지도들에는 수록된 정보는 미약하지만 그 수가 증가하였다.『팔도지도』중<경상도>지도에는 ‘조령’,‘유곡(역)’ 과 서울에서의 ‘4일정’ 이라는 거리가,『지도』중<경상도>지도·『구폭도』중 <경상도> 지도에는 이 외에 문경이 현감이 파견되었던 고장임을 나타내는 ‘감(監)’ 이라는 읍의 품계 기록이 추가되고, 유곡역도(幽谷驛道)를 직사각형으로 표시한 모습을 볼 수 있다.
 『해좌승람』은 팔도를 그린, 19세기 후반의 아름다운 채색필사본 지도이다. 지도 이면에는 도별 민호·전결·군정 자료와 각 군현에서 사방경계에 이르는 거리 ‘이수(里數)’와 서울로부터의 거리인 ‘거경이수(距京里數)’도 수록되어 있다. 도별지도는 ‘동람도’ 처럼 군현명, 주요 산천명 등만이 주로 수록되어 소략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표현 기법 면에서는 독특한을 보여주고 있다. 산은 ‘동람도’에서처럼 연맥이 아닌 독립된 형태로 표현하고 있으나, 특정한 산들은 수목을 그려넣어 입체감을 나타내고 있고, 멀리 배경이 되는 산들은 몰골법으로 처리하여 회화적인 기법을 가미하였다. 특히 도의 경계에 있는 산들을 크게 그리고 수목으로 강조하여 경계를 나타냈다. 바다에도 ‘동람도’ 식으로 수파묘를 그렸지만 해안은 휘몰아치는 파도를 본떠 굽이치는 선으로 표현하였다. 이 지도는 ‘동람도’ 의 전통을 잇는 유형으로 행정·국방 등과 관련된 실용적 목적에서 제작된 것이기보다는 민간에서 유람이나 학문 수행시 보조적으로 이용했던 지도를 보인다. 표현 기법에 있어서는 몰골법과 같은 회화식 기법을 활용하고 수파묘의 표현과 같은 전통적인 방식도 따르고 있어서  ‘동람도’ 식 지도 제작의 전통이 19세기 후반까지 민간에서 변용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독특한 지도이다.
 『여지도』중 <경상도> 지도는 원형의 천하도와 중국,일본,조선전도 및 도별지도로 구성된 채색필사본 지도첩 중에 수록된 경상도 지도이다. 이 지도는 여타의 목판본 지도와 달리 도의 경계에 산지를 연봉의 형식으로 표현하여 경계를 강조한 반면, 일반적인 목판본 지도에 수록된 군현의 진산(鎭山)들은 생략하였다. 원 내부에 군현명을 기입하였는데, 좌도(左道)와 우도(右道)는 채색을 달리하여 구분하였다. 육로를 흑선으로 그렸는데 육로를 표시한 선 위에 군현간의 이수(里數)를 표시하여 일종의 도로지도적인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 문경에서 유곡역까지 40리, 유곡역에서 함창까지 20리, 용궁까지 80리 거리였음을 보여준다.
  이어서 정확하고 사실적인 도별지도에 문경이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살펴본다. 이 유형의 대표적 지도는 정상기의『동국지도』중의 <팔도분도>이다.『동국지도』는 일정한 축척을 사용하여 도별지도를 합하면 전도가 되도록 고안되었으며, 축척인 ‘백리척(百里尺)’을 표시하여 거리를 계산할 수 있도록 한 점, 축척이 약 1:420,000의 대축척 지도로 커짐에 따라 도로·봉수·지명 등을 상세하게 나타낸 점, 조선의 윤곽 특히 북부지방의 윤곽이 정확해진 점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특히 정상기의 지도는 아들 정항령(鄭恒齡,1710~1770), 손자 정원림(鄭元霖,1731~1800), 종손 정수영(鄭遂榮,1743~1831) 등 4대에 걸쳐 계속 전사·수정이 되면서 조선 후기에 가장 광범위하게 이용되었던 지도로서, 필사본이 수십여 종 남아 있다.
  이 유형의 경상도 지도에는 산과 강, 도로 등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여지도』중 <경상도> 지도와『해동도』중 <경상도> 지도는 초기와 후기적인 모습의 전형을 보여준다.『경상도지도』는 주흘산과 조령 등 백두대간의 모습을 더 회화적으로 표현하였으며, 문경에서 함창으로 향하는 도로 위에 80리라고 거리를 표시해 놓았다.『각도지도』중 <경상도> 지도는 지도 좌측 상단에 축척인 ‘백리척’이 표시되어 있다. 특히 이 지도는 지도가 간략한 대신 경상도 내 71개 군현의 지역간 거리를 표로 정리해 놓은 도리표를수록한 도로지도로서 의의가 있다.
 『대한전도』는 1899년에 학부편집국에서 간행한 지도이다. 1896년에 개편된 지방제도에 따라 제작된 13도의 도별지도와 전도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나라의 전통적 지도 제작의 기법과 서양의 근대적 기법이 혼재된 과도기적 성격을 지닌 지도이다. 이 지도에는 경위선이 그려져 있는데, 경선은 중국 북경을 기준으로 한 편동도수(偏東度數)를 기초로 하였다. 그러나 도별도에는 경위선이 없는데 전통적인 지도 제작의 방식이 계승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지도는 대중적 보급을 목적으로 한 소책자의 형식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축척이 작은 지도이다. 그러나 지도상에 수록된 내용은 당시 행정구역인 부(府)·군(郡) 등과 혁파된 감영(監營)·수영(水營)·병영(兵營)·찰방(察訪)·진보(鎭堡) 등의 지명과 주요 산천, 도서(島嶼) 등으로 비교적 상세하다. 그리고 기법상으로는 산지를 표현하는 데 산지를 깃털 모양으로 그리는, 서양에서 도입된 우모식(羽毛式) 방법을 도입하였고, 범례를 지도 여백에 ‘기호’로 표시하였으며, 방위 표시를 글자가 아닌 기호로 하였다.
  또한 각 도별지도 중 해안 지역에는 크고 작은 많은 섬들이 매우 상세하게 그려져 있고 당시의 해로도 잘 나타나 있어서 해안지역이 중요하게 인식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서구 열강과 중국·일본·러시아 등의 주변 세력이 밀려오던 상황에서 우리 영토에 대한 인식을 고취시키려는 목적에서 제작된교육용 지도로서, 전통적 지도 제작이 서양의 지식을 수용하면서 변용되어 가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크기가 작으므로 조령, 문경읍, 유곡역 정도가 표시되어 있다.
 『대한신지지부지도』는 1907년 6월 위암(韋庵) 장지연(張志淵)이 애국심을 고양하기 위해 저술한『대한신지지』에 수록된 부도(附圖)만을 모아 만든 지도책이다. 여기에는 대한전도와 1896년 이후 13도로 행정구역이 바뀐 상황을 반영하는 각 도별도가 수록 되어 있다. 경선은 19세기 후반에 제작된 지도에서 자주 보이는 중국 북경을 기준으로 하는 선이 아니고 영국을 기준선으로 사용하였다. 전통적 기법보다는 서양식 근대적 기법에 의해 만든 지도로 볼 수 있다. 전도인『대한전도』의 좌측 상단에 ‘현성운철판조각(玄聖運鐵板造刻)’ 이라고 기록해 놓은 것으로 보아 철판 인쇄본 지도임을 알 수 있다. 채색은 후에 더한 것으로 보인다. 을사조약을 거치면서 대한제국이 위기적 상황으로 치달음 즈음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제작된 계몽적 성격이 강한 지도이다.
  문경이 그려진 <경상북도> 지도는 축척 100만분의 1 지도이다. 각 부·군의 명칭과 주요 산천·역원·창고·진보 등이 수록되어 있으며, 산지는 우모식 기법으로 표현되었다. 당시 부설된 철도를 비롯한 도로망이 상세하고 해로도 표시되었다. 서구식 경위선만의 도입, 기호화된 형태의 범례 사용, 축척 표시, 방위 표시의 기호화, 우모식의 산지 표현 등으로 미루어볼 때 서양에서 도입된 근대적 지도 제작 기법을 도입한 지도이다. 영남대로 옛길을 대신해 경부선 철도가 충북 황간-김산(김천)-대구로 뻗어 있는 모습이 눈에 띈다. 그러나 다른 도로와 달리 대로라는 뜻에서 쌍선으로 표시한 영남대로가 조령을 넘어와 문경을 거쳐 토원(兎院)·유곡(幽谷)역을 지나 함창으로 향하는 모습이 건재해 있다.

3. 군현지도 및 분도에 표현된 문경과 문경의 옛길

  군현지도란 조선시대 지방행정의 기본 단위였던 부(府)·목(牧)·군(郡)·현(縣)을 대상으로 하여 그린 지도로서, 군현도(郡縣圖) 또는 읍지도(邑地圖)로 불렸다. 군현지도는 그 시작이 매우 오래되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현재 전하는 지도는 대부분 18세기 이후에 제작된 것이다. 군현지도의 발달은 조선 후기의 지도제작에서 보이는 현저한 변화 중의 하나이다.
  지도의 내용은 지역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전달하는 데 가치가 있다. 그 중에서도 군현지도는 사람의 삶의 구조의 변화에 따른 지역의 변모, 그리고 당시 사람들이 중시하였거나 필요로 하였던 내용들을 잘 반영하고 있는 지도이다. 조선 후기의 군현지도에 도로(道路),진도(津渡),장시(場市),점막(店幕),창고(倉庫) 등을 상세하게 표시한 것은 당시 상업 유통경제의 증가, 도로 이용의 증가 등 사회 경제적인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지역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더라도, 지도를 만들었던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면 필요하다고 새롭게 인식한 내용을 그리거나 강조하게 된다. 그러므로 지도에는 옛 사람들의 생각이 스며 있다. 군현지도는 옛 시대의 지역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린 지도이다.
  이와 더불어 군현지도에는 옛 사람들의 생각이 그려져 있어 생생한 감동을 준다. 군현을 단위로 그린 군현지도나 하위 특정 지역을 대상으로 하여 그린 분도(分圖) 중 문경을 담고 있는 대표적인 지도는 다음과 같다.
 『여지도(麗地圖)』중 <문경현>, 18세기 전반,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광여도(廣輿圖)』중 <문경현>, 19세기 초,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해동지도(海東地圖)』중 <문경현>, 18세기 중엽,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해동여지도(海東輿地圖)』중 <문경>, 19세기 초,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영남지도(嶺南地圖)』중 <문경현>, 18세기 중엽,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영남지도(嶺南地圖)』중 <문경현>, 18세기 중엽, 영남대학교 박물관 소장.
 『해동지도(海東地圖)』중 <조령성>, 18세기 중엽,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해동지도(海東地圖)』중 <조령전도>, 18세기 중엽,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문경지도(聞慶地圖)』, 1872년,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조령진산도(鳥嶺鎭山圖)』,1872년,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문경을수록한 군현 단위의 군현지도들은 문경의 모습을 가장 세밀하고 풍부하게 보여주는 지도이나, 18세기 이후에 제작된 본들만 전하고 있다.
  전국 각 군현의 지도를 모두 수록한 전국 군현지도집인『여지도』,『광여도』등은 18세기 중·후반에 제작된 것이나, 이에 수록된 내용은 대체로 18세기 전기의 상황이다. 전국 군현지도집이란 전국 각 지방의 모든 군현의 지도를 함께 모아 수록한 지도집을 말한다. 전국 각 군현의 지도를 모아 지도책이나 지도첩으로 만든 군현지도집은 방대한 분량, 내용의 상세함, 전국의 모든 지역을 한 종의 지도책에서 모두 살펴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광여도』는 총 381장에 달하는 채색 지도로 구성되어 있다. <문경현> 지도에는 문경의 산과 하천, 면, 성곽, 정자, 사찰, 창고 등이 간략하지만 잘 묘사되어 있다. 임진왜란 때 북쪽 여진족과의 싸움에서 기마전으로 승승장구했던 신립(申砬,1546~1592) 장군이 왜군의 주력부대가 조총을 가진 보병임을 이해하지 못하고 조령보다는 충주 탄금대의 평지를 택해 일본군을 방어하다 크게 패했다. 이것을 거울로 삼아 1708년(숙종 34) 조령에 관문(關門)을 대대적으로 수축하였는데, 지도에는 조령관(鳥嶺關), 중성문(中城門), 하성문(下城門) 등이 자세히 그려져 있다. 문경에서 조령만큼 중요했던 또 다른 군사 요충지는 용연(龍淵) 동쪽의 토잔(兎棧)이었다. 이곳은 관갑천(串岬遷)이라고도 하며 낙동강의 상류 영강이 이곳에서 깎아지른 절벽 사이를 흐르기 때문에 만들어진 낭떠러지 길을 의미한다. 그 옆에 고모성(姑母城)이, 강의 대안에 고부성(姑父城)이 위치하여 예부터 중요한 관방처였음을 알 수 있다. 토잔 아래쪽에는 절벽 바위를 그려넣어 이곳의 지형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읍치 뒤에 문경의 진산(鎭山)인 주흘산(主屹山)이 위엄을 자랑하듯 그려져 있고, 제사처였던 신묘(神廟)가 표시되어 있다. 주흘산 뒤로는 845년(신라 문성왕 8)에 창건되었던 혜국사(惠國寺), 그 옆에는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침입을 피해 잠시 머물렀다는 어류전(御留殿)터가 표시되어 있다. 지도 왼쪽의 가북면(加北面) 위쪽에는 879년(신라 헌강왕 5) 지증국사 원오(圓悟)가 창건하여 희양산파를 이룬 유명한 봉암사(鳳岩寺)가 그려져 있다. 가서면 부근에는 후백제의 견훤궁 터가 표시되어 있고, 읍치 동북쪽에 나라에서 쓸 황장목(黃腸木)을 생산하던 구산황장봉산(龜山黃腸封山)도 표시되어 있으나, 도로가 그려져 있지 않은 것이 단점이다.
 『해동지도』는 여타 군현지도집과 여러 점에서 상이하여 주목되는 지도집으로서, 유사한 지도가 남아 있지 않은 유일본 전국 군현지도집이다.『해동지도』는 370종의 지도를 8첩에 수록한 군현지도집으로 18세기 중엽에 만들어졌다.『해동지도』는 <천하도>와 같은 세계 지도로부터 북경궁궐도(北京宮闕圖)·유구도(琉球圖)·왜국전도(倭國全圖)와 같은 외국 지도, 조선여진분계도(朝鮮女眞分界圖)·요계관방도(遼계關防圖)와 같은 국경지역 지도, 팔도의 도별지도, 330여 군현지도, 영종도(永宗圖) 등 진보지도(鎭堡地圖), 조령성·함관령도(咸關嶺圖)와 같은 영애(嶺隘)·도로도(道路圖) 등 다양한 유형의 지도를 포함하고 있다.
  『해동지도』는 도로가 상세한 점이 특징인데, <문경현> 지도에도 지도책에 그려진 지도로서는 매우 자세하게 표시되어 있다. 조령을 넘어온 길과 연풍에서 이화현을 거쳐 오는 길은 물론, 희양산과 주현(周峴)에서 넘어 가북면으로 들어오는 길, 청화산 남쪽·가남면·가현내면으로 이어지는 길, 읍치에서 황장봉산을 거쳐 대원령(大院嶺)을 넘어 충주로 가는 길 등이 묘사되어 있다. 또한 지도의 상하좌우 여백에 인구, 토지면적, 역원, 봉수, 면명, 연혁, 고적 등 지역에 관한 설명을 써 넣어 지도와지지를 결합한 형태를 보인다.
 『해동여지도』와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의『팔도군현지도』『조선지도』는 또 다른 형식의 군현지도집이다. 이 지도들의 가장 큰 특징은 약 4.1㎝의 방안(方眼)에 그린 방안지도 또는 경위선 표식 지도라는 점이다. 크기가 가로 24.4㎝, 세로 16.2㎝에 불과한 작은 지도이므로 상세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전국의 모든 군현을 일정한 축척에 의해 그려 지도책으로 수록하는 데에서 오는 결과이다. 그러나 전국의 모든 지역을 일정한 축척으로 그린 점, 그것을 통해 전국을 군현 단위로 연결시켜 볼 수 있도록 지도를 만든 점 등은 지도 제작의 측면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지도는 일정한 크기의 방안에 전국 각 군현을 그렸기 때문에 축척이 동일하여 각 지역의 크기와 거리 등을 일목요연하게 비교할 수 있으며, 지도 제작의 기본 요소인 축척을 방안(方眼)으로 표시한 점 등으로 볼 때 조선의 지도 발달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문경>지도에는 각 면의 이름과 산줄기, 창고, 봉수, 견훤산성, 조령성, 고개 등이 간략하게 그려져 있다.
 『영남지도』중 <문경현>지도는 1리 방안 위에 그린 경위선 표식 지도이다. 이 지도는 이른바 ‘비변사지도(備邊司地圖)’ 로 알려져 있는 도별 군현지도집 중의 경상도 지도집이다. 이들 지도는 1리 방안을 그리고 그 위에 지도를 그렸는데, 방안의 크기는 7.0~8.5㎜ 내외이다. 따라서 방안의 크기로 축척을 나타냈으니, 약 1:53,000~1:64,000의 대축척 지도이다. 6첩 71매의 지도로 구성된『영남지도』에 포함된 개별 군현지도는 세로 108㎝, 가로 82~89㎝ 내외로 도폭의 크기가 일정하다. 그러나 그려진 지도의 크기는 세로 15㎝, 가로 23.3㎝의 소형지도(鎭海地圖)부터 세로 82.8㎝, 가로 82.8㎝(진주지도)까지 모두 상이하다. 1747년(영조 23)~1750년(영조 26)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지도들은 비변사에서 제작하여 소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현대의 기본도가 1:50,000 지도임을 생각해 볼 때 비변사 지도는 축척이 매우 크고 내용이 자세한 대축척 지도인 셈이다.
  <문경현>지도에는 조령관, 중성, 하성의 문루를 정확하게 묘사하였으며, 중성과 조령관 사이에 조령산성· 동오원(桐梧院)이, 하성과 중성 사이에 서쪽으로 교귀정(交龜亭)·산창(山倉)·별장소(別將所)·용화산(龍華山)이, 동쪽으로 혜국사(惠國寺)·안적암(安寂庵)·은선암(隱仙庵)·보제사(普濟寺)·어류전구지(御留殿舊址) 등이 그려져 있다. 특히 대·중·소로를 구분하는데, 조령을 넘어와 문경 읍치와 호남면을 거쳐 상주로 이어지는 길, 그리고 유곡역(幽谷驛),갈현(葛峴)을 거쳐 함창으로 연결되는 남쪽 길은 대로인 적색 선으로 표시되었다. 반면에 동쪽으로 향해 상주로 통하는 길과 서남쪽으로 가남면을 거쳐 상주로 연결되는 길은 중면으로 표시되어 있다. 대부분 문경 읍치에서 각 면으로 이어지는 길은 중로인 황색 선으로 나타나 있다. 또한 충청도의 연풍 이화치(伊火峙),괴산 모항현(牟項峴)으로 연결되는 길도 중로로 표시되었다. 동북쪽의 대완영애(大完嶺애), 예천 경계의 호항영애(狐項嶺애)와 마전영애(馬轉嶺애)로 이어지는 길도 중로로 나타나 있다. 각 면에서 외곽으로 뻗어나가는 길과 읍치에서 향교로 향하는 길은 소로로서 청색으로 채색되어 있다. 또한 봉수로(烽燧路)도 표시되어 있는데, 동남쪽의 선암봉대(禪巖烽臺)에서 조령 동쪽의 탄항봉대(炭項烽臺)로 이어지는 봉수로는 적황색의 가는 직선으로 그어져 있다.
  또한 고모성(姑母城)과 고부성(姑夫城)으로 연결되는 길도 소로로 표시되었는데, 조령에서 내려온 길은 고모성의 동쪽을 돌아 용연(龍淵) 동남쪽에서 하천을 건너 상주와 함창으로 가는 길이 나뉜다. 고모성의 동남쪽 강의 북쪽 가파른 산지 허리를 깎아 만든 좁은 길에 ‘토잔(兎棧)’이라고 기록되고 황색 선으로 채색되어 이 길이 중로였음을 알 수 있다.
  『영남지도』중 <문경현>지도는 경상도 71개 군현의 지도를 모은 군현지도책 중에 포함된 문경지도이다. 지도의 제작 시기는 영조대로 추정된다. 지도의 표현 양식과 내용 등이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의『영남지도』와 유사하다. 규장각 소장의『영남지도』는 1리 방안 위에 그린 대축척 군현지도로 휴대와 열람에 다소 불편이 따른다. 이 지도는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크기가 작은 책자의 형태로 만든 것이다. 따라서 원도는 군현의 면적에 따라 도폭의 크기가 다르지만, 본 지도는 모든 군현의 지도의 크기가 동일하여 면적의 차이를 파악하기 어렵다. 지도의 뒷면에는 서울에서의 거리·사방경계·군현 내 각 지역의 거리 등이 기재되어 있는데, 규장각 소장의『영남지도』에 주기된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산천의 표현을 보면, 산을 연속적인 맥으로 그리지 않고 독립적으로 개개의 산을 그려 넣었고 하천과 바다는 청색으로 채색하였다. 문경의 중심지인 읍치(邑治)와 주변의 면(面)을 황색 사각형 내부에 기입하였는데 읍치는 내부의 공간 구조를 그리지 않고 단순히 글자로만 표기하였다. 이는 지도상의 전지역에 동일한 축척이 적용되기 때문에 읍의 중심지와 그 안에 배치된 시설만을 확대하여 그릴 수 없는 데에서 기인한다. 각 지역을 연결하는 도로가 일반 지도에 비해 매우 자세한 편으로, 이는 도로를 중시했던 영조대의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다. 도로의 크기에 따라 색채를 달리하였는데 대로(大路)는 홍선, 중로(中路)는 황선, 소로(小路)는 지도처럼 곡선이 아닌 계단식의 직선으로 표현하였다. 이는 원도에서 방안 격자를 따라 도로를 표시했던 데에서 연유한다. 또한 봉수가 연결되는 망(網)을 직선의 연한 적황색 선으로 표시하였다. 이밖에 표현된 내용으로는 역원(驛院)·진보(鎭堡)·창고(倉庫)·봉산(封山)·사찰(寺刹)·서원(書院) 등이 청색 지붕의 건물로 표현되어 군현지도책으로는 비교적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
 『해동지도』에는 군현지도 외에 특별히 군사지도로 <조령성>과 <조령전도>지도가 포함되어 있다. <조령성> 지도는 조령의 산세와 조령성 내부의 각종 시설, 도로 등을 일목요연하게 그려놓은 지도이다. 조령산성은 임진왜란 후 1708년(숙종 34)에 쌓았는데, 남북이 8리이며 둘레가 1만8천59보이다. 성이 세 곳에 있는데, 첫째는 상성(上城)으로 28리의 길이에 조령관(鳥嶺關)이 설치되었다. 둘째는 21리의 중성(中城)으로 관문은 주서관(主西關)이 설치이었다. 셋째는 하성(下城)으로 13리로 가장 짧았으며, 동성문(東城門)이 설치되어 있었다. 또한 문루가 없는 북암문(北暗門), 동암문(東暗門) 등 암문(暗門)도 보인다. 동성문을 지나 주서관으로 향하는 곳에 초곡주막(草谷酒幕)이 있어 조령을 이용하는 길손들을 위한 마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도 여백의 설명문에서 보이는 것처럼 성 주변의 주흘산(主屹山), 희양산(曦陽山), 장산(獐山) 등에는 제단이 있어서 해마다 봄가을로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조령성 내에 위치한 보제사·혜국사·용화사·은선암·안정암 등 사찰의 위치와 승려 수를 기록하였는데, 혜국사가 22명으로 가장 큰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사찰의 승려들은 유사시에 조령성을 지키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동창(東倉)은 문경·함창·예천·용궁·상주 5읍의 군량미를 저장하는 창고이다. 지도에 보이는 교귀정(交龜亭)은 신구 관찰사가 만나 관인을 넘겨주는 곳으로, 성종 때 현감 신승명이 세웠는데, 김종직이 시를 지어 칭송하였다 한다.
 『해동지도』의 <조령전도>는 조령을 중심으로 동쪽으로 태백산, 서쪽으로 속리산, 남쪽으로 황령산, 북쪽으로 충주까지 광범위한 지역을 포괄하는 지도로서, 공중에서 내려다본 형태로 그려 산지들이 마치 누워 있는 것처럼 보인다. 조령과 주위의 산과 고개를 자세히 그리고, 관문을 만들어야 할 곳과 적을 끊고 막을 만한 곳, 성을 쌓아야 할 곳 등 주요 요충지를 상세히 기록해 놓은 군사지도이다. 유사시 외적을 막기 위하여 꼭 필요한 방어시설인 조령 부근의 산성, 사찰, 창고도 자세히 표시하였다. 도로를 붉은색 실선으로 나타냈는데, 거의 대부분의 산과 계곡을 따라 길이 있어 연결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조령에 위치한 동문,초곡성,중성,동화원의 위치를 붉은색 건물 모양으로 그려서 강조하고 있다. 설명문에는 조령의 위치, 사방의 경계, 각 군현까지 거리, 창고까지 거리를 자세히 적어 놓았다.
  군현지도는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첫째는 위에서 언급한 군현지도집 중에 포함되어 있는 지도들이다. 지도책이나 지도첩의 형태 속에 경상도 전체 군현이 함께 수록되어 있으므로 지역간의 비교나 경상도 전체를 이해하는 데에 매우 편리하다. 그러나 지도책은 크기에 제한이 있기 때문에 상세하지 않을 경우가 많다. 반면에 두 번째 유형의 군현지도인 단독 군현지도는 대형으로 제작한 경우가 많다. 크기가 크기 때문에 상세한 지도가 많으며,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
  이들 군현지도 중 가장 상세한 것은 19세기 후반 고종대에 편찬된 지도들이다. 단독으로 독립되어 있는 단독지도로서 1872년(고종 8)에 제작된 경상도 각 군현의 지도가 남아 있어 조선 후기의 지역 모습을 훌륭하게 전해주고 있다. 이들은 채색필사본 지도로서 1866년의 병인양요, 1871년의 신미양요를 겪은 후 중앙에서 각 지방에 읍지와 지도 편찬령이 내려졌으며, 그 결과물로서 각 읍에서 지도를 제작하여 상송한 것으로 보인다. 이 지도들은 크기가 매우 큰 대축척 지도임은 물론 채색이 명료하며, 그 내용도 매우 풍부하고 상세하다. 동시기에 제작되었지만 각 군현에서 작성하여 올렸기 때문에 지역마다 표현방식이나 강조된 내용들이 서로 달라서 개성 있는 지도들로 남아 있다.
 『경상도지도』(규 10512)는 군현지도 61매, 영진(營鎭)·산성(山城)·목장 지도 37매 등 총 100매의 낱장 지도로 구성되어 있다.
  「경상도지도」는 다른 도 지도에 비해 정교함이나 통일성이 부족하지만, 당시 지역민들이 이해하고 표현하였던 지역의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또 다른 의의를 지니고 있다. 이들 지도에는 산과 하천 등 지형,교량,면리,장시,서원,향교,관아 등이 세밀하게 표시되어 있어 지명의 고증과 복원은 물론 옛 지역문화를 이해하는 데 좋은 자료를 제공한다. 그러나 경상도 지역의 지도들은 타도에 비하여 상세한 편은 아니나, 문경의 경우 남아 있는 지도 중 가장 자세하다.
  『문경지도』는 1871년에 편찬된『영남읍지』에 수록된 문경읍지의 지도와 내용과 형태가 유사하다. 조령의 세 성과 유곡역을 지나는 영남대로는 굵은 적색 선으로 강조하여 대로임을 표시하고, 다른 길들은 가는 선으로 그려 선의 굵기로 도로의 크기를 나타냈다. 산지를 산봉우리의 연속 형태로 독특하게 나타냈는데, 산이 많은 고장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면 아래의 행정 단위인 리(里)의 이름까지 나타낸 유일한 지도로서, 19세기 후반 촌락들의 위치를 파악하게 해준다. 농암·가은·갈벌에는 장시가, 북쪽의 대미산 밑에는 궁중에서 필요한 황장목을 생산하던 황장봉산(黃腸封山)이 표시되었다. 사창(社倉)·제언도 자세히 기록하였으며, 남쪽의 용소 부근에 고모성과 고부성, 토잔(兎棧)이 그려져 있다. 대원령,조령,이화령 외에 어현(於峴),유현(楡峴),대현(大峴) 등의 고개 이름도 보인다.
  1872년 전국지도 제작의 일환으로 제작된『조령진산도』가 포함되어 있다.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조령의 군사적 중요성을 재확인한 조정은 이곳을 정비하였다. 제1관문인 주흘관은 1708년에 축조되고, 영조 때에 조령진(鳥嶺鎭)이 설치되어 문경현감이 수성장(守城將)을 겸하였다. 제목이 보여 주듯이 족보나 묘도에 사용되던 풍수적 산도(山圖) 양식으로 그려 손가락 모양으로 산지가 표현되어 있으므로 매우 독특한 느낌을 준다. 길을 적색실선으로, 하천은 흑색 점선으로 표시하였으며, 조령성과 수문(水門)을 정교하게 표현하였다.

4. 읍지에 보이는 문경과 문경의 옛길

  16세기 중엽 이후 각 지방에서는 군현 단위의 지리지, 즉 읍지의 편찬이 매우 활발하여 조선 후기에는 각 군현마다 여러 종의 읍지가 만들어졌다. 읍지 편찬 초기에는 각 지역의 유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편찬한 사찬 읍지(私撰邑誌)가 중심이 되었으나, 17세기 후반 이후에는 국가에서 읍지를 주목하고 수시로 읍지 편찬령을 내려 관찬 읍지(官撰邑誌)가 더욱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특히 도 단위로 수합한 도지나 전국의 읍지를 수합한 전국읍지들은 중앙 정부가 주체가 된 관찬 읍지였다. 문경 지도가 포함된 전국읍지와 도지는 다음과 같다.
 『여지도서(輿地圖書)』중「문경현」,1760년경,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중「문경현읍지」,1832년,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영남읍지(嶺南邑誌)』중「문경읍지」,1871년,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17세기 후반~18세기 초 숙종대에는 여러 번 지리지 편찬 의논이 제기되었으나 수차례에 걸친 환국 등 복잡한 정치 상황 때문에 완성되지 못하였다. 이때 완수하지 못한 지리지 편찬 사업은 18세기 중엽 영조대에 실현되었다. 영조대에는 여지승람의 증보에서 한 걸음 나아가 새로 국가에서 각 읍의 읍지를 종합하고 여러 차례 개수하였으니, 이 책이『여지도서』55책이다.『여지도서』의「호구」등 항목에는 문경분 ‘기묘장적(己卯帳籍)’을 기준으로 하고 있어 1759년 이후, 즉 1760년을 전후한 시기에 편찬된 읍지들을 모았음을 보여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비하여『여지도서』의 내용체계는 사회·경제·행정적인 내용이 매우 강화된 것이었다. 채색 지도가 각 군현 읍지의 앞에 반드시 수록되고, 방리,도로,제언,교량,전결(旱田,水田),부세(進貢,田稅,大同,均稅),군병 등의 항목이 새로 설정되어 지역의 사회·경제적인 내용이 매우 풍부하게 수록되었다. 이러한 체제는 16세기 후반 이래 활성화되었던 새로운 읍지 편찬의 경향을 정리하고 종합한 것으로서 18세기 읍지의 종합적 성격을 대표하고 있다. 군현의 역사와 행정제도의 변화에 관한 내용인「건치연혁」이 일반적으로 읍지의 첫머리에 기록되었으나,『여지도서』에는「방리」조를 첫머리에 두고 면리(面里)별로 명칭,위치,호수,남녀 인구수를 기록하여 군현의 하부 행정 단위와 지역 규모를 매우 자세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는 국가 행정력의 강화와 함께 리(里)가 국가 행정의 하부 단위로 파악될 필요성이 있을 정로로 촌락의 성장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라할 수 있다.
 「도로」조 역시「건치연혁」조보다 앞에 위치하였을 뿐 아니라 이 시기에 신설된 항목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도로의 크기에 따라 대로·중로·소로로 구분하여 군현 내의 도로망과 인접 지역과의 거리, 경계 표지물을 자세히 기록하여, 도로가 매우 중시되고 있던 당시의 사회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이는 당시 상업의 발달과 더불어 도로의 중요성이 커지고, 지역간의 교류가 증대되면서 지역간 및 지역 내의 구체적인 유통망을 파악할 필요가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또 하나의 큰 변화는 각 군현읍지의 첫머리에 채색 지도가 안내지도 역할을 하도록 첨부된 점이다. 문경읍지의 지도에는 산천,도로,면 등이 비교적 자세하게 그려져 있는데, 각 면의 호칭을 방(坊)으로 표기하여 당시 문경에서는 면 대신 방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음을 보여준다.
 『경상도읍지』는 1832년경에 편찬된 지리지로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경상도 지역의 도지(道誌)이다.『경상도읍지』중 문경읍지에 수록된 지도는 산지가 매우 크게 그려져 있는 점이 특징이다. 회화식으로 그렸으며, 특히 읍치,고모성,조령성의 관문 등 특정 내용이 강조되어 있다. 문경의 길로는 조령에서 함창으로 이어지는 영남대로와 읍치에서 소야교(所耶橋)를 건너 토잔(兎棧)을 지나는 길, 요성역과 대미산 아래를 지나 예천으로 향하는 길들이 나타나 있다.

문경지역의 백두대간 고갯길

   김하돈(시인, 백두대간보전 시민연대 집행위원장)

일제의 침략과 더불어 이 땅에서 자취를 감추었던 백두대간의 존재가 다시 인구에 회자되면서 학술계에는 커다란 파장이 일어났다. 백두대간이 일깨워준 변화 가운데 하나가 ‘고개’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다.

  1. 글을 시작하며

  백두대간이란 말이 우리 귓전에 그리 낯설지 않게 된 것은 이제 겨우 한 대여섯 해쯤이나 된 일이다. 그나마 딱히 접촉의 기회를 얻지 못한 보통 사람들의 열 가운데 아홉은 어떤 맥주회사의 홍보문구에서 비로소 처음 그 이름을 접하게 된 경우도 허다하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간도 해도, 일부 산악인들을 중심으로 그 불경스런(?)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은밀히 번져가기 시작한 것이 기껏해야 1980년대 중반이다.
  산악인들을 중심으로 남한 지역의 백두대간과 정맥을 종주하는 현상은 1990년대에 이르러 거의 열광적으로 확산되었다. 일제의 침략과 더불어 점차 이 땅에서 자취를 감추었던 백두 대간의 존재가 등산을 방편으로 삼아 마침내 부활의 교두보를 마련한 셈이다. 그리하여 다시 인구에 회자되기 시작한 백두대간은 산맥이라는 허구에 세뇌당한 이 땅의 학술계는 물론 일반의 일상생활에까지 실로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백두대간이 일깨워준 변화 가운데 중요하게 꼽을 수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고개’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다. 가령, 문경새재가 그동안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고개로 대접받았던 까닭을 백두대간은 아주 간결하고 명징한 한마디로 정리한다. 조선시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길1)<통행량이 가장 많은 길>이 넘어가는 단 하나뿐인 백두 대간의 고개’ 가 그 정답이다. 오늘날로 바꾸자면,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길인 경부고속도로가 넘어가는 백두대간의 고개 추풍령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고개가 되는 것도 마찬가지 원리이다.
  예로부터 문경에는 충주와 더불어 인후지지(咽喉之地)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인후지지는 말 그대로 목구멍, 즉 들머리(입구)라는 뜻이다. 한강 유역으로 들어가자면 충주가 인후지지요, 낙동강 유역으로 들어가자면 문경이 인후지지다. 그 나눔의 원천은 말할 것도 없이 백두대간이다. 백두대간이 그 양쪽의 세상을 둘로 나누고 있기 때문이다. 부산에서 서울로 쳐들어오는 왜적을 방어하는 데 문경새재가 가장 중요했던 까닭을, 기왕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산맥의 논리는 다만 문경새재가 높고 험한 탓이라 가르쳤다. 그러나 험하기로야 문경새재 못지 않은 곳이 얼마든지 있었다. 이 문제의 해법을 백두대간에서 찾아보면 의외로 아주 간단하다. 문경새재 고갯마루의 물이 양쪽으로 나뉘어 각각 서울과 부산으로 흘러 내려가는 일이 증명하듯, 서울과 부산에서 보자면 문경새재가 가장 높은 정점, 즉 분수령이었기 때문이다. 물은 딱히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만 흘러가므로.
  문경지역의 백두대간 고갯길들은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경기도와 충청도, 즉 기호지방과 백두대간 동쪽 지역인 경상도를 서로 연결하는 고개들이다. 또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낙동강 유역과 한강 유역을 서로 연결하는 고개들이다. 따라서 경상도 지역을 근거지로 삼았던 신라에 의해 일찍부터 백두 대간을 넘어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는 고갯길이 개척된 곳이기도 하며, 조선시대에는 전술한 바와 같이 나라에서 가장 큰 고갯길이 넘어가는 곳이었다. 도로 개척 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오늘날에는 전 국토에서 백두대간의 동서를 잇는 고갯길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 바, 문경 지역 백두대간 역시 고갯길의 개척과 확장이 날로 증가하고 있다.

2. 백두대간 고갯길의 분류

  문경지역 백두대간의 고갯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나라 백두대간 고갯길의 개괄적인 특성을 살펴보는 게 순서이겠다. 우리나라의 백두대간 고갯길은 그 특성상 크게 네 종류로 나뉜다. 첫 번째는 관서지방과 관북지방을 연결하는 북한 지역의 고개이고, 두 번째는 영서지방과 영동지방을 연결하는 강원도 지역의 고개이며, 세 번째는 기호지방과 영남지방을 연결하는 고개, 마지막으로 호남지방과 영남지방을 연결하는 고개 등이다.
  관서와 관북의 기준점인 철령 이북에 걸린 북한 지역의 고개들 가운데 압록강 유역과 동한만(東漢灣)을 연결하는 것으로는 황초령이나 부전령이 그 대표적인 고개이며, 대동강 유역과 동한만을 연결하는 고개로는 검산령과 거차령 등이 있다. 그리고 임진강 유역에서 동한만으로 넘어가는 고개로는 마식령과 추가령이 유명하다.
  영서 지역과 영동 지역을 연결하는 강원도 지역 고개들의 중심은 오로지 대관령이다. 대관령을 기준으로 영서와 영동의 경계가 설정됨은 물론, 관동이란 명칭도 그로부터 유래되었다. 이 권역의 고개들을 한 발 더 세분하자면 북한강 유역에서 영동 지역으로 넘어가는 고개와 남한강 유역에서 영동 지역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나눌 수 있다. 오대산을 경계로 한계령·진부령 같은 고개들이 전자에 속하고, 대관령·백복령 같은 고개들이 후자에 속한다.
  영남지방과 기호지방을 연결하는 고개들은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문경 지역의 고개를 비롯하여 경북 북부 지역에서 강원도로 넘어가는 고개 내지는 경북 서북부 지역에서 충북으로 넘어가는 고개들이 두루 포함된다. 유역으로 정리하자면 낙동강 유역에서 한강 유역으로 넘어가는 고개와 낙동강 유역에서 금강 유역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나뉘는데, 죽령과 문경 지역의 고개들이 전자에 속하고, 추풍령과 화령 같은 고개들이 후자에 속한다.
  호남지방과 영남지방을 연결하는 고개는 민주지산의 삼도봉을 기점으로 지리산에 이르는 백두대간에 걸린 고개들을 가리킨다. 이 권역의 고개들은 세분하여 금강 유역과 낙동강 유역을 연결하는 고개와 섬진강 유역과 낙동강 유역을 연결하는 고개로 나뉜다. 전자는 육십령이 그 대표적인 고개이고, 후자는 여원재가 그 대표적인 고개이다.

3. 문경지역의 백두대간 고갯길

  문경 지역의 백두대간에는 현재 대략 15곳 정도의 고갯길이 열려 있는데, 4곳이 포장도로이고 나머지 11곳은 비포장도로이거나 오솔길이다. 그 가운데에는 이화령처럼 터널이 뚫려 고갯길과 터널의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는 곳이 있는가 하면, 은티·지름티재·미전치처럼 희양산 봉암사의 산문 폐쇄로 말미암아 그 반쪽을 사용하지 못하는 고개도 있다.
  4곳의 포장도로 가운데 이화령은 국도이고 나머지 3곳은 지방도로이다. 비포장도로 가운데 차량 통행이 가능한 곳은 월악산 국립공원 지역을 통과하는 하늘재와 문경새재 도립공원의 일부인 새재의 경우인데 물론 공원 지역이므로 차량 통행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 나머지 9곳의 고개는 모두 등산로나 약초꾼들의 통행으로 겨우 그 명맥이 유지되고 있는 오솔길이다. 그나마 앞서 언급한 희양산의 고개들처럼 아예 그 반쪽을 사용하지 못한다거나, 고모치와 같이 그 일부가 이미 쓰임새를 잃고 풀숲에 묻혀 버린 경우처럼 한강 유역과 낙동강 유역을 연결하는 백두대간 고갯길의 역할을 거의 상실한 곳도 있다.

  1) 갓바위재와 고모치

  갓바위재는 백두대간의 청화산과 조항산 사이에, 고모치는 조항산과 대야산 사이에 걸려 있는 고개이다. 이 두 고갯길은 높게 가로막힌 백두대간을 사이에 두고 문경시 농암면 궁기리에서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를 오가던 고개들이다. 충북 지역인 삼송리 역시 본래는 경북 문경군 가은면에 속했던 마을이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문경군 농암면이 되었다가 1962년 민원에 의하여 충북 괴산군 청천면으로 편입되었다. 삼송리에서 농암면 소재지까지 험준한 백두대간을 넘어 오가는 일이 사실상 불가능 하였기 때문이다.
  갓바위재와 고모치는 삼송리가 충북으로 편입되기 이전까지 궁기리를 경유해서 농암면으로 이어지던 통행로이다. 이 무렵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던 통행로는 고모치였으나 지금은 오히려 전혀 그 쓰임새를 잃어 풀숲에 묻혔고, 갓바위재는 등산로로 바뀌어 그나마 옛길의 형태를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다.
  필자가 몇 년 전 이곳을 답사했을 때에는 궁기리 고모치 광산에서 고모치 정상을 향하여 임도를 닦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 임도 역시 도중에 중단되어 풀숲에 묻힌 채 끊어져 있다. 당시 필자는 고모치 서낭당에 있던 오래된 서낭나무를 공사하던 인부들이 베어냈다는 얘기를 궁기리의 한 노인으로부터 들은 바 있었다.
  궁기리는 견훤의 출생지로 알려진 마을이다. 마을 이름 또한 그로부터 유래되었으며 지금도 그 궁터로 구전되는 유지가 남아있다. 궁기1리에서 백두대간을 오르면 갓바위재이고, 궁기2리에서 백두 대간을 오르면 고모치이다. 갓바위재는 조항산의 한 봉우리 이름에서 따온 것이며, 고모치는 본래 곰치와 어원이 같은 이름인데 필자가 몇 년 전에 궁기리 마을에서 채록한 전설 가운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
  옛날 궁기리에 살던 고모가 삼송리에 사는 조카한테 갔다가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갔다. 때는 겨울이었는데 마침 폭설이 내렸다. 고모가 떠나고 폭설이 내리자 조카는 아무래도 밤길에 재를 넘어간 고모가 걱정이 되어 고갯길을 뒤따라 올라갔다. 아니나 다를까, 고모는 고갯마루 서낭당 근처에서 탈진하여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조카는 고모를 부축하여 하산을 시도하였으나, 엄청난 폭설에 그만 길을 잃고 둘 다 얼어죽었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이 고모치 전설은, ‘고모’라는 소릿값에 근거하여 고모치를 넘어 다니던 궁기리나 삼송리 사람들이 심심풀이로 지어낸 이야기일 것이다. 고갯길이란 본래가 넘기 힘든 험로이기 때문에 서로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입심으로 넘기 마련이다. 따라서 고갯길에는 그 이름이나 길의 생김으로 말미암아 생겨나고 전승되는 전설이 아주 흔하다.
  고모치의 어원을 따지자면 비슷한 이름으로 고치, 고치령, 고모령, 곰치, 고무치, 고미재 등이 있다. 이 가운데 고치나 고치령은 높고 험하다는 뜻으로 쓰이는 고치(高峙)의 개념으로 분류할 수 있으며, 고모령, 곰치, 고무치, 고미재 등은 ‘곰 고개’ 또는 ‘곰의 고개’라는 개념으로 분류되어 때로 웅치(熊峙)로 변천하기도 하는 이름이다.
  고모치에는 비교적 원형을 잘 간직한 전형적인 고갯마루 서낭당이 그대로 남아 있다. 대략 어른이 서면 어깨 이상이 묻히는 폭 2~3m 안팎의 V자형 좁은 고갯길이 S자 형태로 고갯마루에 이르고, 그 고갯마루의 정상에 바투 길과 연이어 반월형의 돌담불을 쌓았다. 돌담불의 직경은 2m 내외이고 높이는 2.0~2.5m 정도이다. 경사면에 비껴 중심축을 이루는 서낭나무는 그리 수령이 오래되어 보이지는 않는다.
  서낭당에 이르는 고모치 고갯길 역시 지금은 거의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옛 고갯길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지금은 극히 부분적으로 남아 있는 대관령 옛길이나 고치령, 죽령의 옛길보다도 훨씬 더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아마도 고모치 광산의 임도가 완성되었다면 이 소중한 고모치 서낭당과 옛길의 흔적은 말끔히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고모치 서낭당은 이 고갯길을 주로 이용하던 삼송리 마을 사람들이 관리했고, 궁기리에서 관리하던 서낭당은 고모치 광산 아래 있었는데 그 서낭당은 얼마 전에 이미 사라졌다. 고모치 서낭당 역시 고모치 고갯길이 쓰임새를 잃으면서 오랫동안 돌보는 이 없이 방치되어 있었는데 그런 점이 오히려 서낭당의 원형을 보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밀재, 블란치재, 버리미기재

  고모치에서 백두대간을 따라 대야산 양쪽으로 각각 걸려 있는 고개로 밀재와 블란치재, 그리고 버리미기재가 있다.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에서 용추계곡을 통하여 오르는 등산로와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 농바위에서 오르는 등산로가 만나는 곳이 밀재이다. 밀재는 대야산 등산로가 개척되기 이전부터 삼송리와 완장리를 이어주던 고개였는데 지금 그 고개를 이용하는 주민은 거의 없으며 오로지 대야산 등산로로만 쓰이고 있다. 밀재는 버리미기재와 그 어원이 같은 이름이므로 아래에서 다시 언급할 것이다.
  블란치재는 ‘불이 났던 고개’라는 뜻이다. 이 고개는 본래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와 청천면 관평리를 이어주던 옛길로, 그 규모는 충북 청천면과 경북 상주시 화북면을 연결하는 늘재와 비슷할 정도로 통행량이 제법 많았던 고개이다. 상주에서 늘재를 넘어 청천과 괴산으로 이어지는 길이 남북 방향이라면, 문경 가은에서 블란치재를 넘어 청천과 청주로 이어지는 길은 동서 방향이다. 그러나 교통이 발달하면서 늘재가 992번 지방도로로 포장되어 여전히 쓰임새를 갖춘 반면, 블란치재는 버리미기재에 913번 포장도로를 넘겨주고 지금은 쓰지 않는 옛길이 되었다. 블란치재는 촛대봉과 곰넘이봉 사이에 지금도 뚜렷한 옛길의 흔적이 남아 있으나 통행은 거의 없다.
  버리미기재는 블란치재의 역할을 넘겨받아 새로 닦은 2차선 포장도로이다. 그 이름은 ‘벌의 목 고개’라는 뜻으로 밀치, 밀재, 밀목치, 밀목재, 밀항 등과 같은 말이다. 일반적으로 고갯길의 경우에는 벌, 노루, 소, 돼지, 닭 같은 짐승의 목 부분에 빗대어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많고, 소나 말의 등에 얹은 안장을 일컫는 질마(길마)와 생김이 비슷하다 하여 ‘질마재’로 부르는 경우도 흔하다. 질마재는 고갯마루의 생김을 일컫는 학술용어인 안부(鞍部)라는 말의 어원이기도 하다. 충북 괴산군 청안면의 질마재는 한남금북정맥의 고개이고, 미당 서정주의 시집『질마재 신화』로 유명한 고개(마을의 의미가 더 가깝지만)는 전라북도 고창에 있다.
  블란치재와 버리미기재는 사람이 걷던 시대에서 문명의 시대로 넘어가는 고갯길의 변천과정을 보여주는 곳이다.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변천과정을 거시적으로 가장 극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곳은 문경새재 일원이다. 뒤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백두대간 가운데 가장 중요한 동서 교통로 역할을 담당했던 문경새재 일원은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는 계립령, 조선시대에는 새재, 일제시대 이후는 이화령으로 고갯길이 바뀌었다. 마을과 마을 단위의 작은 고개에서도 도로교통의 발달에 따라 이러한 변천과정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옛 고갯길은 풀숲에 묻혀 점점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옛 모습을 잃지 않은 경우도 더러 있다. 반면, 예로부터 지금까지 줄곧 한 곳을 사용해 온 고갯길(예를 들면 죽령)은 대부분 옛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3) 은티재, 지름티재, 미전치

  이 세 고개는 모두 백두 대간의 희양산을 중심으로 양편에 걸려 있는 고개들이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봉암사의 산문 폐쇄로 인하여 충북 지역에서 가은으로 넘어오는 고갯길은 이미 그 통행이 끊어진 지 오래되었다. 다만 지금은 괴산 방면에서 올라오는 희양산 등산로로 쓰이고 있는 실정이며, 정월에 연풍면 은티 마을에서 각각 고갯마루 서낭당에 동제를 지내는 목적으로 관리되고 있다.
  은티는 본래 충북 괴산군 연풍면 주진리(周榛里)의 한 마을 이름이다. 마을에서는 백두대간의 고개인 은티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그렇게 부른다고 하는데 어는 이름이 먼저인지는 물론 확인할 길이 없다. 대부분의 옛 지도에 은티 고개는 주현(周峴)으로 나오는데, 옛날에는 은티 마을을 주티동 또는 주치동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실제로 주진리는 주치동(周峙洞)과 진촌(榛村,‘갬골’로 개암나무골의 준말이다)에서 각각 한 글자씩 따온 이름이다.
  은티는 주진리 은티 마을에서 백두대간을 넘어 문경시 가은읍 오봉정 마을로 가는 고개이다. 따라서 한때 오봉정 고개로 부르기도 하였는데, 오봉정 마을이 폐촌이 된 뒤 오늘날에는 은티로 부르고 있다. 은티 고갯길이 비교적 잘 보전되는 까닭은 물론 앞에서 지적한 희양산 등산로와 은티 마을의 동재 덕분이다. 인근 마을에서 채록할 수 있는 이야기로, 한국전쟁 당시 이화령에 막힌 인민군이 은티를 넘어 남하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데, 이는 이 일대에 산재한 산성 같은 관방시설과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은티에서 백두대간을 따라 구왕봉을 지나면 지름티재가 나오는데, 이곳에도 은티 마을에서 제사하는 서낭당이 있다. 지름티재는 은티 마을에서 봉암사로 갈 때 질러가는 고개라는 뜻에서 생긴 이름인데, 전혀 의미가 다른 유치(油峙)로 변천되어 쓰이기도 한다. 이곳 역시 봉암사의 산문 폐쇄로 출입이 금지되어 있지만 희양산 정상으로 오르는 등산로로 많이 쓰이는 탓에 반쪽 길은 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은티 서낭당과 지름티재 서낭당은 고모치 서낭당처럼 서낭나무에 기대어 돌담불을 쌓은 형태가 아니라 서낭나무를 정점에 두고 둥그렇게 돌담을 쌓아 제단을 마련하는 독특한 형태를 띠고 있다. 돌담의 높이는 30~50㎝ 정도이고 지름의 길이는 3m 안팎인데 지름티재 서낭당이 약간 더 크다. 서낭나무는 은티 서낭당이 비교적 수령이 오래되었다. 은티 마을에서는 주변의 다른 세 곳과 더불어 해마다 정월에 이 두 곳의 서낭당에 제사를 지낸다.
  미전치(薇田峙) 는 현재 사다리재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고개인데, 사다리재는 그 출처나 연원이 불분명한 이름이다. 본래는 괴산군 연풍면 분지리(분적골)에서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한밤미 마을로 가던 ‘고사리밭등’이 그 고개의 옳은 이름이다. 고사리밭등은 분적골 사람들이 고사리가 많은 곳이라 하여 부르던 이름으로 미전치라 하였다. 이 고개 역시 이만봉 등산로로 반쪽만 쓰이고 있으며 가은 쪽의 옛길은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자연림으로 복원되었다.
  고사리밭등에서 백화산 정상에 닿기 전에 평전치(平田峙)라는 곳이 있다. 마을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은 평밭등이다. 이곳 역시 분적골에서 마성면 상내리 쪽으로 넘어가던 옛 고개였으나 지금은 폐로가 되었고, 분적골에서 평밭등까지는 산판 임도가 개척되었다가 그 역시 거의 쓰임새를 잃고 방치되어 있다.

  4) 이화령

  이화령(梨花嶺)의 본명은 이유릿재다. 필자는 오래전부터 연풍과 문경의 노인들을 찾아다니며 ‘이유릿재’의 어원을 조사해 보았지만 그 정확한 연원을 확인할 길이 없었다. 다만 조선시대부터 문경지방에는 “새재로 갈까, 이유리로 갈까” 하는 노랫말이 있었다는 것과, 추론하건대, 길이 험하고 산짐승의 피해가 두려워 여럿이 함께 ‘어울려 넘는 고개’라는 뜻이 아닐까 하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이유릿재의 정확한 어원은 아마도 고어(古語)를 다루는 측면에서 새로운 학술적 접근이 필요할 듯싶다. 필자에겐 능력밖의 일이므로 여기서는 그 정도로 언급을 미룬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화령이 이화현(伊火峴)으로 나온다. 기타 조선시대 고지도 같은 문헌에도 모두 이화현으로 기록되다가 일제시대 때 신작로를 닦은 뒤에 일본식 지명으로 이화령이란 이름이 생겨났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문경 일대에서는 일제시대 이화령 신작로 부역에 참여했던 노인들을 쉽게 만날 수가 있었는데, 그들은 한결같이 고갯길에 더러 돌배나무가 꽃을 피웠지만 이화령으로 부를 만큼은 아니었다고 증언했다.
  이화령의 고갯길 변천과정을 살펴보면, 우선 조선시대에는 이화현이라 하여 통행량은 상대적으로 새재보다 훨씬 적었지만 문경에서 괴산 지역으로 통하거나, 새재의 우회로 역할을 하면서 조선시대 내내 나름대로 많은 쓰임새를 갖추었다.2)[이화령(이화현)의 개척 연대는, 조선시대 초기에 개척되는 새재보다 오히려 더 오래되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왜냐하면 계립령을 백두대간 동서의 주요 통행로로 삼았던 고려시대 역시 어떤 형태로든 문경에서 괴산 방면으로 통하는 현재의 이화령과 같은 목적의 통행로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아주 높기 때문이다.] 일제시대에는 도로가 개척되면서 골짜기의 옛길을 버리고 현재의 고갯길로 바뀌었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서북청년단이 주축이 된 88부대가 길을 새로 닦았다는 증언이 있으며, 이후 포장도로가 되면서 충북 충주와 경북 문경을 연결하는 3번 국도 가운데 가장 중요한 관문이 되었다. 현재는 국내 최초의 민자 터널이 개통되어 마침내 고갯길의 쓰임새가 다시 변화되었다.
  앞서 잠시 언급했지만 이화령은 계립령, 새재, 이화령으로 변천하는 문경새재 일원의 고갯길 변천사를 잘 보여주는 곳이다. 일제시대 이후, 거의 1세기 동안이나 경상도와 기화지방을 연결하는 가장 중요한 백두대간의 고개 가운데 하나였던 이화령은 이제 터널에 그 역할을 넘겨주고 옛길로 남게 되었다.

  5) 새  재

  새재는『세종실록지리지』,「문경현편」에 초점(草岾,초재)이라는 지명으로 등장한다. 이 책은, 현에서 서쪽으로 19리 떨어진 충주 통로에 있는데 험로가 7리에 이른다고 조령, 즉 새재를 적었다. 조령은 대략 조선시대 초기에 개척되어 조선왕조 5백 년 동안 나라의 가장 중요한 교통로이자 고갯길의 대명사로 군림하였다. 새재의 어원으로는 현재 여러 가지 설이 회자되고 있다. 가령, 새들도 넘기 어려운 험한 고개라거나, 억새가 많이 우거진 고개, 또는 서울로 통하는 제일 빠른 길이라는 뜻으로 새재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명칭의 유래에 대한 필자의 견해는 계립령, 즉 하늘재 길을 버리고 새로 닦은 고개이므로 새재라 하였을 가능성에 제일 비중을 두는 편이며, 혹은 계립령과 이유릿재 사이에 놓였으므로 새재라 불렀을 가능성도 아예 무시해 버릴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다.
  새재에 지금과 같은 관문이 설치된 것은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4년 10월 무렵이다. 충주의 수문장 신충원이 성을 쌓아 길을 막고 지나는 왜군을 기습하였는데 이것이 설관의 시작이라 하였다. 이 무렵은 선조 27년이니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미 새재를 넘어 충주에서 용장 신립(申砬) 장군을 죽인 지 2년이 지난 다음이다. 지금처럼 3곳의 관문이 모두 모습을 갖춘 것은 숙종 34년, 1708년의 일이다.
  조선시대 한강 유역에 도읍이 들어서면서 관방에 관한 사항은 정확하게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설치된다. 그 대표적인 곳이 철령관과 대관(령), 그리고 조령관이다. 한강 유역을 지키기 위해서는 한강 유역을 둘러싼 분수령, 즉 백두대간과 기타 정맥들의 고개가 관방의 요처라는 것은 당시의 지리 인식으로는 거의 상식에 가까운 문제였을 것이다. 그렇게 설치된 관방 시설을 근거로 관서나 관북, 관동, 영남 같은 명칭이 생겨났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유독 새재 남쪽인 영남지방에만 관남이라는 명칭이 붙지 않고 다만 영남으로 불렀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문경새재가 단지 현지의 고갯길에 국한된 고유명사가 아니라 조선의 고개를 대표하는 ‘제1고개’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렇듯 새재는 조선왕조 5백 년 동안 나라에서 가장 번화로운 고갯길이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그것은 나라에서 가장 큰 길이 넘어가는 단 하나뿐인 백두대간의 고개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충주나 상주, 안부역이나 유곡역은 늘 중앙에서 파견되는 관리나 사대부들의 행차로 몸살을 앓는 곳이었다. 그 번거로움을 짐작케 하는 기록으로, 조정에서 일본으로 가는 사신의 행렬을 접대하는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추풍령이나 죽령 길로 분산시켜 이동하게 하라는 행정 방침이 내려질 정도였다.
  새재가 누렸던 조선시대의 영화는 일제시대 이화령으로 신작로가 건설되면서 막을 내렸다. 그 후 내내 풀숲에 묻혀 있던 오솔길은 유신시대, 대통령의 방문을 계기로 하여 지금과 같은 형태의 도로작업이 황급히 이루어졌다고 촌로들은 증언하고 있다. 지금의 새재는 문경새재 도립공원이 되어 수많은 이들이 찾는 소문난 관광지가 되었으니, 한때 나라의 ‘제1고개’로서 누리던 옛 영화를 결국은 되찾은 셈이다.
  한편, 현재 새재 일원에는 조령산성의 유지가 남아 있다. 조령산성은 제1관문과 제2관문이 낙동강 유역에서 한강 유역으로 넘어오려는 남적(南賊)을 방어하는 형태로 축성되어 있으며, 백두 대간의 마루금에는 제3관문을 중심으로 한 성곽이 한강 유역에서 낙동강 유역으로 넘어오는 북적(北敵)을 방어하기 위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특히 조령산에서부터 부봉에 이르는 구간에는 백두대간의 마루금을 정확하게 천연의 성벽으로 이용하고 나머지는 군데군데 사람의 통행이 가능한 낮은 안부(鞍部)3)[성벽이 남아 있는 곳은 조령 제3관문 좌우이고, 마패봉과 부봉 사이에는 모두 두 곳에 문터와 석축이 남아 있다]에만 인위적으로 성벽을 쌓고 통문을 만들었다. 조령산성은 대체적으로 조령산에서 부봉에 이르는 구간이 서쪽과 북쪽이 되고, 백두 대간에서 갈라져 나온 주흘산이 동쪽, 그리고 제1관문으로 남쪽의 협곡을 막는 형상인데, 이런 형태는 아마도 병자호란을 겪고 난 후 남한산성과 비슷한 용도로서의 관방을 동시에 고민했던 흔적으로 짐작된다.

  6) 하늘재

  하늘재는 백두대간의 탄항산과 포암산 사이에 걸려 있으며 문경시 관음리와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를 연결하는 옛 고갯길이다. 경북쪽은 고갯마루까지 민가가 있으므로 아스팔트로 포장이 되어 있고, 충북 쪽은 월악산 국립공원 지역이므로 비포장 오솔길이 잘 보전되어 있다. 본래 삼국시대부터 문경새재가 개척되기전까지 백두대간 동서를 잇는 중요한 교통로로 쓰이던 고개였던데 오늘날에는 백두대간이 알려지면서 출처가 분명치 않은 하늘재란 이름으로 통용되고 있다.
  하늘재에 관한 옛 기록은『삼국사기』권2,「신라본기」로 거슬러 오른다. 이 기록에는 아달라이사금 3년 “여름 4월에 계립령 길을 열었다” 고 했다. 아달라왕 3년은 156년이니 죽령 길의 개척보다 2년이 앞선다. 같은 책 권41,「열전」의 <김유신조>에 나오는 이름은 마목현(麻木峴)이다. 고구려에 원병을 청하러 간 김춘추에게 보장왕이 말하기를, “마목현과 죽령은 본래 우리 땅이니 돌려주지 않으면 보내주지 않겠다”고 한 것이 그것이다. 또한 같은 책 권45,「열전」의 <온달조>에는 “계립령과 죽령 서쪽의 땅을 되찾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 는 온달의 출사표로 증장한다.
 『고려사』에는 대원령(大院嶺)이란 이름이 보인다. 고려 고종 42년(1255) 10월에 몽고 장수 차라대(車羅大)가 이끄는 “몽고군이 대원령을 넘자 충주에서 정예군을 보내 천여 명을 죽였다” 고 기록하였다.『세종실록지리지』에는 마골점(麻骨岾) 봉수만 등장하고,『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계립령을 사람들은 마골점이라 한다” 거나 “속칭 마골산이라 한다” 는 기록으로 정리하였다. 그리고 “관음원은 계립령 아래 있다” 는 기록도 보인다.
  오늘날의 이름으로 정리를 하자면, 미륵리 절터에서 문경 관음리로 넘는 고개를 하늘재, 수안보로 넘는 고개를 지릅재, 송계 골짜기로 남한강의 황강나루(충주댐)에 닿는 길을 닷돈재라 부른다. 고려시대 미륵리 절터에 대원(大院)이 생기면서 계립령 고갯길이 나누어진 것으로 가정한다면 이때 계립령 길도 대원령과 마골점으로 나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학술적 의미로 본다면 계립령은 현재 각각 나뉘어 부르는 세 개의 고개, 즉 하늘재, 지릅재, 닷돈재를 모두 합쳐 하나의 고개로 보는 게 타당하다.
  하늘재 길은 새재 개척 이후 그 쓰임새가 점차적으로 축소되었다. 일제시대까지만 해도 경북 북부 지역에서 생산되는 도자기와 곡물을 지고 하늘재와 닷돈재를 넘어가 제천시 한수면의 황강나루에서 소금과 교역했다는 옛 노인들의 증언이 지금도 문경읍 관음리 일대에서 채집되고 있다. 물론 당시까지만 해도 길은 단지 걸어서만 오갈 수 있는 작은 오솔길이었다. 특히 닷돈재의 경우에는 일부 구간이 깎아지른 벼랑으로 되어 있어 사람들이 고정으로 머물러 있다가 짐을 옮겨주는 대신 품삯으로 닷 돈을 받았다고 증언한다.
  현재는 월악산 국립공원에서 옛길 보전 사업의 일환으로 생태공원을 조성 중에 있어 새재와 마찬가지로 일반적인 차량 통행은 전면 중단된 상태이다. 삼국시대 이후 고려시대까지 나라의 가장 중요한 교통로였던 하늘재나, 조선시대 5백 년 동안 나라의 가장 큰 고개로 군림했던 문경새재가 이제는 모두 공원화되어 관광지로 변모하였다. 그 두 고개의 역할을 넘겨받은 이화령에는 터널이 뚫려 점점 통행량이 증가하는 일과 견주어 우리나라 백두대간 고갯길의 흥망성쇠를 더듬어볼 수 있는 아주 소중한 학습현장이다.

  7) 부리기재, 차갓재

  부리기재는 문경읍 중평리에서 대미산을 넘어 제천시 덕산면의 용하구곡을 연결하는 고개이다. 물론 이 고개 역시 양쪽 지역을 오가던 인근 주민들의 발길은 이미 끊긴 지 오래고, 지금은 용하구곡과 대미산을 경유하는 등산로로 쓰이거나 주민들의 약초채취에 이용되므로 양쪽 모두 매우 양호한 상태의 오솔길이 유지되고 있다. 차갓재는 문경시 동로면 생달리에서 황장산을 비껴 충북 단양군 단성면 차갓 마을로 이어지는 고개이다. 생달리에서 오르다 보면 폐광이 있어 길이 아주 양호하고, 최근에는 고압선 송전탑 공사를 위해 고갯마루까지 찻길을 닦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반대편 차갓 마을로 가는 고갯길이 두 군데로 나 있는데 황장산 쪽으로 난 고갯길을 작은 차갓재라 부른다. 역시 황장산을 오르내리는 등산로로 쓰이고 있으나 차갓 마을로 가는 길은 비교적 통행량이 많지 않다.

  8) 벌 재

  벌재는 문경시 동로에서 충북 단양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현재는 975번 지방도로가 넘어가며 2차선으로 포장이 되었으므로 통행량이 날로 증가하고 있다.
  벌재는 『증보문헌비고』,「여지고」등의 옛 기록에 벌치(伐峙)로 기록되어 있다. 그 명칭은 편의상 벌목재, 버리미기재, 밀치, 밀재, 밀목치, 밀목재, 밀항 등과 마찬가지로 벌의 목을 형상화한 이름으로 볼 수도 있으나, 본래는 이 지역의 지명으로 남아 있는 적성(赤城)과 관련된 옛 이름일 가능성도 아주 높다. 충북 단양의 옛 이름이 적성이었던 것은 물론이거니와 지금도 백두대간 양쪽 지역인 문경시 동로면 적성리와 단양군 적성면에 모두 그와 관련된 이름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4. 글을 맺으며

  문경 지역 백두대간 고갯길의 특징은 예나 지금이나 백두 대간 동쪽 지역에 자리잡은 경상도 지방에서 백두대간 서쪽 지역인 기호지방과 해서지방, 또는 중국으로 통하는 물길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찍이 신라시대에는 삼국통일을 위해 반드시 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중요한 요충이었으며,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는 도읍지였던 개성이나 한양으로 통하는 으뜸 통행로였다. 오늘날에는 비록 나라의 제1도인 서울에서 제2도인 부산으로 통하는 큰 길을 추풍령에 넘겨주었지만, 바야흐로 백두대간 동서 고갯길이 광범위하게 개척되고 있는 국면이므로 과거 중요 교통 요충의 역할은 물론, 장차 백두대간의 원리에 입각한 국토 관리의 시대가 오면 나라의 가장 중심부를 넘나드는 인후지지의 명성을 되찾게 될 것이다.
  짧은 지면이었으므로 좀더 세밀한 고갯길의 역사문화와 전설, 또는 개척과 발달과정을 살펴보지 못한 점을 아쉬움으로 남기면서 이 정도로 글을 맺는다. 이 글에서는 문경지역의 백두대간을 청화산에서 벌재까지로 규정하였지만 고갯길의 생리를 따져 엄격히 가름하자면 벌재와 죽령 사이에 걸린 저수령까지도 포함하여야 할 것이다. 저수령은 일찍이 2세기 중엽 신라에 의해 북진의 영로로 개척되었던 죽령과 계립령 사이에서 벌재와 더불어 작은 샛길의 역할을 충실히 담당했던 고갯길이다. 그러나 딱히 그렇게만 가름할 일도 아니겠다 싶고, 다만 행정구역으로 나누어도 저수령은 경북 예천군과 충북 단양군의 소관이르모 이 글에서는 제외하였다.
  전문적인 토양은 척박하고 학술적인 사려 또한 일천하거니와 그저 산천과 더불어 사람이 살아가는 섭리를 길에서 찾아보고자 하는 문외한의 식견으로 횡설수설한 글이라 허술하기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다만 발로 보고 손으로 들은 이야기를 옮겼으니 그것으로 조촐한 위안을 삼는다.

신라 육상 교통로 계립령

   서영일(단국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 수석연구원)

계립령로는 낙동강 중류의 거점이었던 선산과 한강 중류의 거점이었던 충주를 연결하여 두 지역의 자원과 인구를 통합할 수 있는 교통로이다.

  계립령의 위치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견해가 제시되고 있지만, 현재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와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를 연결하는 하늘재로 보는 것이 대세이다. 계립령이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신라 아달라왕 2년(156)이지만, 그 이전부터 한반도의 남북을 연결하는 경제·문화의 교류로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계립령 또는 이곳을 통과하는 계립령로가 역사의 중심 무대로 등장한 것은 삼국시대이다. 삼국시대에 계립령은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지대요 군사 요충지였고 불교문화의 유입로가 되었다.
  신라는 553년 한강 유역을 차지한 후 계립령로를 정비하여 본격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계립령로는 경주에서 계립령을 통해서 한산주(서울) 북쪽까지 이어지는 교통로를 말한다. 신라시대 소백산맥을 통과하는 교통로는 지나가는 고개에 따라서 경유지, 방향, 기능 등이 분화되고 있다. 따라서 고개의 이름을 붙여서 교통로를 부르는 명칭으로 사용하는 것이다.『삼국사기』에도 계립령로, 죽령로 등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문경의 고대사를 역사·지리적인 관점에서 살펴보기 위하여 신라시대 계립령로와 계립령의 역사적 의미와 그 기능을 몇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1. ‘계립령’, 그 이름의 변화

  계립령은 시대와 국가에 따라서 계립현, 마목현, 마골산, 마골참, 대원령, 한훤령 등 여러 가지 다른 이름으로도 불려왔다.『삼국사기』,「신라본기」,<아달라왕 2년조>에는 ‘계립령(鷄立嶺)’ 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온달전>에는 ‘계립현(鷄立峴)’ 으로 기록되어 고구려와 신라에서 각각 다르게 표기하였던 것 같다. ‘계(鷄)’자나 ‘계()’자가 음과 뜻이 같고, ‘영(嶺)’과 ‘현(峴)’이 모두 고개를 뜻하는 말이기 때문에 둘은 글자만 다를 뿐 같은 의미이다. 고구려나 신라 모두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읽는 이두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같은 의미지만 다르게 표시될 수 있다. 아마도 신라에서는 주로 계립령(鷄立嶺)으로, 고구려에서는 계립현(鷄立峴)으로 불렀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고구려에서는 ‘마목현(麻木峴)’이라고도 불렀던 것 같다.『삼국사기』,<김유신전>에 실린 연개소문의 말 중에 “마목현(麻木峴)과 죽령(竹嶺)은 본시 우리의 땅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서 마목현은 계립현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온달(590년대)은 ‘계립현과 죽령’을 고구려의 영토라고 하였고, 연개소문(642년)은 ‘마목현과 죽령’을 고구려의 땅이라고 하였으므로 두 사람은 같은 말을 한 것이다. 계립령을 가리켜 온달은 계립현이라고 하였고, 연개소문은 마목현이라 하였다.
  왜 국가와 시대에 따라 계립령, 계립현, 마목현 등 각각 다르게 표기되었을까? 이 문제를 살펴보려면 조선시대 기록이지만『신증동국여지승람』,<충청도 연풍조>에는 “계립현(鷄立峴)은 속칭 마골점(麻骨岾)이라고도 한다”고 하였고, <경상도 문경조>에는 “계립령은 속칭 마골산(麻骨山)으로, 방언으로 서로 같은 의미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계립현과 마골점이 같은 것이고 계립령과 마골산이 같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모두 방언으로 같은 의미라 했다. 방언이란 순수한 우리말을 말한다. 계립령은 방언으로 ‘저름재’,‘지릅재’,‘겨릅재’ 등으로 불렸다. ‘계립(
立)’, ‘계립(鷄立)’, ‘마목(麻木)’, ‘마골(麻骨)’ 등은 모두 이름이 ‘저름’, ‘지릅’, ‘겨릅’ 등의 방언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고, ‘영(嶺)’, ‘현(峴)’, ‘점(岾,[山])’ 등은 재라는 방언을 한자로 기록한 것이다. 즉 모두 우리말을 이두식으로 표현하는 데에서 다양한 명칭이 생겨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예을 들어서 ‘저름재’라는 우리말에서 음을 딴 것이 ‘계립령(鷄立嶺)’이고, 뜻을 딴 것이 ‘마목(麻木,[麻骨])현’ 이라고 하겠다. 신라에서는 주로 음을 따서 계립령이라는 명칭을 계속 사용하였다. 고구려에서는 처음에는 ‘계립현’이라고 음을 따서 부르다가 이 지역을 상실한 후 뜻을 딴 새로운 표현인 ‘’마목현이 등장하였고, 이것이 후대까지남아서 마골산, 마골점 등으로 불렸던 것이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계립령은 대원령(大院嶺)이라 불렸던 것으로 생각된다. 고려 고종 42년(1255)에 대원령에 머루르던 몽고병을 충주에서 정예병을 출격시켜서 1천여 명을 죽였다고 한다. 여기에서 대원령은 계립령을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충청도에서 계립령으로 오르는 입구가 되는 충청북도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사지에서 ‘대원사주지(大院寺住持)’라고 새겨진 기와가 출토 되었다. 이 기와는 고려 명종 22년(1192)에 만들어졌다. 1192년경에는 현재의 미륵리사지를 대원사라고 불렀던 것이다.
  미륵리사지를 대원사라고 불렀던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고려 초에 개창된 사찰 가운데에는 끝에 ‘사(寺)’자가 아니라 ‘원(院)’자로 끝나는 이름을 가졌던 절이 많이 있다. 원래 원은 숙박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새재는 대원령에 비하면 ‘새로운 고개’가 되는 셈이다. 이것이 한자로 기록할 때 ‘새’는 조(鳥)나 초(草)로 표기하고, 고개는 영(嶺)이나 점(岾) 등으로 표기하여 조령 또는 초점 등이 되었던 것이다. 조령이 개발되면서 상대적으로 대원령은 점차 사용되지 못하고 쇠퇴되어 갔다. 이후 대원령이란 명칭도 사라지고 “하늘에 닿을세라 높은 재”라고 하여 ‘한단령’ 또는 ‘하늘재’라 불렸다.
  결국 계립령은 국가와 시대에 따라서 이름이 변화되었다. 신라시대에는 계립령으로 불렸고, 고구려 때에는 계립현, 마목현 등으로 불렸다. 주로 우리말을 한자로 어떻게 표기하는가에 따라서 이름이 달라진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대원이 있어서 대원령이라고 불리다가 조선시대에는 대원이 폐쇄되고 통행도 뜸해지면서 한단령, 하늘재 등으로 이름이 변화되었다.

2. 계립령·계립령로의 개척시기

  계립령이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삼국사기』,「신라본기」아달라왕 3년(156)이다. 즉 “4월에 계립령로를 열었다”란 기록이다. 또한 아달라왕 5년(158)에는 “죽령을 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들은 소백산맥 서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이 개척되었다는 점에서 주목되어 왔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신라는 2세기 중엽에 계립령과 죽령 일대까지 세력을 확대한 것이 된다. 여기에서 말하는 계립령을 어디로 볼 것인가는 사람에 따라 약간의 다른 견해도 있지만, 대부분 문경에서 충주로 넘어가는 소백산맥 고개를 말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왜냐하면 신라의 국가 발전 과정을 살펴보면, 이때 신라가 문경이나 풍기 지역에 진출하였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삼국지』,「동이전」에 의하면 3세기 후반까지 한반도 중·남부 지역은 마한,진한,변한 등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신라는 진한에 속해 있는 12개 소국 중 하나였다. 진한의 범위는 정확하지 않지만, 대체로 오늘날 경상북도와 경상남도 중 울산과 양산 일대가 속하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라는 이때 경주 평야를 중심으로 한 작은 나라였다. 나라 이름도 ‘사로’, ‘사라’, ‘서라벌’ 등 여러 가지로 불렀다. 이 경주 평야의 작은 나라가 문경 지역에 있었던 계립령을 차지했다고 믿기 어렵다. 경주에서 문경 사이에는 골벌국(영천), 압독국(경산), 다벌국(대구), 소문국(의성), 감문국(김천,선산), 사벌국(상주) 등 신라와 세력과 규모가 비슷한 여러 나라가 위치하고 있었다. 따라서 신라가 계립령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중간에 있는 여러 나라를 정복하여 영토를 넓히거나 굴복시켜서 그 세력권 아래 두어야 할 것이다.
 『삼국사기』를 살펴보면, 신라가 문경으로 통하는 길목에 있는 여러 소국을 굴복시키고 상주 지역까지 진출한 것은 3세기 중엽이었다. 즉 신라가 185년 소문국, 231년 감문국, 247~261년 사이에는 사벌국 일대에 진출하였다. 따라서 신라의 국가 발전 과정을 고려하면, 156년에 계립령로를 개척하였다는『삼국사기』기록은 믿기 어렵다. 때문에 학계에서는 이것을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보면서도 이보다 나중에 있었던 일을 시대를 올려서 기록했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또 나중에 신라에 복속되었던 소국이 계립령로를 개척했던 사실을 마치 신라가 한 것처럼 기록하였던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이밖에 신라가 진한 소국을 대표하여 계립령을 통하여 대외 교역을 주도했던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이해하는 시각도 있다. 새로운 자료가 등장하지 않는 이상, 그 중 어느 견해가 타당한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정치·군사적인 면에서 신라가 2세기 중반에 계립령에 진출했다고 보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삼국사기』기록을 믿을 때, 신라가 계립령에 처음 진출했던 것은 빨라야 3세기 중엽이다. 사벌국을 복속시키고 문경까지 신라의 세력권에 포함시켰을 가능성이 있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신라가 사벌국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경주-경산-대구-선산 등을 거쳐서 상주에 이르는 교통로를 이용했을 것이다. 또한 계립령까지 진출했다면 상주에서 문경을 거쳐서 계립령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러나 신라가 경주에서 계립령에 이르는 교통로를 군사 용도로 개척하였다고 하더라도 이것을 완전히 통제하였다고 보기 어렵다. 소국들은 여전히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남아 있었고, 때로는 반기를 들기도 하였다. 정치적으로는 매우 불완전한 복속상태가 계속되었고, 이 같은 상태는 지역에 따라서 다소 차이는 있지만 5세기까지 지속되었다. 따라서 3세기 중엽, 신라가 상주나 문경 지역에 진출하였다 하더라도 계립령로를 군사 진출을 위해서 활용하는 단계일 뿐이다. 이를 신라의 관도에 편입하여 중간중간에 역(驛)을 세우고 관장하게 된 것은 5세기 후반에 가서야 가능하였다.
  일반적으로 고대 국가의 교통로는 대외진출을 위하여 일부러 개척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선사시대 이래 사람들의 왕래에 의해 자연적으로 발생된 교통로를 군사 진출이나 지방 지배를 위하여 국가의 통제하에 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일부 도로도 확대하고 교통의 편의를 위한 역의 설치나 관리의 파견도 이루어지는 것이다.
  진한의 소국들은 소국 내부를 연결하는 지역 교통망을 확보하고 있었고, 교역을 위하여 소국과 소국을 연결하는 광역 교통로도 있었다. 신라가 계립령로를 개척하는 과정도 이전에 없던 길을 새로 만든 것이 아니다. 기존에 있었던 소국 단위의 지역 교통로를 광역 단위로 연결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상주에서 계립령을 거쳐서 한강 유역으로 나가는 교통로를 정치·군사·경제·문화적 목적에서 활용하려는 의지를 실현해 가는 과정이었다. 이 같은 노력이 완성되어 신라가 계립령로를 완전히 장악하게 된 것은 5세기 후반이다.

3. 5~6세기 신라·고구려의 전쟁과 계립령

  신라와 고구려가 계립령을 국방상 요충지로 주목하고 계립령로를 차지하기 위하여 본격적으로 항쟁하게 된 것은 5세기 고구려의 남하와 관련된다. 고구려는 5세기경 충주에 남진기지로 국원성을 설치하고 계립령과 죽령을 통하여 영남지방으로의 진출을 모색하게 되었다. 죽령 이남의 경상북도 북부 지역은 일시적으로 고구려 세력권에 포함되었던 흔적이 남아 있다. 이에 비하여 계립령 이남 지역은 고구려의 세력이 미쳤다고 볼 수 있는 자료가 없다. 충주에서 계립령을 거쳐서 문경-상주로 통하는 길이 낙동강 유역으로 진출하는 지름길이다. 그렇지만 고구려는 상주 지방으로 나가기 위하여 계립령로를 우회하여 추풍령 방면을 통과하려고 하였다. 고구려는 494년 살수지원(薩水之原,괴산군 청천)에서 신라군을 패퇴시키고 견아성(犬牙城)을 포위하였다가 백제의 원군이 도착하자 철수하였다. 여기에서 견아성은 보은과 상주 사이에 있었던 성으로 비정된다. 또한 신라는 일선군(선산)에서 사람들을 동원하여 삼년산성(충북 보은), 굴산성(충북 청산) 등을 수축하여 고구려의 남진에 대비하기도 하였다. 즉 추풍령 방면에 방어력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고구려가 계립령로보다 그 이남의 추풍령로를 남진로로 선택한 까닭은 무엇일까?
  첫째, 당시 신라와 백제는 나제동맹을 결성하여 고구려의 남진을 효과적으로 차단하고 있었다. 그런데 신라와 백제의 연결통로는 보은-청주-천안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고구려는 국원성(충주)에서 출격하여 신라와 백제 사이 교통의 요지가 되는 보은과 청주 일대를 집중적으로 공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둘째, 지리적인 면에서 계립령로는 군사활동에 장애가 되었다. 계립령로는 하늘재(해발 530m)를 분수령으로 남북으로 길 게 형성된 계곡을 교통로로 개척한 것이다. 계립령 서쪽은 월천이 흘러서 남한강으로 합류하는데, 계립령 서쪽 미륵리에서 북쪽으로 곡류하여 송계계곡을 지나서 제천시 한수면을 거쳐 남한강에 합류한다. 남쪽은 신북천이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에서 갈평리, 당포리, 고요리 등을 거쳐 흘러가서 문경에서 조령천과 합류하고, 다시 유곡을 지나 점촌, 함창을 거쳐서 낙동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하천이 흘러나가는 좌우는 협곡을 이루고 있고, 그 양 끝은 충주와 점촌이 된다. 점촌에서 충주까지의 거리는 약 50㎞ 이상이고 그 중간 거점이 되는 고이 문경분지이다. 이 협곡지대가 비교적 통행하기가 쉬워서 교통로로 이용된 것이다. 이 협곡지대를 안전하게 통과하기 위해서는 문경분지를 장악해야 한다. 그러나 고구려는 문경을 장악하지 못했고, 그 때문에 계립령로를 이용하여 남진하기가 어려웠다. 전투를 위해서는 공격부대뿐만 아니라 보급부대가 통과해야 하는데 약 50㎞에 달하는 긴 협곡은 특히 보급부대에 치명적인 약점이 된다. 계립령로는 고구려에 아주 불리한 지형이지만, 신라에는 천연적인 방어선이 된었다.
  이 같은 이유로 고구려는 계립령로를 활용할 수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반대로 6세기 중엽에 신라가 한강 유역으로 진출할 때에도 계립령로를 활용할 수 없었다. 신라가 문경 지역을 차지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계립령에서 충주에 이르기까지에는 역시 긴 협곡을 통과해야 한다. 더욱이 충주의 남쪽은 계명산, 남산 등 험준한 산이 가로막고 있어 자연적인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고, 이 곳을 지나가기 위해서는 충주 동쪽의 ‘마즈막재’라고 하는 고갯길을 통과해야 한다. 그 이후에도 남한강이나 달천을 도강해야만 국원성에 도달할 수 있다. 신라도 문경에서 충주까지 진군할 때, 지형이 험난하고 보급로가 길어져서 역습을 당하기 쉽다. 따라서 신라도 추풍령로나 죽령로를 군사 진출로로 이용하였던 것이다. 결국 5~6세기 중엽 50㎞에 달하는 계립령 고갯길은 신라와 고구려 어느 나라도 장악하지 못한 완충지대로 남아 있었다. 때문에 계립령은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을 상징하는 지역으로 인식되었다. 7세기까지 이 같은 인식이 남아 있어서, 고구려는 계립령 서쪽을 원래 고구려의 영토라고 주장하였다.
  신라가 한강 유역으로 진출한 후 계립령로는 신라의 가장 중요한 교통로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 시기는 대체로 충주에 국원소경을 설치하고 경주의 귀족과 부호를 옮겨 살 게 하였던 557년경부터이다. 국원소경은 진흥왕이 555년에 한강 유역을 돌아보고 나서 새로운 영토를 확인하고 이를 지배하기 위한 구상을 실현하려는 목적으로 설치된 것이다. 국원소경이 속한 한산주(新州,남천주,북한산주)는 군사령부인 정(停)의 이동에 따라 수시로 주(州)의 설치와 폐쇄가 반복되었다. 따라서 한강 유역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뒤에서 행정과 보급을 지원하여 줄 수 있는 거점 도시가 필요했다. 경주는 한반도의 동북에 치우쳐 있어서 소백산맥 서쪽 한강 유역을 통솔하는데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라는 이미 지증왕 때에 아시촌소경을 설치하여 소백산맥 서쪽으로 진출하기 위한 거점으로 활용했던 경험이 있었다. 신라의 영역이 소백산맥 이북으로 확대되자 아시촌소경의 필요성이 희박해졌고, 새로운 소경을 소백산맥 서쪽에 설치할 필요가 생겼다. 이때 충주 지역이 주목되었다. 충주 지역은 고구려의 국원성(國原城)이 있었던 곳으로 도시의 기반시설이 확보되어 있었다. 또한 계립령을 통하여 한강 유역과 낙동강 유역을 연결하는 지리적 요충지이며, 고대국가의 가장 중요한 경제자원인 철이 생산되는 곳이었다. 소경을 설치하기에 가장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국원소경이 한강 유역통치의 거점도시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경주와 국원소경을 연결하는 도로를 정비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신라의 북진에 이용된 교통로는 죽령로와 추풍령로였지만 이들은 군사 도로의 성격이 강했다. 행정·문화적 용도의 새로운 도로가 필요하였다. 이때 계립령로가 주목되었다. 계립령로는 소백산맥을 통과하는 고갯길 가운데 가장 평탄하고 경주에서 충주에 이르는 지름길이다. 낙동강 중류의 거점이었던 선산과 한강 중류의 거점이었던 충주를 연결하여 두 지역의 자원과 인구를 통합할 수 있는 교통로이기도 하다. 행정적 목적에서 계립령로의 중요성이 커지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신라는 기존에 계립령까지 뻗어 있던 계립령로를 충주까지 연장하게 되었다.
  한편, 계립령로는 경제적 가치도 컸다. 신라는 한강 유역에 진출함으로써 중국으로 통하는 해상 교통로를 확보하였다. 그렇지만 백제 때문에 서·남해안 해로를 활용할 수 없었다. 신라는 연안 해로를 사용하기 어려웠으므로 국내에서 자원의 이동 및 대외 교역품을 수송하는데 육상 교통로를 이용해야 했다. 그런데 이 문제점의 상당 부분은 계립령로가 해결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계립령 부근 약 50㎞를 육상으로 연결하게 되면 낙동강과 한강의 수로가 서로 연결될 수 있었다. 신라는 해로를 사용할 수 없는 대신에 국토를 관통하는 내륙 수로를 가지게 되었다. 계립령로가 추풍령로나 죽령로에 비하여 경제적 가치가 큰 것은 바로 이 점이다.

4. 불교문화 전파와 계립령

  계립령은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으로 상호 항쟁하던 곳이었지만, 양국을 연결하는 문화의 통로로 이용되었다. 신라는 고구려로부터 불교를 도입하였는데 계립령로가 그 통로로 이용되었다.
 『삼국사기』와『삼국유사』에 의하면, 눌지왕 때 고구려 승려 묵호자가 일선군 모례의 집에 들어와서 포교를 한 것이 신라에 불교가 전래된 시초라고 한다. 또『신증동국여지승람』,「선산도호부」,<불우조(佛宇條)>에 의하면, 묵호자가 선산에 이르러 도개부고(道開部曲)의 모례의 집에 토굴을 파고 전교를 하였고, 훗일 아도(阿道)가 3인을 데리고 다시 모례의 집에 도착하여  시종 3인이 머물면서 경률을 강술하였더니 믿는 자가 있었는데, 아도가 냉산(冷山) 아래에 이르러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만발한 것을 보고 절을 지어 도리사(桃李寺)라고 이름 붙였다고 한다.
  도개부곡의 ‘도개(道開)’는 ‘불도(佛道)를 열다’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곳은 현재 구미시 도개면 도개리이다. 현재 모례의 집과 우물로 추정되는 유적이 남아 있고 이와 관련된 전설도 있다. 또한 지금도 선산군 해평면 송곡동 냉산 정상에는 도리사기 있고, ‘아도화상사적비(阿度和尙事蹟碑,1639년) ’등 관련 유물이 남아 있다.
  이상과 같은 기록, 전설, 유물 등으로 보아서 선산이 신라에 처음으로 불교가 전파된 곳으로 보인다. 모례의 집이 신라 최초의 불교 전달지가 되고, 냉산의 도리사는 아도에 의해서 창건된 신라 최초의 사찰이 된다.
  그렇다면 묵호자나 아도나 일선군에 오게 된 것은 어떤 연유에서일까? 그 답은 계립령로와 선산 지역의 관련 속에서 찾을 수 있다. 도개부락이 있는 도개면은 현재 선산군 소재지 북동쪽 낙동강 건너편 쪽에 위치하고 있다. 북쪽은 의성군과 접하고 동쪽은 군위군과 접하며 남쪽은 해평면과 접하고 있다. 이곳은 계립령로의 거점지역으로 낙동강을 도강하기 위한 요충지이다. 도개면의 북쪽에는 낙동도(洛東渡)가 있는데 이곳은 조선시대 영남대로가 통과하던 나루터이다. 현재도 상주에서 칠곡을 거쳐서 대구로 통하는 도로가 통과하고 있다.
  신라 소지왕대에 선산에서 3천 명의 역부를 징발하여 보은의 삼년산성을 수축하였던 사실이 있다. 아마도 5세기 후반에 일선 지역은 상당한 인구와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소지왕은 선산 지역을 두 차례 순행하여 이 지역에 특별한 관심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신라가 선산에서 역부를 징발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 간접적이나마 호구 파악도 이루어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선산 지역은 자비왕대부터 고구려를 방어하기 위한 거점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신라의 북진 발전에 있어서 근거지가 되었던 곳이다. 소지왕 때에는 신라의 관도와 우역이 정비되었는데, 이때 선산을 거쳐서 문경으로 통하는 계립령로 및 선산에서 보은으로 통하는 추풍령로 등도 정비되었다. 따라서 선산은 신라에서 가장 중요한 교통로 두 개가 나누어지는 교통의 중심지였다. 또한 정치·군사적 거점이며 인구가 집중된 곳이었다.
  선산은 고구려 승려들이 계립령을 넘을 때 처음 도달하는, 상당한 인구와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던 대도시였고, 군사적 요충지이며, 교통의 요지였던 것이다. 사료를 살펴보면, 묵호자와 아도뿐만 아니라 더 많은 수의 고구려 승려들이 선산 지역에 들어온 것 같다.『해동고승전』에 인용된 ,고기(古記)에는 묵호자 이전에도 고구려 승 정방(正方)이나 멸구빈(滅垢玭) 등이 등장하고 있다. <고득상시사(高得相詩史)>에서 아도가 두 번 죽임을 당하고도 신통력으로 살아나 다시 모례의 집에 숨었다고 한다. 묵호자나 아도가 오기 이전은 물론이고 이들이 순교한 이후에도 파상적으로 다른 고구려 승려가 모례의 집으로 왔던 것이다. 그들의 목적지가 경주였는지 확실하지는 않다. 다만 묵호자가 경주까지 갔던 것으로 보아 최종 목적지는 경주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신라에서는 불교를 배척하고 있었고 고구려 승려 대부분이 선산에 머물렀기 때문에 처음부터 선산 지역이 그들의 목적지였다고도 볼 수 있다. 모례의 집은 신라에 불교가 처음 전래될 무렵 고구려 승려들의 거점, 즉 절터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디에서 어떠한 경로를 통하여 선산 지역에 이르게 되었을까? 이들이 모두 ‘고구려 승려’였기 때문에 출발지는 고구려 땅일 것이다. 그런데 삼국시대의 불교는 지배층 중심의 불교였기 때문에 수도나 그 주변 지역 또는 수도에 버금가는 지방도시에서 유행하였다. 대부분 삼국시대의 불교 유적도 수도와 그 주변에서 보이고 있다. 고구려는 5세기에 충주와 국원성을 설치하였다. 국원성은 고구려의 별도(別都)로 군사적 기능뿐 아니라 문화적 기능을 가진 도시로 추정되고 있다. 충주에는 고구려의 불교문화가 유입되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 ‘봉황리마애불’, ‘건흥5년명 불상광배’ 등 고구려 계통의 불교 유적과 유물이 그 영향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같은 이유로 고구려 승려들의 출발지로 주목되는 곳은 바로 충주 지역이다. 또한 충주에서 선산으로 통하는 교통로는 계립령로였다. 고구려 승려들은 충주에서 출발하거나, 평양에서 충주를 거쳐서 계립령로를 따라서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선산에 머무르게 된 것이다. 이들이 신라에서 고구려로 돌아가는 과정도 마찬가지였다. 신라와 고구려는 계립령을 중심으로 정치·군사적으로 대결하였지만, 계립령로를 통한 문화적인 교류는 전쟁기간에도 지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계립령로는 신라에 불교문화를 도입하는 데 공헌한 것뿐만 아니라, 신라의 불교문화를 소백산맥 서쪽으로 확산시키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신라의 불교는 8세기경까지는 주로 경주와 그 주변 지역에서 유행하였으나 9세기에는 지방으로 확산되어 갔다. 그 과정에서 우선 영남 지역에 몇 개의 거점을 형성하고 팔량치, 육십령, 추풍령, 계립령, 죽령 등 소백산맥의 여러 고갯길을 거쳐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이 중 계립령로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곳이 팔공산, 선산, 상주 지역 등이다. 이들 지역이 계립령로를 통하여 충주, 원주 일대로 신라의 불교문화를 확산하는 문화적 거점이 되었다. 계립령 일대에서는 이와 관련하여 월광사지가 주목된다. 월광사지는 9세기경에 창건되었는데, 문경에서 계립령을 넘어서 충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 계립령로를 통한 통일신라의 불교문화 전파 경로를 살필 수 있는 직접적인 자료인 셈이다. 이후에도 계립령로는 고려시대에도 불교문화의 확산과 관련하여 주목된다. 관음리사지, 미륵리사지, 덕주사지, 사자빈신사지 등 다수의 고려시대 사찰이 계립령 주변에 있다. 이는 고려시대 불교문화의 전파에 있어서 계립령과 계립령로의 역할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문경지역의 역과 원

   조병로(경기대학교 사학과 교수)

역(驛)·조운(漕運)과 더불어 조선왕조의 중앙집권적인 통치력권을 유지하고 공고히 하는 데 행정·외교 및 교통운수상의 중추적인 동맥구실을 하였다.

1. 문경지역의 역(驛)

  1) 유곡역의 유래와 유곡도의 편성

  유곡역의 유래

  조선시대의 육상 교통기관으로 역이 설치되었다. 역은 중앙과 지방간의 왕명과 공문서를 전달하고, 물자를 운송하며, 사신의 왕래에 따른 영송과 접대 및 숙박의 편의를 제공하는 것을 주로 담당하였다. 또한 왕래인이나 범죄인을 검색하는 역할을 맡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역은 조운(漕運)과 더불어 조선왕조의 중앙집권적인 통치권력을 유지하고 공고히 하는데 행정·외교 및 교통운수상의 중추적인 동맥구실을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역은 삼국시대부터 설치된 것으로 알려져 왔으며, 고려시대에 이르러 초기의 6과 체제에서 점차 중기 이후 22역도(驛道) 체제를 확립하여 제도적인 기틀이 마련되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이르러서 그것을 더욱 발전적으로 계승하면서 성종대의『경국대전』의 반포와 함께 41역도, 524속역 체제의 전국적인 역로망이 확립되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파발제(擺撥制)의 대두 등 부분적인 변화를 수반하면서 19세기 말 근대적 교통제도가 도입되기 전까지 교통기관으로서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와 같은 기능을 수행했던 역이 문경 지역에는 언제부터 나타났을까? 한국 역사상에 역 이름이 최초로 문헌상에 나타난 것은 삼국시대부터이다. 그러나 유곡역의 명칭이 문헌상 최초로 나타난 때는 고려시대부터라고 추정된다. 고려시대의 역제는 초기의 6과, 147역 체제에서 성종~문종 이후 22역도, 525속역 체제로 발전되면서 확립되었다. 유곡역은 아마도 성종 14년 이후 문종 21년 사이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22역도, 525속역 체제의 하나인 상주도(尙州道)에 소속되었다. 이것이 최초 기록이다.
  고려시대의 상주도에는 유곡역을 포함하여 낙원,낙동,청로,철파,지보,통명,덕통,옹천,안기,안교,요성,수산,쌍계,안계,금조,통산,송제,연향,구어 우곡.상림,조계,문거,화목 등 25 역이 소속되었으며, 경산부도에는 안언,답계,안림,수향,녹청,설화,무기,김천,속계,장곡,순양,토현,이인,증약,작내,낙양,낙산,회동,원암,함림,추풍,상평,안곡,장녕,부상 등의 역으로 조직되었다.

  유곡도의 조직

  그러나 이러한 고려시대의 상주도·경산부도는 조선시대의 세종대에 이르러 유곡도로 그 명칭이 바뀌게 되었다. 그리하여 유곡역은 유곡도 찰방(察訪)이 관할하는 중심 역이 되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유곡도의 속역 조직을 정리하면 <표1>과 같다.

<표1> 유곡도의 속역 변천

소재지

세종실록지리지

경국대전

유곡역지

문경(聞慶)
문경
개령(開寧)
상주(尙州)
상주
상주
상주
상주
상주
상주
선산(善山)
선산
선산
선산
비안(比安)
예천(醴泉)
용궁(龍宮)
용궁
군위(軍威)

유곡
요성
덕통
낙양
낙동
낙서
장림
청리신역
공성신역
상평
구미
영향
안곡
상림
쌍계
수산
용궁신역
지보
소계

유곡
요성
덕통
낙양
낙동
낙서
장림



구미
연향
안곡
상림
쌍계
수산
대은
지보
소계

유곡
요성
덕통
낙양
낙동
낙서
장림



구미
연향
안곡
상림
쌍계
수산
대은
지보
소계

  조선시대『세종실록지리지』유곡도에 속한 역들은 고려시대의 상주도와 경산부도에 소속된 역이 대부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세종실록지리지』에 기재되어 있는 바와 같이 전국의 역로망은 44역도, 538속역으로 재편되었는데, 경상도 지방의 역도는 사근도(沙斤道),성현도(省峴道),김천도(金泉道),창락도(昌樂道),장수도(長水道),황산도(黃山道),유곡도(幽谷道),소촌도(召村道),안기도(安奇道),자여도(自如道)로 개편되었다. 이때 유곡도에 소속된 속역을 보면 유곡,요성,덕통,낙양,낙동,낙원,낙서,장림,청리신역,공성신역,상평,구미,영향,안곡,상림,쌍계,안계,수산,용궁신역,지보,소계 등 21개 역이었다. 그후 세조 3년,6년,8년의 부분적인 개편 과정을 거쳐『경국대전』에 실리게 됨으로써 조선왕조의 역로 조직은 41역도, 524속역으로 완성되게 되었다.
 『경국대전』체제하의 유곡역은 경상우도의 유곡도에 그대로 편입되었으나, 세종대와는 달리 유곡,요성,덕통,수산,낙양,낙동,구미,쌍계,안계,대은,지보,소계,연향,낙원,상림,낙서,장림,낙평,안곡의 19개 역으로 축소,조정되었다.『경국대전』체제하의 역로망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역지(驛誌)를 편찬할 당시까지 거의 커다란 변동 없이 그대로 존속되었다. 그리하여 문경 지역에는 유곡역과 요성역이 설치되어 기호지방과 경상지방을 왕래하는 사람과 물자를 운송하는 교통로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유곡역의 역사적 위치

  유곡역은 조선 팔도 6대로의 하나인 서울 경성에서 동래에 이르는 제4로에 위치하였다. 조선 후기 역사지리학자의 한 사람인 신경준(申景濬)의『도로고(道路攷)』에 의하면 경성과 동래 사이를 오고가는 6대 도로의 하나인 제4로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경성→한강→신원점→현천현→판교점→험천→열원→용인→박군이현→직곡점→금령장→양지→좌찬역→기안점→진촌→광암→석원→모도원→숭선점→용안점→검단점→달천진→충주→단월역→수교→안부역→조령동화원→초곡→문경→신원→유곡역→덕통역→낙원역→불현→낙동진→여차리점→연향역→고리곡→장천→동명원현→우암창→금호강→대구→오동원→팔조령→청도→유천→밀양→이창→무흘현→내포진→황산역→양산→동래→좌수영→부산진에 이르는 길이 그것이다.
  한편, 감영(監營)과 통제영(統制營) 및 좌수영(左水營)으로 가는 데도 많이 이용되는 길이었다. 이 길이 행정·군사상의 중요한 요충지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감영의 경우, 감영→대구읍참→고평역→양원참→연향참→낙동참→낙원참→덕통참→유곡참→안보참→충주 방명으로 향한다. 통제영은 통제영(충무)→구허역→송도역→배둔역→상령역→파수역→창인역→일문역→내야역→쌍산역→설화역→팔궁역→인동역→연향역→낙동역→낙원역→덕통역→유곡역→문경→조령→충주 방면이고, 좌수영은 좌수영(동래)→소산역→양산→내포→무흘→밀양→유천→청도→오동원참→대구→고평역→양원역→연향역→낙동역→낙원역→덕통역→유곡역→요성역→조령→충주 방면이다.
  앞에서 볼 수 있듯 대구에 있는 감영이나 충무에 있는 통제영, 그리고 동래에 있는 좌수영을 갈 때에 반드시 유곡역을 지나도록 되어 있다. 그만큼 유곡역이 서울에서 경상지역을 오가는 길목임을 살필 수 있다.
  그런가 하면 한·일 간의 사행로(使行路) 위에 놓여 있어 외교적으로도 중요한 교통의 요충지였다. 신경준의『도로고』에 나타난 사행로를 살펴보면, 부산포→소산역→양산→황산역→무흘역→밀양→유천역→청도→성현역→무흘역→밀양→유천역→청도→성현역→경산→대구→팔여역→인동→해평→선산→상주→함창→문경→안보역→연풍→괴산→음성→음죽→무극역→이천→경안역→광주→경성 방면에 이르는 길이었다. 따라서 유곡역은 ‘영남의 인후(咽喉:목)’ 에 해당되며 서울과 영남의 인구와 물산이 유곡역을 통하여 유통됨으로써 사회·경제적으로나 군사·행정·교통상의 중요 요충지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2) 유곡역의 구조와 운영

  유곡역의 역사 건물

  공문서의 전달, 국내외 사신의 왕래에 따른 접대와 숙박 및 역마의 제공, 그리고 역로를 통행하는 사람의 검문 등을 위해서 주척(周尺)에 의거 30리마다 1개의 역을 설치하고 공해(公) 즉 역사(驛舍)를 건립하였다. 이 역사는 찰방(察訪) 이하 역력(驛役)을 수행하는 역민들의 집무시설이었으며, 역의 소요 재원을 조달하고 보관하기 위해 여러 가지 창고 시설도 함께 건립하여 운영하였다. 대개 역사의 시설물은 동헌(東軒),내동헌(內東軒),작청(作廳) 또는 인리청(人吏廳),사령청(使令廳),통인청(通引廳),관노청(官奴廳),창고(倉庫),문루(門樓),마당(馬堂),누정(樓亭) 등이 있었다.
  동헌은 찰방의 역무를 총괄하는 행정 관서이며, 내동헌은 찰방이 잠자는 침소(寢所)로 생각된다. 작청은 역리들의 실무를 보는 곳으로, 역에 따라서는 인리청이라고도 하였다. 사령청은 사령이, 통인청은 통인이, 관노청은 역노비(驛奴婢)가 잡무를 보는 곳이다. 역사에는 외삼문(外三門),내삼문(內三門)이 있어 문 위에 문루와 기타 누정(樓亭)을 세웠으며, 마당은 마구간의 일종으로 마단(馬壇)·마구(馬廐) 또는 양마청(養馬廳)이라고도 하였다.
  최근의 조사에 의하면 유곡동은 아골(衙洞),한적골,마본(馬本),주막거리(酒幕巨里)로 구성되었는데, 관아터로 추정되는 아골 지역을 시굴 조사한 바 있다. 한편, 최영준(崔永俊) 교수는 현지 답사를 통한 조사에서 유곡역이 관아를 중심으로 한 촌락형 취락 구조를 띠고 있다고 서술하였으며, 신후식(申厚湜)은 “관아터는 국도로부터 20m 떨어진 곳에 위치하여 약 300평의 장방형 담장을 쌓고 2층의 삼문루(三門樓)를 입구로 하여 그 안에 공고(工庫),천교정(遷喬亭),이청(吏廳),사령청,포청(砲廳),마단을 설치하고 그밖에 관노청(官奴廳)과 역관(驛館) 건물이 유일한 기와집[瓦家]이었으나 1910년 일본인이 파괴했다” 고 술회하고 있어 당시 유곡역의 규모를 엿보게 한다.

  유곡역의 역민(驛民)과 역할

  역민이란 역력(驛役)을 맡은 역속(驛屬)을 의미하는데, 역에 본적을 두고 여러 가지 형태의 역력을 부담하고 있는 역호(驛戶)를 뜻한다. 일반 민호(民戶)와는 별개의 호구안(戶口案), 즉 호적을 3년마다 ‘3정(丁) 1호(戶)’의 편호(編戶) 방식에 의해 작성하는데 병조,감영,각 읍,각 역승(또는 찰방)에게 보내어 보관하고, 이를 통하여 역민을 확보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주로 역리(驛吏),역노비(驛奴婢),일수(日守),조역 백성(助役百姓),서원(書員),관군(館軍) 등이, 후기에 이르러서는 각 지방의 역별로 차등이 있으나 역리,역노비,관군,사령(使令),통인(通引),마종(馬從),구종(驅從),보종(步從),마호(馬戶),급주(急走),포군(砲軍),방호(防戶),고공(雇工),역보(驛保) 등 다양한 계층이 역민을 구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역민은 유곡역의 경우도 비슷하게 편성되었는데,「유곡도중기책(幽谷道重記冊)」에 의하면 역시 육방 체제 아래 이방, 호장, 호방,예방,병방, 공방 등으로 나누어 업무를 분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역리는 찰방의 감독 아래 중앙 해정기관의 육방(六房) 체제와 비슷하게 역에서도 육방으로 나누어 실무를 담당하는 외아전(外衙前)을 말한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이방은 문서대장 관리, 즉 인신(印信,각종 도장),법전(法典),노문(路文,통행증),인리안(人吏案,역리대장),관안(官案,관리대장) 등의 문서관리 업무를 맡고 있다.
  호장은 입마청둔답(立馬廳屯畓),요성(요城)·상림역(上林驛)의 분표전매답(分俵錢買畓)을 관리하고 있으며, 호방은 기부전(記簿錢),춘등차비전(春等差備錢),일채전(日債錢),4부약채(四府藥債)를, 예방은 백미(白米), 적두(赤豆) 등의 잡물과 비품 및 공수미(公須米)·태(太)를 관리하며, 병방은 영문분표전(營門分俵錢) 및 청의(靑衣) 및 청의(靑衣)·홍대(紅帶) 등 군기 물자를, 공방은 역사의 관리와 보수, 관청의 비품 조달을 맡고 있으며, 포군(砲軍)의 경우 조총 등의 병기 관리, 포군도안(砲軍都案)과 절목(節目)을, 통인은 지필묵(紙筆墨) 등의 필기류를, 사령은 중고(中鼓), 나팔(
叭), 홍의(紅衣) 등 악기와 깃발을 관리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역리가 깃발을 관리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역리가 각 역에 몇 명 배치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다. 고려시대 6과 체제에서는 역의 대소에 따라 2~3명의 역리가 배정되었으나, 조선시대에는 이에 대한 인원 규정이 분명하지 않다.『경국대전』에 역노비의 숫자는 규정되어 있으나 역리에 대해서는 언급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찰방이 주재하는 본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외역(外驛)의 경우 적게는 3~4명 내지 15~20여 명 정도가 배정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 역리의 노비투탁(奴婢投托)현상, 공천(公賤)의 역리화(驛吏化),역노승리법(驛奴陞吏法)의 시행,혼인에 의한 신분 귀속,역리로의 투탁 등으로 역리인구가 증감하게 되었고, 그 결과 직접 노동역을 제공하는 입역(立役) 또는 사역(使役) 역리와 납공(納貢) 또는 산거(散居) 역리로 분화도는 경향을 보이고 있음이 주목되고 있다.
  입역 역리는 교대로 입역하여 역무 등의 행정 실무를 맡은 것을 말하며, 납공 역리는 입역하는 대신에 신공전(身貢錢)을 납부하는 것을 뜻한다. 또한 역리 중에서 문장 해독력이 있는 자로 역장을 선임하고 있다. 유곡역은『신증동국여지승람』과『여지도서』에는 469명이,『영남읍지』에서는 20명,『영남역지』안에 실려 있는「유곡도역지급사례등보책(幽谷道驛誌及事例騰報冊)」에서는 10명으로 편성되어 시사리(時仕吏), 사역 역리(使役驛吏) 또는 원역리(原驛吏)로 파악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여지도서』에서 보이는 역리 469명이 모두 역의 행정 업무를 담당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따라서 돌아가면서 교대로 근무를 했거나, 그렇지 않으면 입역 역리와 납공 역리로 나뉘어 역할을 분담하지 않기에는 무리가 있다. 따라서 돌아가면서 교대로 근무를 했거나, 그렇지 않으면 입역 역리와 납공 역리로 나뉘어 역할을 분담하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그리고 역노비는 조선 초기에는 전운노비(轉運奴婢), 급주노비(急走奴婢)로 구분되어 잡역을 수행하는 관노비(官奴婢)의 일종이다. 지방의 각 역에 배치되었기 때문에 외노비(外奴婢)라고도 하는데 넓은 범위의 공천(公賤)에 해당된다. 역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에 흔히 역노비(驛奴婢) 또는 역졸(驛卒)로 통칭되었다. 역노비의 경우는 경국대전에 역의 대소에 따른 인원수가 이들에게 구분전(口分田)의 형태로 역전(驛田, 뒤에 급주전)을 지급하는 대신에 입마역(立馬役),태운역(
運役),잡역(雜役), 즉 신공전(身貢錢) 납부, 입거전(入居錢) 납부, 읍민의 잡역 등을 부과하였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유곡역에 배치된 역노비는 역노, 역비의 형태로 입역하여 역노는 급주(急走),관노(官奴) 또는 주졸(走卒)로 표기되고 있으며,『여지도서』에서는 74명,『문경현지』에서는 315명이 파악되고 있으나, 말기로 갈수록 역노가 감소되고 있다. 역비 역시 비슷한 경향을 보이고 있는데 이것은 아마도 역비의 혼인에 따른 신분 귀속의 변화로 말미암아 종량화(從良化,양인 신분으로 승격)가 그 원인이 아닐까 추측된다.
  한편 역보는 역리 또는 역노비의 역력이 고달파서 자주 유망, 도산하게 되자 그들의 입역을 도와주기 위해 배정된 조역호(助役戶)의 하나이다. 역보의 지급은 국역 편성의 기반인 봉족제도에서 발달된 보법(保法)의 바탕 위에 성립된 것으로 초기의 조역(助役) 정책과 병행되었으나 점차 급보제(給保制)가 정착됨으로써 실시되었는데, 역리의 경우 동거족친(同居族親)을 봉족으로 삼아 조역케 한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후기에 이르러서는 역보는 양인보(良人保)와 천인보(賤人保)로 나뉘게 되었고, 또 역리보, 역졸보로 분화되어 점차 다른 독립호로써 배정하여 납포(納布) 또는 신공전(身貢錢)을 통하여 경제적인 조역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유곡역의 경우 역보(驛保)가 배정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사료에는 보이지 않고 오히려 일수(日守)가 배치되고 있다. 일수는 조선초기의 ‘일수 양반(日守兩班)’에서 유래하는데, 역리가 부족한 곳이나 신설한 역참에서 급사(給事)의 일을 맡았다. 일수의 기원은 조선 초기 함경도 지역의 신설된 각 참(站)에 일수 양반 5명씩을 배치한 것이 최초의 일이며, 그 후 대로역은 20명, 중로역은 15명, 소로역은 10명씩 배정하는 것으로 법제화 되었다. 일수가 부족한 경우 역 부근에 살고 있는 한역인(閑役人)이나 향리(鄕吏) 등이 충원되기도 하였으나 후기에 이르러서는『반계수록(磻溪隨錄)』에 따르면 일수 대신에 사령이 그 역할을 대신 수행하였다고 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곡역에는 1895년에 편찬된『영남역지』에는 사령 5명과 같은 해『영남읍지』안에 있는「문경현지」에는 일 수 17명이 병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1899년의『영남읍지』의「문경현지」에는 사령은 나타나지 않고 일수만 27명이 기록되고 있다.
  통인은 고려시대 하급 아전의 하나인 ‘통사(通事)’에서 유래한 것으로 찰방 등의 교체시에 통알인접(通謁引接)의 업무를 담당하였으며, 방호(防戶)는 유곡도역지(幽谷道驛誌) 시행 사례에 의하면 각 역의 위토(位土)를 지급받아 경작하는 역민 중에서 차출되어 공간(公幹) 즉 관청의 사무를 맡고 있는 인원이나 마필을 공궤(供饋)하는 일을 맡고 있다. 포군(砲軍)은 역의 방어 업무에 종사하는 것으로 추정되나 아직까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리고 역장(驛掌)·도장(都掌) 및 부장(副掌)은 아마도 역전(驛田)에서의 도조(賭租,세금의 일종) 징수 업무와 관계가 있는 듯하나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유곡역의 역마

  역마는 중요한 교통·통신 수단이기 때문에 이의 확보와 관리는 무엇보다 중요하였다. 사실상 역마는 군사 정보나 왕명 및 공문서의 전달, 그리고 사신 왕래에 따른 복물(卜物) 운송과 영송(迎送)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진상(進上)·공부(貢賦) 등의 물자를 운반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수단이다. 이에 조정에서는 역마의 확보와 관리를 위한 마정(馬政)에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다. 역마 이용을 적절히 규제하기 위해 포마법(鋪馬法)을 시행하였다.
  포마법에 대해 구체적으로 사료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고려 원종 15년(1274)부터였다. 원종 15년에 실시된 각 도에 출사(出使)하는 대소 사신의 포마 규정은 재추(宰樞)는 10필, 3품과 안렴사(按廉使)는 7필, 참상별감(參上別監) 5필, 참외별감(參外別監) 및 참상 이상의 외관은 3필, 참외는 2필, 참상도령(參上都領)·지유(指諭) 등의 차사원은 3필, 장교(將校)는 1필씩 사용하도록 하였다. 그 후 몽고 간섭기에는 다루가치(達魯花赤)의 관리 아래 포마차자색(鋪馬箚子色)을 설치하고 포마차자를 발급받아 역마를 사용케 하였다. 그것은 당시 고려 관인들이 때를 가리지 않고 역마를 남승함으로써 역마가 잔약하게 될 뿐만 아니라 사변이라도 일어나게 되면 때에 미치지 못할까 걱정했던 중서성(中書省)의 금지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포마법은 조선 초기에 이르러 점차 그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태조 원년(1392) 9월 도평의사사 배극렴(裵克廉)과 조준(趙浚) 등이 올린「시무책 22조목」가운데 역마 이용에 관한 규정을 제시함으로써 점차 구체화되었다. 이러한 바탕 위에 태종 10년(1410) 4월에는 포마기발법(鋪馬起發法)이 제정되고, 마패도 개조하여 역마 이용에 관한 규정을 마련하였다. 또 성종 원년(1470) 7월에 이르러서 각 지방의 수령이 교체되는 데 따른 영송과 급마 규정도 마련됨으로써 그 후『경국대전』에 법제화되었던 것이다.
  한편, 이와 같은 급마 규정이 원활하게 시행되기 위해서는 역마의 충분한 확보가 전제되어야 했다. 따라서 역마의 확보와 관리는 역 운영에 있어 매우 중요하였다. 역마는 역의 크기에 따라 상·중·하등의 등급으로 분류하여 지급되었으며, 교룡기봉지마(교龍旗奉持馬)를 상등마, 기마(騎馬)를 중등마, 복마(卜馬)를 하등마로 구분하여 역의 대소에 의하여 배치하였다. 역에 배치된 역마의 종류는 그 빛깔에 따라 여러 가지였다. 즉 웅마(웅馬),백총(白
),고라(古羅),가라(加羅),유마(馬),오류(烏),구즉적다소태성(仇卽赤多小台星),저총적다간저(苧赤多看著),청총(靑) 등이 그것이다. 또 역마의 관리는 일반적으로 식년마다 마적을 만들어 순영·병영·병조, 그리고 본역에 각각 비치하여 두고 매월 보름에 그 비척(肥瘠)과 조습(調習)의 상태를 점검, 관리하였다. 이러한 역마의 점고는 대체로 봄철에는 정월에, 가을철에는 7월에 실시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면 각 역에는 어느 정도의 역마가 지급되었을까? 이에 대한 구체적이고 전국적인 규모의 통계 자료는 아직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조선 전기에는 역로의 대소에 따라 상·중·하 3등급으로 나누어 역마 수를 정하였다는 규정이 있을 뿐 구체적인 사실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역지나 읍지 또는『여지도서』등 여러 가지 자료에 의하면 그 대강을 살필 수 있다.『만기요람』「군정편」에 의하면 전국 504개 역에 모두 5,380필의 역마가 배치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유곡역의 경우 역마 보유 실태는 어떠한가?『영남읍지』「유곡도역지」에 의하면, 고종 8년(1871) 현재 유곡역을 포함한 유곡도 전체의 역마는 상등마 19필, 중등마 41필, 하등마 47필로 모두 107필이며 그 중 유곡역은 상등마 2필, 중등마 5필, 하등마 5필로 모두 12필 정도였다. 그러나 그 후 1895년의『영남역지』「유곡도역지급사례등보책」에 의하면 상등마 2필, 중등마 5필로 모두 7필 규모로 점차 감소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역마는 초기에는 역리, 역노비 등의 역호(驛戶)에 의해 사육되었으나 후기에 이르면 마호입역제(馬戶立役制)가 실시되면서 일반 평민 등의 마호(馬戶)에 의해 사육되었다. 대체로 마호당 1필의 역마를 사육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유곡역의「본각역삼등마안(本各驛三等馬案)」에 따르면 말 1필당 1명의 마호가 배정되어 대마 2필, 중마 5필로 모두 7필이 사육되고 있으며, 말의 종류는 털 빛깔에 따라 분류하는데 청총(靑
,청백색)· 적다(赤多,붉은색)·유마(馬,붉은 바탕에 흙갈기 꼬리를 가진 말)·총마(馬,청백색 섞인 말)등이며 나이는 일곱 살이었음을 알 수 있다.

  유곡역의 경제기반

  조선시대의 역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다양한 형태의 역전을 지급하였다. 역전은 지급 형태에 따라 공수전(公須田), 마위전(馬位田), 유역인전(有役人田), 관둔전(官屯田), 아록전(衙祿田), 복호결(復戶結) 등으로 구분된다.

  ① 공수전의 지급과 경영
  공수전은 역사(驛舍)의 수리, 사신 접대 등 역의 일상적 운영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지급된 토지로서 늠급전(
給田)이라고도 한다. 이 공수전은 고려시대에는 대로역에 60결, 중로역에 40결, 소로역에 20결씩이 지급되었으나, 여말에는 전시과(田柴科) 체계가 무너지고 이에 따라 역전마저 붕괴되자 선초에 이르러서 조선왕조의 건설과 함께 역전에 대한 확보가 커다란 과제로 부각되었다. 그리하여 과전법(科田法) 시행에 따른 토지제도의 정비와 함께 역전의 기틀을 마련함으로써 지급되었다. 그러나 대 중국 교통로로서의 중요성을 고려하고 또 4군 6진의 개척에 따른 북방방어를 위해 황해도와 양계(兩界) 지방은 고려시대의 수준을 유지하도록 하는 정책이 견지하였다.
  이러한 공수전의 확보는 공공성을 띤 토지로써 지급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군자전(軍資田),혁거사사전(革去寺社田), 평민전(平民田)이 그것이다. 이러한 기준에 의거하여 유곡역과 유곡도 속역의 공수전은 소로의 예에 따라 요성역을 제외하고 대체적으로 5결씩 지급되었다.
  공수전의 경영과 수세에 대해서는 조선 초기의 자료에 따르면 역리나 역노비 등 역민에 의한 자경(自耕)이 원칙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세종 7년 2월에 병조가 경기.충청도 정역 찰방인 이길배(李吉培)의 계문에 따라 조정에서 의논한 것을 보면 공수전을 외인이 점유하여 경작하면 편하지 않으니 그 중 경작이 많은 것은 적절히 공제하여 역노비에게 분급하여 생활하도록 한 것이나 세종 18년에 각 역의 공수전은 비옥한 땅을 택하여 지급하고 역리로 하여금 자경(自耕)하여 사객의 지공을 담당하게 한 것 등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공수전의 수세에 대해서는『경국대전』에 공수전은 장전(長田),부장전(副長田),급주전(急走田)과 함께 ‘각자수세(各自收稅)’라고 하였다. 이 각자수세라는 것은 민전(民田)으로서 관에 세를 납부하지 않고 응식지인(應食之人), 곧 지급 대상자가 각자수세하는 성격의 토지인 것이다.
  이에 따르면 공수전은 결국 민전위에 설정된 각자수세지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조세를 국가에 바치는 것이 아니라 역에 소속하여 역력을 지고 있는 역민에게 단지 민전에서의 수조권을 부여한 것이라고 해석된다. 그리고 조선 후기의 대동법 시행 이후에 공수전은 면세출부전(免稅出賦田)에 포함되어 전세는 면제되고 단지 대동미를 납부하는 토지로서 그 성격이 변화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징수 규정에 따라 유곡역의 경우 5결의 공수전에서 공수위미(公須位米) 26석 11두 7승 2합, 공수위태(公須位太) 20석 12두 9승 9합 4석을 본역과 외역으로부터 수봉하여 역의 관수(官需)에 충당하고 있다.

  ② 마위전의 분급과 경영
  마위전은 역마를 사육하여 각 역에 입마(立馬)하고자 하는 대상자에게 지급된 토지이다. 원래 역의 입마는 선초에는 역리, 역노비, 그리고 관군 등 주로 역호가 담당하였다. 그러나 점차 역호의 조잔과 유망으로 말미암아 조역인(助役人)을 초청하거나, 평민도 입마역을 자원하도록 조치함으로써 새로운 마호(馬戶)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입마 담당은 역호만이 아니라 평민인 일반 민호에게도 부과되었다. 이들 역호 또는 입마 담당자에게 반대급부로써 마위전을 지급,경작하게 하였다.
  이러한 마위전은 역의 중요도에 따라 역 근처의 양전(良田)으로써 지급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대마는 7결, 중마는 5결 50부, 소마는 4결씩 차등 지급되었으나 역의 중요도에 따라 가급(加給)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마위전은 평민전, 군자전 또는 공전을 절급함으로써 성립되었다. 그러나 본역과 멀리 떨어진 곳의 토지나 자갈밭을 지급하여 쉽게 천반포락(川反浦落), 또는 복사(覆沙)로 변하거나 하였으며 심지어는 양전(量田)시에 허복(虛卜)을 기재할 정도로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였다. 실제 유곡역과 유곡도 속역의 마위전 보유 실태를 살펴보면, 유곡역은 역마 7필을 사육하는데 마위전 480두락이 지급되었다. 이러한 마위전의 경영은 역시 공수전처럼 자경(自耕) 또는 친경(親耕)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본역과 원거리에 있는 토지를 지급받거나 역력(驛役)이 과다하여 직접 경작하지 못하고 병작(竝作)하거나 단지 전세만을 수조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하여 마위전의 경영형태는 소작제적(小作制的) 경작에 대한 지대수취(地代收取), 즉 도조(賭租)를 수취하는 민전수조지화(民田收租地化)하여 마호 및 역마가(驛馬價)를 마련하는 비용으로 충당하게 되었다.

  ③ 복호결의 지급과 경영
  복호결(復戶結)이란 전결급복(田結給復) 또는 급복전(給復田)이라고도 하는데, 대동법 시행 후에 각 읍의 인리(人吏)뿐만 아니라 역리·역노비와 관군, 그리고 마호에게 지급된 면부출세(免賦出稅)의 토지를 말한다. 원래 복호결은 선초의 복호(復戶)에서 유래한 것으로 호역(戶役)의 일종인 잡역(雜役)을 면제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역리·졸의 고역(苦役)을 도와주기 위하여 복호를 시행하였다.
  이러한 복호제도는 단지 호역만을 면제하는 것인데도 법의 취지를 잘못 이해하여 가끔 공부(貢賦)까지 면제하는 경우도 발생하게 되었다. 이 문제는 광해군 원년(1609)에 복호 문제에 대한 논란ㅇ르 거쳤으나 해결되지 않고 호역으로서의 잡역만이 아니라 전결(田結)의 공부(貢賦)까지도 면제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역리·졸, 관군 등에게 복호결이 지급되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니라 역민의 자기결복(自己結卜), 즉 자기의 보우 토지에 한해서 대동미는 면제해 주고 전세만 납부하는 우대조치였던 것이다. 따라서 한마디로 전결에 대한 부역(賦役), 즉 대동미를 면제해 주는 셈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결복을 가지지 않은 역민의 경우 불공평한 문제가 발생하게 되자. 현종 11년(1670) 토지 없는 역졸에 대해 급복(給復) 조치를 단행하는 문제가 제기되어 결국 숙종 30년(1704) 역민들에게 자기결복뿐만 아니라 민결(民結)에서 대동미를 수세할 수 있는 민결급복(民結給復)으로 확대되었다. 이후 영조대에 이르면 민결급복은 보편적 현상이 되었다. 그리하여 경기도의 각 역의 역리졸은 1인당 1결, 충청·전라·경상도의 여러 역은 5결, 해서의 여러 역은 12결, 그리고 관군(館軍)에게는 3결씩 지급되었다. 결국 역리·졸, 관군에게 지급된 복호결에서 대동미를 거둬들임으로써 이른 바 복호가(復戶價)를 징수하여 그 경비로써 마호(馬戶)의 역마를 입역하는 재원으로 쓰거나 역의 재정에 충당하였던 것이다.
  유곡역도의 경우 역리·졸 1,261명에게 모두 911결 93부 6속의 복호결을 지급하여 결당 4냥씩 대략 3,647냥7전4푼 가량의 복호가를 징수하여 유곡역과 외역의 역마 구입 재원을 확보하였다.

  유곡역의 재정 운영 실태

  조선 초기 역의 재정 기반은 공수전, 마위전, 관둔전 등의 전세 수입에 의존하였다. 또 역리·역노비나 관군 등에게 장전, 급주전, 구분전과 같은 유역인전(有役人田)을 지급하는 대신 입역노동, 즉 부역제에 의해 확보되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역의 재정 기반은 대동법의 시행과 전세제도의 변화, 그리고 신역제(身役制)의 변화 등으로 역의 재정 구조에도 많은 변화가 수반 되었다.
  첫째, 역력 부담자인 역리·졸이나 관군에게 복호결을 지급하여 대동미를 면제하는 대신 그것으로 역마가를 마련하였으며, 둘째, 역리·역노비·관군 등 입마역(立馬役)과 납공역(納貢役)으로 분화, 입역하지 않는 자에게 신공전(身貢錢)을 부과하였다. 셋째, 공수전·마위전의 소자제적 경영에 따른 도조제(賭租制)를 시행하여 도조를 징수하였고, 넷째, 역민들에게 과외 잡세를 부과하게 되었으며, 다섯째, 역마 확보에 있어서 마호입역제(馬戶立役制)와 쇄마고립제(刷馬雇立制)를 실시하게 되었다. 여섯째,사신 왕래에 따른 영송, 접대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지공미(支供米)를 징수하고, 지칙고(支勅庫), 예단고(禮單庫), 지공고(支供庫) 등의 민고(民庫)를 운영하였고, 일곱째, 역 재정이 부족시에는 병조, 호조 미곡으로 이획(移劃)하거나 급대(給代)를 실시하게 되었으며, 여덟째, 마위전의 사상매매(私相賣買), 예매(預賣) 등으로 마위전이 부족하게 되자 마호에게도 복호결을 지급하거나 둔전답(屯田畓)을 지급하여 도조를 징수함으로써 입마가를 마련하였다.
  또한 사창과 같은 역창(驛倉)을 설치하여 역민에게 환곡(還穀)을 대여하고 이자곡으로써 역 재정을 확보한 것 등이 그것이다. 그리하여 역의 세입 구조는 크게 결역(結役,전세수입), 신공전(身貢錢), 역민의 호역(戶役, 과외 잡세), 정부 보조(관향곡, 저치미 등) 등의 재원으로 편성,운영되었다.
  유곡역의 재정 구조에 대해서는『부역실총(賦役實摠)』「유곡역지(幽谷驛誌)」와『유곡역관련고문서집(幽谷驛關聯古文書集)』의 「유곡도중기책(幽谷道重記冊)」「관용하기책(官用下記冊)」「춘등전곡배삭기(春等錢穀排朔記)」「관황회계기(官
會計記)」「관청하기책(官廳下記冊)」「이방색봉하기(吏房色捧下記)」등을 바탕으로 하여 분석해야 한다.
  그리고 세출은 일부를 경사(京司)에 상납하였는데 기영복호전, 정비전, 경기 6역의 입거목대전 등으로 지출되고 나머지는 각종 공공 경비인 관용(官用), 입마가(立馬價), 입마둔답(立馬屯畓) 매입비용, 사신 영송비, 찰방 교체시 접대 비용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3) 요성역(요城驛)의 유래와 운영 규모

  요성역의 유래와 위치

  요성역은 유곡역과 마찬가지로 고려시대 상주도(尙州道)에 속한 역으로서 조령 아래에 설치되어 초참(初站)의 기능을 함으로써 영남지방과 경기지방의 교통 요지에 있는 역이었다.「유곡도역지급사례등보책(幽谷道驛誌及事例騰報冊)」에 따르면, 조령 영하(嶺下)의 초참(初站)은 요성역이며, 여기서부터 3개로 나뉘어 순영으로 통하는 길은 중도참(中道站)으로 덕통-낙원-낙동-연향-상림역이고, 통영과 우병영으로 통하는 길은 우도참(右道站)으로 낙양-낙서-장림-낙평-안곡-구미역이고, 좌병영과 수영, 내영(萊營)에 통하는 길은 좌도참(左道站)으로 대은-수산-지보-안계-쌍계-소계역에 이르는 길이었다.
  이와 같은 교통 요충지에 설치된 요성역은 고려시대 유곡역과 연계되어 그만큼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고려의 유명 시인 이규보의 시에 “유곡의 한밤을 술에 취해 자고, 요성에서 한나절 멍에 맨 말을 풀고 머물다”고 한 바에 의하면 대개 유곡역에서 숙박을 하고[이를 숙참(宿站)이라 함] 요성역에서는 다만 지나가면서 쉬었다 갈[이런 경우 과참(過站)이라 함] 정도의 간이역 수준이었던 것 같다.
  고려시대의 요성역은 조선시대에도 명칭은 그대로 계승되어 유곡도의 속역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그 위치는『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문경현의 동쪽 2리에 있다고 하였으나,『여지도서』에서는 현의 동쪽 4리라 하였으며 옛 지도에서 볼 수 있듯이 문경현 향교 방면에 위치하고 있다. 이 지역은 오늘날 문경시 문경읍 요성리에 해당된다.

  요성역의 운영 규모

  요성역의 규모는『유곡도역지』(1871)에 의하면 마단(2칸), 도장(都掌) 1명, 부장(副掌) 1명, 방호(防戶) 9명, 발졸(撥卒) 12명, 급주(急走) 10명이었다. 여기서 발졸은 아마도 파발제 시행 후 설치된 요성참(요城站)에 배정된 파발군이라 생각된다. 역마는 상등마 2필, 중등마 2필, 하등마 6필로 모두 10필이었으며,『유곡역관련고문서집』의「본각역삼등마안(本各驛三等馬案)」에 의하여 요성역의 마호와 역마 등급 및 종류를 살펴보면, 역마 1필당 1명의 마호가 배정되어 대마 2필, 중마 4필, 복마 4필을 사육하고 있으며, 말의 종류는 털 빛깔에 따라 적다(赤多, 붉은 색), 유마(馬,붉은 바탕에 흙갈기 꼬리마), 고라(古羅, 황색)이며 말의 나이는 모두 일곱 살이다.
  역전 규모는 공수전은 대체적으로 14결86부5속으로 역의 관봉(官俸)에 사용되었으며, 마위전은 총 900두락 가운데 200두락은 냇가로 변하였으며[成川], 50두락은 모래밭이 되어[覆沙] 결국 현재 경작하고 있는 토지는 650두락으로 대개 역마 구입에 충당되었다. 복호결(復戶結)은 41결16부3속으로 입마가(立馬價)에 사용되었다.

2. 문경지역의 원

  1) 조선시대의 원의 설치와 운영

  원의 유래

  원(院)이란 원우(院宇)라고도 하는데 역과 달리 일반 상인이나 여행자들의 숙식을 위해 설치된 여인숙으로서 상업과 민간 교통의 발달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원의 유래는 역이 신라 소지왕(炤知王) 때 이미 설립된 것으로 보아 고대 국가의 정치 체제가 확립되면서 설치되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문헌 기록상으로는『신증동국여지승람』의「경주부 역원조」에 의하면 대로원(大櫓院)이 신라 김생(金生) 생존시(8세기 중엽)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9주 5소경제가 수립되면서 중앙과 지방 간의 행정 및 도로의 요충지나 고갯길 또는 하천변에 여행자를 위한 숙박 시설이 설립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고려시대에 이르러 역참제의 확립과 주점(酒店)의 설치, 그리고 불교가 발달하면서 사원 근처나 교통상의 요지에는 불교식 이름을 가진 원이 많이 설치되었다. 고려시대 불교는 국가의 비보 사찰로서의 역할을 하면서 성행하게 되었고, 수공업이나 사원전의 경작을 통한 잉여 생산물의 유통으로 사원이 사원 참배를 위해 왕래하는 일반인은 물론 상업에 종사하는 상여(尙旅) 및 여행자들의 숙식 제공처로서 역할을 하였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타나고 있는 직산(稷山)의 홍경원(弘慶院), 개성(開城)의 천수원(天壽院)은 사원(寺院)의 후신이었으며, 각 읍의 원 이름을 보면 대사원(大寺院), 선원(禪院), 대비원(大悲院), 보통원(普通院), 도솔원(도率院), 미륵원(彌勒院) 등 불교식 이름이 많다. 그뿐만 아니라 원의 설립자 중에서 승려도 있었다. 선초에 이르러 승려를 원주(院主)에 임명하거나 원우를 보수케 하고 있는 것은 후세의 원이 사원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반증하고 있다. 이러한 사원이 원으로 바뀌게 된 것은 아마도 여말선초 신흥 사대부가 등장하면서 억불숭유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사찰을 대대적으로 정비한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보겠다. 유불 교체 시기 사원의 정비속에서 승려들을 원주 또는 원의 관리자로 활용하는 정책 정환을 하였던 것이다.

  원의 확립과 운영

  조선왕조는 도로 교통상의 요지에 진(津)·관(關)을 설치하고, 읍치(邑治) 부근에는 객관(客館)을 건립하여 관리 및 여행자들에게 숙박을 제공하였으며, 공무(公務)로 왕래하는 중요 도로변에는 역참(驛站)을 신설하거나 정비하여 교통·통신망을 확립함과 아울러 원을 공적(公的) 숙박 기관으로 개편하게 되었다. 특히 여말 선초에 이르러 몽고 및 홍건적의 침입과 왜구의 창궐로 피폐해진 원을 복구,재정비하게 되었던 것이다. 태조 6년에 편찬된『경제육전(經濟六典)』에 원의 보수, 원주의 차임, 원우의 유지에 관한 여러 규정이 기록된 것에서 알 수 있다.
  특히 세종대에 이르러 원의 정비가 대대적으로 시행되었다. 세종 7년(1425) 각 고을에 명하여 승속(僧俗)을 물론하고 착한 사람을 뽑아 원주로 삼고 지로(指路)와 거화(擧火) 등의 일에 전심하여 행인을 돕도록 하거나 도성 밖의 10리에 있는 원은 한성부로 하여금 수리하고 홍제원(弘濟院)의 예에 따라 토지를 지급하였고, 세종 10년(1428)에는 원주의 잡역을 면제해 주었으며, 세종 22년(1440) 11월에는 평안도 희천(熙川)에서 여연(閭延)에 이르는 지역의 원을 영건케 하고 도로를 평탄하게 보수하였다. 이러한 여러 가지 시책을 추진한 결과『경국대전』에 다음과 같은 규정을 둠으로써 제도적인 확립을 보게 되었다.
  첫째, 원우는 도성의 성밖은 5부에서, 외방의 원은 수령이 관리하며, 원 부근의 백성을 원주로 삼아 수리케 한다. 둘째, 도성에서 개성, 죽산, 직산, 포천 등 대로의 원에는 원주 5호를, 도성에서 양근, 죽산에서 상주, 진천에서 성주, 직산에서 전주 등 중로에는 3호, 소로에는 2호를 배정하고 잡역을 면제한다. 셋째, 원위전(院位田)은 자경무세(自耕無稅)이며, 대로에는 1결 35부, 중로에는 90부, 소로에는 45부씩을 지급한다. 넷째, 원주에는 보인(保人) 3명을 지급하고 타역에 종사하지 못하게 한다.
  이러한 규정 위에 조선시대의 원은 확립되었으며,『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에 원우(院宇) 항목이 기록되고,『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역원(驛院) 항목이 추가되는 등 원의 명칭과 분포 및 소재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전국의 원 수는 모두 1,309개나 설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원은 임진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쇠퇴하거나 혁파되었고, 상업과 유통경제가 발달하게 되자 참(站) 또는 주점(酒店)·여점(旅店), 그리고 주막(酒幕)으로 개편된 경우도 있다. 유형원의『반계수록』에 의하면 “참(站)이 있는 곳에는 원(院)이 있으며, 참점(站店)은 속칭 주막(酒幕)이라고 한다” 라고 한 것은 그것을 잘 말해 주고 있는 한 예이다.

  2) 문경지역의 원

  문경 지역에도 예외 없이 원이 설치되어 여행자에게 숙박을 제공하고 통행의 편의를 도모하였다. 권근(權近)이 쓴「견탄원기(犬灘院記)」에 “나라에서 역(驛)을 설치하여 사명(使命)을 전하고 원(院)을 두어 상인과 행인에게 혜택을 주되 공과 사의 구별, 상과 하의 구별이 분명하였다. 그러므로 역에는 각각 관리가 있어 그 직책에 힘썼으나 원에는 다만 밭을 주고 사람을 모집하여 주관하게 했을 뿐이다”(『신증동국여지승람』권29,「문경현 견탄원」)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문경 지역에는 새재원, 요광원, 관음원, 관갑원, 회연원, 개경원, 불정원, 보통원, 동화원, 견탄원, 화봉원이 건립되었다. 영조대의『여지도서』「문경현조」에 의하면 거의 큰 변화 없이 존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령원(鳥嶺院, 조령 동쪽), 요광원(要光院, 요성의 서쪽), 관음원(觀音院, 계립령 아래), 관갑원(串岬院, 관갑 북쪽), 회연원(回淵院, 용연 위), 문경원(聞慶院, 호계현 서쪽), 불정원(佛井院, 호계현 서쪽), 보통원(普通院, 호계현 남쪽 45리), 동화원(桐華院, 문경현 서북쪽), 견탄원(犬灘院, 견탄 북쪽), 화봉원(華封院, 초곡원,문경현 남쪽)이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이들 원의 전모를 상세하게 알 수 없다. 따라서 기록에 전하는 일부 원에 대해서 간략히 설명하고자 한다.

  조령원(鳥嶺院)과 조령(鳥嶺)

  조령원은 흔히 새재로 잘 알려진 조령에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조령산성 안의 제1관문에서 제2관문 사이에 있다. 조령은 ‘문경새재’라 하여 일찍이 삼국시대부터 영남지방과 기호지방을 잇는 중요 교통로 상에 있는 요충지였다.
  조선시대 태종 14년(1414)에 조령로를 관도(官道)로 개통시킴으로써 이 조령로는 교통로 및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시되었다. 그리하여 숙종대에 이르러 이와 같은 조령에는 이른 바 초곡성(主屹關, 제1관문), 중성(제2관문), 조령산성(鳥嶺關, 제3관문)을 축조함으로써 관방(關防)으로서뿐만 아니라 교통상의 요충지가 되었다. 따라서 이곳에 통행인을 위한 숙박 시설을 설립하였으니 조령원, 동화원, 요광원, 관음원, 화봉원이었다. 그 중 조령원은 고려시대에는 초점원(草岾院)이라 하였는데 조선시대에 와서 조령원이라 하였다.
  최근에 조령원터로 추정되는 곳을 1977년 두 차례에 걸쳐 발굴하게 되었는데, 발굴 보고서에 의하면 고려시대의 온돌유지가 노출되었으며, 와편,토기편,자기편,어망추,철제 화살촉,마구류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석문과 석담의 축성 방식이 동로면 명전리의 작성(鵲城)과 유사하며 석문은 방형석주(方形石柱)이다. 한편 제2관문에서 제3관문 사이에 동화원이 있다. 원래 동화원은 문경현 서북쪽 15리쯤에 있었는데, 높은 곳에서 보면 해가 뜨는 곳이 보이고 산에 핀 꽃이 화려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이 동화원에서 조령관까지는 약 1.2㎞이다. 1970년대 이전에는 화전민이 많이 거주하여 조령초등학교 분교가 있었으나 터만 남았으며 동화원 역시 조령원과 마찬가지로 여행객을 위한 숙박처였다.

  견탄원(犬灘院)과 견탄(犬灘)

  견탄원은 견탄 북쪽에 있는 원이다. 견탄은 호계현의 서쪽 5리에 있으며, 용연(龍淵)의 하류이다. 또한 일찍이 이곳에는 나루의 하나인 견탄진(犬灘津)이 있었던 곳이다. 견탄원의 유래에 대해서는 앞에서 언급한 권근의「견탄원기」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경상도는 남쪽에서 가장 크며, 서울에서 경상도를 가려면 반드시 큰 재를 넘어 약 백리 길 산 사이를 가야 한다. 여러 골짜기의 물이 모여 냇가를 이루어 관갑에 이르러 비로소 커지는데, 이 관갑이 가장 험한 곳이어서 낭떠러지를 따라 사다리길을 열어 사람과 말이 겨우 통행한다. ……몇 리를 나아간 뒤에야 평탄한 길이 되어 그 냇가를 건너는데 그것이 견탄이다” 라고 견탄의 유래를 말하고, 이어서 견탄원의 건립 배경과 운영 실태를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다.
  “견탄은 호계현의 북쪽에 있는데, 나라에서 제일가는 요충이요, 경상도에서 가장 험한 곳이다. 여울 위에 전하는 원(院)이 있었으나 지금은 퇴락한 지 오래되어 길손이 쉴 곳이 없다. 화엄대사 진공(眞公)이 일찍이 이곳을 지나다가 개탄하여 퇴락한 것을 다시 일으키려고 곧 그의 제자들을 거느리고 띠를 베어 거처할 집을 짓고 또 길손을 접대해 가면서 여러 사람을 잘 달래어 재물과 사람의 힘을 모아 재목을 찍고 기와를 굽는 등 공사를 일으켜서 몇 칸 집을 세워 걸어다니는 길손이 머물러 자는 곳으로 하였다”라고 하여 아마도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원이 여말에 퇴락하자 선초에 화엄대사 진공이 다시 수리하여 견탄원을 건립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리하여 견탄원은 가장 험난한 산 속에 건립되어 통행하는 여행객들에게 숙박의 편의를 제공함으로써 짐승으로부터의 두려움이나 도적들로부터의 걱정을 덜어주어 공덕보은지설(功德報恩之說)의 불덕을 실천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화봉원(華封院)과 민광문(閔光文)

  화봉원은 문경현 북쪽 4리쯤에 있는데, 속칭 초곡원(草谷院)이라 한다. 아마도 이 초곡원은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원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고려시대 유희(劉曦)의 시에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즉 “벼슬에서 좌천되어 남녘으로 16역(驛)을 지나 오늘 아침 비로소 경상도의 경계를 밟았다. 요성 근처 두어 마장 되는 곳에 궁벽한 군 하나 있으니 문경이라 한다. 군 변두리에 새 원(院)집 형세 매우 엄숙하여 찬란하게 금빛과 푸른빛이 뒤섞여 비치는데 동쪽의 작은 누각이 더욱 기관(奇觀)이라. 훌륭한 글 옛 팔영(八詠)을 압도한다. 아름답도다. 이 집 누가 지었는고. 그 이름은 광문(光文)이요, 성은 민(閔)씨로다. 내가 민공 문하의 사람이었는데 이제 이 건물 창건한 것을 보고 더욱 공경하네” 라고 술회하고 있는 데에서 고려시대 초곡원은 아마도 민광문(閔光文)이 창건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초곡원은 ‘찬란하게 금빛과 푸른빛이 뒤섞이어’ 누각이 기관(奇觀)일 정도의 상당한 규모였던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이상 살핀 바와 같이 문경현의 경내에는 무려 11개나 되는 원이 설치되어 행인에게 숙식의 편의를 제공함으로써 영남 지역과 기호 지역을 잇는 조령로가 군사로, 교통로로서의 역할을 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던 것이다.

 문경의 고갯길과 관방유적

박상일(청주대학교 박물관 학예연구실장)

문경새재는 소백산맥을 넘나드는 가장 대표적인 고갯길이다. 소백산맥은 곧 우리나라의 중서부 지방과 영남 지방을 가르는 분수령이며 문경새재는 그 중심에 있다.

1. 머 리 말

  경상북도 문경 고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문경새재이다. 문경새재는 소백산맥을 넘나드는 여러 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고갯길이다. 소백산맥은 곧 우리나라의 중서부지방과 영남지방을 가르는 분수령이며 문경새재는 그 중심에 있다. 영남(嶺南)이라는 지역 이름 자체가 문경새재, 즉 조령(鳥嶺)의 남쪽이라는 뜻이다. 소백산맥을 언덕 삼아 그 남쪽 언저리에 자리잡은 문경은 영남대로(嶺南大路)라 칭해지는 새재길을 끼고 있는 교통의 요지이다.
  문경의 역사 발전과 변천, 그리고 수많은 사건들은 영남대로의 중심인 새재길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수밖에 없으며, 오늘날까지 곳곳에 남아 있는 유적들을 통하여 당시의 상황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문경시의 지세를 살펴보면 시의 서쪽과 북쪽에 태백산맥에서 흘러나온 소백산맥이 뻗어내리며 북쪽의 충청북도와 경계를 이루었는데, 서쪽으로부터 괴산군·충주시·제천시·단양군과 접하고 있다. 이들 지역과는 소백산맥이라는 천연의 장벽으로 막혀있어 역사적·지리적 배경이 다르나 상호 왕래가 잦았으므로 문화적으로는 유사한 면도 많다. 남쪽으로는 같은 경상북도의 상주시가 남서쪽에 접해 있고 예천군이 동남쪽에 접해 있다.
  소백산맥에서 보면 문경은 그 남사면에 위치하며, 황장산(黃腸山,1077m)· 주흘산(主屹山,1106m)· 백화산(白華山,1063m)· 조항산(鳥項山,951m)· 도장산(道藏山,827m)· 공덕산(功德山,912m) 등 높이 1,000m 내외의 높은 산지가 마치 병풍을 둘러친 것 같은 험준한 산악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소백산맥을 남북으로 넘나드는 여러 갈래의 고갯길이 있어서 일찍부터 영남과 서울을 잇는 통로로 이용되어 왔다. 이 가운데 가장 이름난 새재〔草岾,鳥嶺〕가 있고, 그 동쪽에는 보다 평탄한 길인 계립령(鷄立嶺)이 있으며, 서쪽에는 최근에 터널을 뚫어 길을 새로 낸 이화령(伊火嶺,543m)이 있다. 문경은 이들 고개 사이의 높은 산 아래의 고을이다. 소백산맥의 줄기가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점차 낮아져 점촌·산양면·영순면 등에 이르면 구릉성 산지로 바뀐다. 이들 산지 사이에 금천(錦川)과 조령천(鳥嶺川)이 흐르는데, 영강(潁江)과 합류하면서 영순면과 산양면 지역에 들어서면, 주변에 띠 모양의 길고 좁은 약간의 평야지대를 이루면서 영순면 남쪽에서 낙동강에 유입된다.
  즉, 문경은 낙동강의 맨 북쪽 끝이 되며, 천연의 장벽인 소백산맥을 넘어 그 북쪽에 있는 남한강으로 연결되는 교통상의 요지라 할 수 있다. 소백산맥 너머 충북의 충주 지역과 비슷한 지리적 위치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낙동강과 남한강을 연결하는 통로가 바로 영남대로가 통하는 문경새재이며, 그 동·서쪽의 계립령과 이화령 역시 시대는 약간 다르지만 매우 중요한 교통로로 이용되었다.
  조선시대에 관문이 설치된 이후 조령이 소백산맥의 모든 고갯길을 대표하는 통로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이전에는 보다 평탄하고 충주의 남한강과 직접 연결되는 계립령이 더욱 중시되었으며, 일제 강점기였던 1925년에는 이화령을 넘는 신작로가 개통되어 지금의 국도 3호선이 되었고, 최근에는 고갯길 밑으로 이화령 터널까지 뚫려 더욱 많은 통행이 이루어지고 있다. 계립령과 조령, 그리고 이화령 등 조령삼로(鳥嶺三路)의 개통과 변천에 대하여 알아본 후, 이들 옛 고갯길과 관련된 관방 유적을 살펴보려고 한다.

2. 문경의 옛 고갯길

  소백산맥은 우리나라의 남부지방과 중부지방을 가르는 분수령으로서 선사시대와 삼국시대는 물론 그 이후에도 정치·군사·경제·문화·언어 등 모든 방면에서 지역을 구분하는 경계선이 되고 있다. 그러나 국가 및 지역사회의 발전은 곧 교통의 발달에서 이루어지듯이 소백산맥이 아무리 험준하여도 여기를 넘나들지 않을 수 없었다. 삼국이 우호적인 관계에서 문화를 교류하였을 평화시나 혹은 각축전을 벌이던 전쟁시기를 막론하고 천험(天險)의 소백산맥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삼국통일 이후나 고려·조선시대에도 서울 지역을 왕래하고 문물을 유통하기 위해서는 이 소백산맥을 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통로로서 뚫린 옛 고갯길은 풍기와 단양 사이의 죽령(竹嶺), 예천과 단양 사이의 벌치(伐峙), 역시 예천과 단양 사이의 저수령(低首嶺), 문경과 충주·연풍(지금의 충북 괴산군) 사이의 조령삼로, 즉 계립령·조령·이화령, 그리고 가은(加恩)과 괴산군 청천면 사이의 주항령(周項嶺), 상주와 보은 사이의 화령(化嶺), 김천과 영동 사이의 추풍령(秋風嶺)이 있다. 그 남서쪽으로 지리산까지 연결되는 소백산맥의 남부 역시 영·호남이 통하는 여러 갈래의 고갯길이 있는데, 그 가운에에서 무풍과 지례 사이의 마치(馬峙), 남원과 운봉 사이의 여원치(女院峙), 또 운봉과 함양 사이의 팔량치(八良峙), 역시 운봉에서 구례로 가는 정치(鄭峙) 등이 유명하다. 근래에는 철도와 국도·고속도로 등이 생김에 따라 없어지거나 잊혀져 가는 길도 있으나, 예전에는 모두 중요한 교통로였으며 그 길목의 곳곳에는 각종 유적이 남아 있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이러한 여러 고갯길 가운데 문경으로 통하는 길은 계립령·조령·이화령 등 조령삼로와 함께 가은에서 괴산군 청천으로 가는 주항령과 예천 땅을 거쳐 단양 방면으로 가는 벌치가 있다. 그러나 조령 등 일부를 제외하고는 옛 고갯길들에 대한 문헌의 기록은 매우 희박하다. 조선시대의『지리지』에 그 명칭이나 위치 등이 겨우 기록되어 있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도로를 중시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는 중앙집권체제가 인정되면서 전국의 도로망을 정비하였는데, 수도를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김에 따라 개성 중심의 도로망을 한양 중심으로 개편하였다. 우선 신도궁궐조성도감을 설치하여, 도성 내의 도로 설비는 물론 전국의 도로망도 한양을 중심으로 재정비하였다. 조선 초기의 도로정책은 집권체제의 수립을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마련된 것이었기에 그것은 역참제도(驛站制度)의 정비로 집약되었다. 전국의 도로망은 역참에 의하는 조운(漕運) 쪽이 더 컸다. 따라서 조선 초기의 역참은 사회·경제상의 의미를 지닌 상업도로로서의 기능보다는 군사·행정상의 통신기능을 지니고 정비되어 갔다. 역로(驛路)가 군사·행정상의 통신기능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국가의 우편·통신만을 의미할 뿐, 민간 통신의 개념은 거의 배제되어 있다. 즉 역로는 국가의 신경조직에 비유되는 바, 봉수제도와 함께 왕권을 정점으로 하는 통치집단이 지방에 명령을 하달하고, 지방관이 통치자에게 보고서를 전달하는 수단으로서, 또는 변방의 비변(備邊)에 관한 정보 보고라는 군사적 의미에서 존재하였다. 그리고 중국과의 외교관계의 필요성에서 사행로(使行路)의 구실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도로의 방향이 지방행정 중심지이나, 군사지역을 제외한 여타 지방에 대해서는 거의 고려되지 않았다는 점을 볼 때 그것은 한마디로 관로적(官路的) 성격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대표적인 관로는 신의주와 중국으로 통하는 서북로와 함께 부산과 일본으로 통하는 영남로였다. 문경은 바로 영남로의 중간 노정에 해당되며 소백산맥은 넘나들며 잠시 머무를 수밖에 없는 지리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조선 후기의 언어학자이자 지리학자이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도로학자라 할 만큼 산천과 도리(道里)에 밝았던 신경준(申景濬)이 지은『도로고(道路考)』에 의하면, 전국의 6대 도로망 가운데 문경새재를 지나는 도로는 제4로인 동래로(東萊路)에 해당된다. 그 노정을 보면 한성(漢城)을 출발하여 한강(漢江), 판교(板橋), 용인(龍仁), 양지(陽智), 충주(忠州), 안부역(安富驛,지금의 수안보)을 거쳐 조령(鳥嶺), 동화원(桐華院), 초곡(草谷), 문경(聞慶), 신원(新院), 유곡역(幽谷驛)을 지나서 계속 남쪽으로 내려가 대구(大邱), 청도(淸道), 밀양(密陽), 양산(梁山), 동래(東萊), 부산진(釜山鎭)에 이르게 되는데, 이 가운데 문경 지역을 지나는 구간은 조령부터 유곡역에 이르는 구간이다.
  이밖에 조선시대의 각종 지도에는 서울을 중심으로 하여 전국으로 뻗어나간 도로와 일정(日程) 및 이수(里數)까지 표시하였는데, 대부분 간선도로를 기본으로 하여 그 사이에 연결되는 지선들까지 거미줄처럼 그려 넣었다. 그리고 조선시대의 도로망을 가장 정확하고 자세히 기록한『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의하면, 전국의 가장 긴요한 도로를 9대대로 정하였는데, 이들 가운데 제4로와 제5로의 간선이 문경을 지나고 있다. 노정은 신경준의『도로고』와 일치하는데, 제5로의 노정은 서울서 문경까지는 제4로와 같고, 문경의 유곡역에서 상주 쪽으로 돌아 성주(星州), 현풍(玄風), 함안(咸安), 진해(鎭海), 고성(固城)을 거쳐 통영(統營)까지 가는 길이다.
  그런데 현지를 답사해 보면 제4로와 제5로가 지나던 조령로보다는 계립령이 보다 평탄대로임을 느낄 수 있으며, 이밖에 벌치와 주항령 역시 쉽게 넘나들 수 있는 편안한 고갯길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어떤 고갯길이나 모두 중시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며 그 길목을 지키기 위한 관방시설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오늘날 남아 있는 관방 유적들이 이를 증명해 준다.

  1) 계립령 길

   문헌기록상으로 소백산맥에서 가장 먼저 개통된 길은 계립령이다.『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아달라왕(阿達羅王) 3년(156) 4월에 비로소 계립령 길이 개척되었고, 2년 후에 죽령 길이 개척되었다. 당시 신라에서 소백산맥을 넘는 고갯길은 동쪽 길이 죽령 길이고, 서쪽 길은 상주와 보은 사이의 화령 길이 있고, 중간 길은 계립령 길이다. 계립령 길은 문경의 동쪽 계류인 신북천(身北川)을 따라 포암산(布岩山)으로 오르는 길목의 당포리-용연리-갈평리와 관음리의 황점-사점-관음-포암 마을을 지나 소백산맥의 주능선이며 경북과 충북의 경계인 고도 525m의 속칭 하늘재를 넘는 길이다. 그리고 하늘재에서 충북 쪽으로는 미륵리를 거쳐 송계리-역리-황강나루로 이어져 충주를 지나 서울로 향하게 된다. 계립령은 마목현(麻木峴)· 마골점(麻骨岾)· 마골산(麻骨山)으로도 기록되어 있으며 고려시대에느 대원령(大院嶺)이라는 명칭으로 나타난다. 대원령은 곧 지금의 하늘재이고, 마목현· 마골점· 마골산 등은 지금의 미륵리에서 수안보로 넘어가는 속칭 지릅재를 지칭하는데 하늘재와 지릅재는 중간쯤에 미륵리 마을의 분지가 약간 있을 뿐으로 크게 보면 하나의 고갯길이라 할 수 있다.

  2) 조령 길

   조령 길 즉 문경새재 길은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관광지로 잘 알려져 있다. 조령 길의 개척 시기는 사료의 기록에서 찾을 수 없다. 단지 조선 초의 태종대에 길이 뚫렸다는 전설이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조령원(鳥嶺院) 터에서 통일신라 혹은 이전 시기의 토기 조각과 고려·조선시대의 유물이 발견되는 것을 보면 조령로 역시 일찍부터 통행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령이 사료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이미 통일신라 말기로, 징효대사(澄曉大師)가 진성여왕 5년(891)에 상주의 남쪽으로 피난하러 가다가 조령에서 잠시 머물렀다는 내용이 영월(寧越) 흥녕사(興寧寺)에 있는 그의 탑비문(塔碑文)에서 보인다. 그후 조선 초기에는 초점(草岾)이라는 명칭으로도 나타나는데, 초점은 곧 조령의 다른 이름이다.
  고려 후기에 조령은 공민왕(恭愍王)의 피난길이 되기도 하였으며, 경상도의 동북지방을 제외한 모든 조세가 운반되어 충주로 향하는 운송로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왜군이 이 길을 통하여 서울로 진입하였다. 이로부터 조령의 방어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어 선조 27년(1594)에 오늘날의 제2관문 자리에 성을 쌓았고, 그 후에도 조령의 군사적 중요성이 계속 강조되어 숙종 34년(1708)에 이르러 3중의 관문이 완성되었다.

  3) 이화령 길

   이화령은 1925년 신작로로 개척되어 지금의 국도 3호선이 되었다. 이 길이 뚫리면서 문경에서 소백산맥 북쪽으로 통하는 가장 중요한 고갯길이 되었는데, 최근에 터널이 완공됨으로써 고갯길로서의 역할은 크게 감소되었으나 현재 추풍령, 죽령 다음으로 교통량이 많으며 해발 535m의 비교적 낮은 고갯길이다. 문경 읍내에서 진안리까지는 조령 길과 함께 통하고, 진안리에서 서편으로 각서리를 지나 이화령으로 오르고 고갯마루에서는 조령산 서북쪽 산허리를 돌아 옛 연풍현과 수안보를 거쳐 충주에 이르게 된다. 이화령의 개통에 대한 사료는 없으나 조령이 중요한 교통로의 역할을 하던 조선시대까지는 그리 중요한 길은 아니었으며 일제 강점기에 신작로를 건설한 이후 급속히 통행량이 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화령은『지리서』에 이화현(伊火峴)· 이화령(伊火嶺 또는 梨花嶺)으로 표기되었다.
  결과적으로 문경에서 소백산맥을 넘는 길은 고대에는 계립령, 고려·조선시대에는 조령, 근대에는 이화령으로 시대가 변하면서 남서쪽으로 점차 옮겨진 것을 알 수 있다.

3. 문경지역의 관방유적

  1) 하늘재 산성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와 충북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해발 961m의 포암산(布岩山)과 해발 925m의 부봉(釜峰) 사이의 안부(鞍部)인 해발 525m의 하늘재를 막아 쌓은 행성(行城) 형태의 석축산성이다.
  사료의 기록은 없으나 죽령과 함께 신라의 북진로였던 이곳 계립령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되었던 산성으로 보인다. 계립령은『삼국사기』에 신라 아달라왕 3년 4월에 개척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신라측에서 북쪽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는 한편 북방 진출을 위한 통로로서 일찍부터 계립령을 중시하였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현존하는 석성이 계립령의 개척 시기인 2세기에 축성되었다고 할 수는 없으나 이 성을 신라측에서 쌓았음은 하늘재 정상부에서 서쪽으로 250m 정도 아래에 설축한 것으로 보아서 알 수 있다. 대략 신라의 북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6세기 이후에 축성되지 않았을까 추측되며, 훨씬 후대인 고려 후기 몽고의 칩임 때 이 일대에서 공방전을 벌인 것으로 볼 때 고려후기에 축성하였거나 그 이전부터 있던 산성을 이용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하늘재와 4㎞ 정도 떨어진 미륵리 서쪽의 지릅재에서 신선봉(神仙峰)을 거쳐 조령 3관문 사이에 있는 석성과도 서로 연관되어 신라의 북변을 방어하도록 구축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하늘재 남쪽, 즉 부봉쪽 산기슭에 쌓은 성벽의 일부가 없어져서 전모를 알 수 없고 오직 포암산의 암벽 아래에서 시작된 690m 정도의 성벽만이 확인 되는데 협축(夾築)으로 높이 3.7m, 너비 2.4m 정도이다. 그밖에 벽 주위에서 신라계의 토기편이 약간 수습될 뿐이다.
  미륵리 마을 주변에는 고구려 온달(溫達) 장군의 공깃돌이라 전해지는 둥근 바위와 온달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고분 등이 있어 주목되는데, 이는 하늘재산성이 신라 북진의 거점과 전초기지가 되는 동시에 죽령과 계립령 이북의 옛 영토 탈환을 위해 결사남진(決死南進)한 온달의 최후 목표가 되었던 최종 보루였음을 나타내주는 것이기도 하다.

  2) 조령산성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에 있는 조령 길의 관문성이다. 문경에서 충주로 가는 요충으로 계립령과 함께 일찍부터 주목된 고갯길이다. 그러나 관방의 설치는 계립령이 폐하여진 이후로 임진왜란 중인 조선 선조 26년(1593) 6월에 처음으로 논의되었다. 선조가 안주(安州)에 머무르던 중에 명나라 군의 수뇌들과 만났을 때, 경략(經略)이 조령에 관방을 설치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하였으며, 유원외(劉員外)는 서울을 지키려면 먼저 조령을 지키지 않으면 불가하다고 하였다.
  이때 조선에서는 조령이 비록 험한 요새이긴 하지만 조령 이외에도 소백산맥을 넘는 고갯길이 많기 때문에 이들을 모두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명나라측에서는 신립(申砬)장군이 조령과 같은 험로를 버리고 충주에서 적을 맞이한 실책의 예를 들며 조령에 설관(設關)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 후에도 몇 차례 접촉하면서 이 문제를 상의하였으나 명과 조선의 태도가 매우 달랐다. 그러나 결국은 설관이 계획되어 도면이 완성되고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이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였으며 충주의 수문장 신충원(申忠元)이 약간의 민정(民丁)을 모아서 관방을 축조하였다. 유성룡은 선조 27년(1594) 2월에 조령을 막는 일이 시급함을 주장하면서 신충원의 말을 빌려 조령의 형세를 선조에게 설명한 바 있다. 즉, 조령은 잡로(雜路)가 많아 지키기 어렵고, 고개 위에서 동쪽으로 10리쯤 아래에 양쪽으로 단애가 있고 가운데로 계곡물이 흐르는데 행인들이 나무를 걸쳐서 다리를 만든 것이 24군데나 된다. 또 응암(鷹巖)이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에 설관하여 파수를 보다가 적병이 이곳에 이르렀을 때 다리를 철거하고 또 계곡물을 막아두었다가 큰물을 터놓으면 사람은 발을 붙이지 못할 것이고 궁노(弓弩)· 능철(菱鐵)· 화포 등으로 수비하면 불과 백여 명의 날랜 군사로도 고갯길의 파수는 공고해질 것이라고 하였다. 신충원은 곧 사람을 모아 성을 쌓았으니 선조 27년 10월의 일이며, 3년 후인 선조 30년(1597) 2월 신충원이 파수관으로 임명되어 응암에 일자성(一字城)을 쌓고 가운데 문을 세우고 고개 밑을 내려다보게 하는 축성이 끝났다. 당시에 쌓은 것은 오늘날 응암 근처의 제2관문이 있는 중성(中城), 즉 조곡관(鳥谷關)이다.
  임진란 이후 이 성은 많이 붕괴되었으며 현종 14년(1673)에 수어사 이완(李浣)이 조령에 영진(營鎭)을 설치하고 산성을 쌓아 남한산성에 소속된 충주군(忠州軍) 3,900인을 이곳에서 지키도록 하자는 이른바 ‘민병지법(民兵之法)’을 주장하였다. 이완의 주장은 결국 당장에 실현을 보지는 못하였으나 숙종대에 이르러서 다시 구체적인 관방시설의 보수로 나타나고 있다. 숙종 10년(1684) 이후 수차에 걸쳐 조령의 설관 문제가 논의되어 마침내 숙종 35년(1709)에 조령산성이 축조되었다.이때 3중의 관문을 완성한 것이다. 제1관문이 주흘관(主屹關), 제2관문이 조동문(鳥東門) 혹은 조곡관, 제3관문이 조령관이다. 제1관문이 양쪽에 뻗은 성이 초곡성(草谷城)이고 조령의 고갯마루에 쌓은 제3관문의 성이 조령산성이며, 제2관문의 성은 중성이라 불린다. 이들은 고종 27년(1890)에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으며 관문에는 홍예문을 축조하고 문루를 세웠다. 성벽에는 총안(銃眼)이 있는 성가퀴가 설비되고 한쪽에 수구가 설치되었다. 제1,2,3관문은 양쪽이 산으로 막힌 계곡 쪽에 위치하며 관문 좌우의 성벽은 능선을 따라 우회하여 높이 솟은 산봉우리 6부 능선쯤에서 끝났다가 다음 골짜기로 이어지고 있다.
  축성 후 3년이 지난 숙종 38년(1712) 5월에 서종태의 보고에 의하여, 수마석(水磨石)과 잡석으로 쌓아 성의 반이 넘게 무너졌음을 알 수 있다. 영남어사 여광주에 의하여 수보(修補) 논의가 제기되고 국가 존망이 달린 막중한 곳이라 경성(京城)의 수보 규칙에 따르자고 진언하였으나 시행되지 못하였다. 주흘관의 향우측(向右側) 성벽의 각기(刻記)에 의하면 별장 이인성이 1721년에 개축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그 아래의 각기에는 도석수(都石手) 송성원, 이영우, 강두정 등이 있으니 앞의 성벽 각기에 기록된 것으로 보아 개축 또는 축성할 때 기여한 도석수로 짐작된다. 주흘관 중수기에 의하면 영조 28(1752), 영조 48(1777), 헌종 6년(1840)에 중수한 기록이 있다. 주흘관의 향우측 성황사(城隍祠) 부근의 각기에는 무진년(戊辰年,1748년 또는 1808년으로 추정됨) 3월에 별장 오해림 등이 개축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주흘관 향좌측 성벽 각기에는 고종 17년(1880) 별장 심영식 등의 개축 사항을 알 수 있으며, 주흘관 향우측 성벽 각기에도 고종 23년(1886)에 별장 김순기 등이 개축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성벽에 새긴 몇 자로 개축한 규모에 대해서는 알 수 없어 아쉬움이 있으나, 박성호라는 사람이 1880년에는 감역(監役)으로, 1886년에는 감관(監官)으로 승진하여 성곽을 보수하는데 참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등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산성에 대한 개략적인 내용은『여지도서』를 비롯한 조선 후기의 각종 지리지에 나타나고 있는데, 성은 남북 18리로서 둘레가 18,509보(步)라 하였다. 그리고『대동지지』에는 조령산성에 영조 27년(1751) 별장을 두고 문경과 함창의 군사를 이곳에 소속되게 하여 문경현감으로 하여금 수성장(守城將)을 겸직시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 산성 안에는 군량창고와 동화원(桐華院)· 조령원(鳥嶺院)· 교귀정(交龜亭) 등이 있었으며 제1관문을 들어서서 오른쪽 계곡을 따라 약 1㎞ 올라가면 주흘산 중턱에 혜국사(惠國寺)가 있다.
  1907년에 의병이 조령산성 안에 은거하였으므로 일본 헌병대가 출동하여 산성을 불태우고 파괴하였다고 하며, 조선 말에 충주-문경 간의 전선을 가설할 때 조령에 가설된 선이 산신령의 방해로 소통되지 않아 부득이 이화령으로 옮겼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근대에 들어 조령이 폐하여지고 이화령이 중요한 교통로가 된 데 따른 전설로 생각된다.

  초곡성

  남쪽의 적을 막기 위하여 숙종 34년(1708)에 설관하였으며 관문은 영남제1관 또는 주흘관이라고 한다.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목조 기와집으로 양쪽에는 협문이 1개씩 있다. 홍예문은 높이가 3.6m, 폭 3.4m, 길이 5.4m이며 대문의 높이는 3.6m, 폭 3.56m, 두께 11㎝이다. 좌우의 석성은 높이 4.5m, 폭 3.4m, 길이 188m이고, 부속 성벽은 높이가 1~3m, 폭 2~4m이다. 길이는 동측이 약 500m, 서측이 약 400m로 계곡물을 흘려보내는 수구문이 있으며 3개의 관문 중에서 옛 모습을 가장 잘 지니고 있다.

  중 성(中城)

  선조 27년(1594)에 충주 사람 신충원이 축성한 곳으로 3중의 관문성 가운데 가장 먼저 축성되었으며 관문은 영남 제2관 또는 조곡관이라고 한다. 숙종조에 관방을 설치할 때 옛 성을 개축하였으나 관은 조령성(鳥嶺城 즉 3관문)과 초곡성(1관문)에만 설치하고 이곳에는 조동문(鳥東門) 또는 주서문(主西門)을 설치하였다. 그후 1907년 훼손되어 1975년에 복원하였다. 이렇게 복원한 문루를 옛 이름대로 조동문이라 하지 않고 조곡관이라 개칭하였다.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목조 기와집으로 좌우에 협문이 2개 있다. 홍예문은 높이가 3.6m, 폭 3.56m, 두께 11㎝이다. 좌우의 석성 높이는 4.5m, 폭 3.3m, 길이 73m이고, 좌우의 성벽의 높이는 2m, 폭 2~3m, 길이는 동측이 약 400m, 서측이 약 100m이다.

  조령성(鳥嶺城)

  새재 정상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쪽의 적을 막기 위해 선조 초에 쌓고 숙종 34년(1708)에 중창하였다. 관문은 영남제3관 또는 조령관이라 한다. 1907년에 훼손되어 육축(陸築)만 남고 불탄 것을 1976년도에 홍예문 및 석성 135m와 문루를 복원하였다.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목조 기와집으로 양옆에 협문이 2개 있다. 홍예문은 높이 4.5m, 폭 3.2m, 길이 185m이고 대문의 높이는 3.9m, 폭 3.56m, 두께 19㎝이다. 성벽의 높이는 2~3m, 폭 2~3m, 길이는 동측이 약 400m, 서측이 약 400m이다.

  3) 고모산성(姑母山城)

   고모산성은 문경시 마성면 신현리 고모산에 있는 산성으로서 서쪽 맞은편에 있는 어룡산(魚龍山)의 고부산성(姑夫山城)과 마주 보고 있다. 상주·함창·점촌을 거쳐 문경으로 들어가는 길목의 동·서편에 구축한 이 두 산성은 계립령과 조령, 그리고 이화령의 남쪽에 있으며 조령천과 그 통로를 차단하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이다.
  축성 시기는 정확한 기록이 없으나 고모할미(姑母老
)와 고부할미(姑夫老)가 경쟁을 하며 하룻밤 새에 쌓았다는 전설이 있다. 고모성이 동쪽에 있는 주성(主城)이고, 고부성이 서쪽에 있는 부성(副城)이다.『여지도서』에 실린 옛 문경현 지도를 보면 문경남쪽의 상주에서 들어오는 초입의 용연(龍淵) 양편에 성곽 표시와 함께 고모성과 고부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 책의 성지(城池)조에는 고모성이 토천(兎遷)의 서쪽 단봉(斷峯) 위에 있으며, 두 골짜기가 중반(中盤)을 묶은 것 같아서 큰 내와 대로가 그 성 아래를 경유하는데 둘레가 990척으로 모두 신라 때 방어하던 곳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모산성은 오정산(烏井山,805m)의 산줄기가 남서로 뻗어 관갑(串岬)의 곶을 이루어 끝나기 직전에 옆으로 살짝 솟은 낮은 산의 능선을 따라 축조된 포곡식(包谷式)의 석축산성이다.
  성벽은 해발 231m 되는 북쪽 산봉우리를 기점으로 남동 방향과 남서 방향으로 각각 능선을 따라 내려오다가 다시 남서 방향과 남쪽으로 각각 방향을 꺾어 말굽 모양의 능선 사이 계곡에서 연결되고 있다. 산성 전체의 평면 형태는 마름모골이다.
  또 임진왜란 중에 축조한 성벽이 성의 남쪽 성벽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뻗어 옛 관도가 지나던 얕은 계곡을 가로질러 건너편 산비탈 아래에 이르러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달리다가 토천 급사면의 들목에서 끝나는데, 마치 새의 날개 모양 그대로 익성(翼城)을 이루고 있으며 이 성은 석현성(石峴城)이라 하여 별개의 성곽으로 불리고 있다.
  고모산성 전체의 지형은 북쪽과 남쪽이 높고 그 사이의 계곡이 북동에서 남서로 내려오고 있다. 따라서 성안의 빗물ㅎ은 남서쪽 저지(低地)로 모여들어 성벽 안에 축조된 배수암거를 통해 밖으로 배출되고 있다.
  본성의 둘레는 1256m, 익성 즉 석현성의 길이가 390m로 성벽의 전체 길이가 1,646m에 이르는 큰 성이다. 성벽은 북쪽 모퉁이의 산봉우리에서 남동쪽으로 내려와서 760m 지점인 남서 모퉁이까지는 협축식(夾築式)이며, 나머지의 서쪽과 북서쪽은 편축식(片築式)으로 축성하였다. 훼손이 심하여 원형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이나 부분적으로 성벽의 기초부 내지 하부의 일부가 남아 있으며 익성(석현성)은 전체적으로 잘 남아 있다.
  현재 성안으로 통하는 길은 5개소가 있는데 성문이 있었던 곳으로는 동문과 남문터가 남아 있다. 북쪽 고지에는 성벽을 이중으로 쌓은 곳이 있는데 규모가 작으나 내성(內城)의 형태를 갖추고 있어 망루〔鋪〕나 장대(將臺)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4) 석현성(石峴城))

   석현성은 문경시 마성면 신현리 고모산성의 동남쪽에 있는 관갑천(串岬遷) 계곡을 차단하기 위하여 축조한 성으로, 고모산성의 날개처럼 연결되어 있으므로 고모산성의 익성(翼城)으로 취급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모산성은 전형적인 삼국시대 산성이고, 석현성은 조선시대에 축조한 일자형(一字形)의 관애(關애)로서 마치 조령의 관문과 같은 형태이다. 따라서 고모산성과 석현성은 그 축조 시기와 축성 목적이 다른 별개의 성이라 할 수 있겠다.
  석현성이 위치한 관갑천은 예로부터 연애잔도(緣崖棧道)로 잘 알려진 천연의 요새이다. 이 성에 대한 기록은『영남읍지』에 있는『문경읍지』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는데, 이에 의하면 고종 30년(1893)에 문경부사인 김정근(金楨根)이 신축하고 문 이름을 진남문(鎭南門)이라 하였는데 문루는 6칸 규모로 성벽의 길이는 385파(把)라 하였다. 여기서 1893년에 김정근이 신축한 것은 진남문일 뿐이므로 이 성은 이미 그 이전에 축조되어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다. 처음 축조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대략 임진왜란 시기에 조령 3관문 중의 조곡관 설치와 때를 같이하여 석현성을 축조함으로써 남쪽으로부터 침공을 차단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이 성은 한말 항일의병의 방어진지가 되기도 하였는데, 1895년 12월에 운강(雲崗) 이강년(李康年)이 이끄는 문경 의병이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때 일본군에 의하여 성문이 불타 없어지고 석현 마을도 잿더미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석현성의 현존 상태는 비교적 양호한데, 진남문이라 편액되었던 문루는 신축한 후 2년 만에 불타 없어지고 최근의 발굴 조사에 의해 그 기초 부분의 모습이 확인되었다.
  고모산성의 동남쪽 붕괴된 성벽 아래에서 시작되어 남향한 완만한 경사를 똑바로 횡단하며 축조된 성벽은 돌고개 남쪽의 능선 안부(鞍部)에서 내부에 평탄지를 두고 계곡을 횡단하자마자 방향을 남쪽으로 바꾸어 서향한 경사면을 횡단하며 똑바로 남쪽 끝의 바위 절벽까지 이어져 있다. 전체적으로 남쪽으로 볼 때 거의 ㄱ자 형태를 취한다. 서남향한 골짜기 상단을 석축 성벽으로 막고 서남쪽에서 돌고개를 넘으려는 적을 방어할 목적으로 축성하였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진남문 터는 계곡 중앙에 해당되는데 성벽이 통과하는 가장 낮은 위치에 문을 만들었다. 이 문터의 개구부 양쪽 측벽을 기준으로 하여 북서쪽의 고모산성과 닿은 성벽은 길이가 150m이고, 남쪽으로 뻗어 바위 절벽에 닿은 성벽은 길이가 235m로서 전체 성벽의 길이는 385m가 되며,『문경읍지』에 385파(把)라 기록된 것과 정확히 일치되어 주목된다.
  성벽은 서북쪽 구간에서는 성벽 안쪽으로 내환도(內環道)가 이루어져 있으나, 성벽 바깥으로는 경사가 급하여 뚜렷한 외환도가 보이지 않고, 남쪽 구간에서는 내환도와 외환도가 뚜렷하다. 이 남쪽 성벽 밖의 외환도는 곧 토끼비리〔兎遷〕로 이어지는 길이 되어 있다. 서북쪽 끝은 고모산성의 붕괴 경사면에 접해 있고 남쪽 끝은 산허리의 바위 절벽에 닿아 있어 적이 기어오를 수 없도록 하였다.
  성벽은 기본적으로 기초부· 체성부(體城部)· 여장부(女墻部)로 구성되었음이 분명하지만, 기초부와 체성부가 남아 있고, 여장부와 체성부의 윗면은 손상되어 있다. 특히 여장부는 총안과 사혈(射穴) 및 여장 지붕의 형태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진남문터의 안쪽으로는 평탄지가 있고, 성황단이 있는 능선 안부(鞍部)에 이르도록 낮게 층단을 이룬 평탄대지로 되어 있어서 별장(別將)을 비롯한 수비 병력이 기거할 수 있는 집들과 마당 등의 생활공간으로서 적당한 면적을 갖추고 있는데, 지금은 민묘와 돌더미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최근에 발굴 조사로 노출된 진남문 터는 좌우의 성벽이 성안을 향하여 약간 곡선을 이루며 휘어든 중심부에 개구부(開口部)를 만들었다. 개구부의 외측 성벽 좌·우측은 벽면이 직선을 이루었고 내측은 성벽면이 안쪽으로 곡선을 이루고 있다. 개구부의 너비는 곧 문구부(門口部)를 이루며, 이 부분의 기단석축은 화강암의 무사석(武砂石)과 할석으로 석재가 크고 잘 다듬어져 구분된다. 문의 통로 바닥은 두께 10㎝ 내외의 얇은 할석으로 빈틈없이 깔았으며, 동쪽에는 문비축수공(門扉軸受孔)이 있는 비주석(扉柱石)과 중앙에 문짝이 멈추도록 세운 문지석(門止石)이 남아 있다. 발굴된 유구를 통하여 진남문은 외측에 문짝을 시설하고 그 외측문의 선단에 차단되는 문설주를 대신한 석재가 문비주를 가린 형태로 되었으며, 부형무사석(缶形武砂石)이 없는 것으로 보아 사각문(四角門)으로 된 내개형(內開形)에 빗장을 지르도록 만든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문구부의 안쪽 좌·우측에는 문과 성벽에 오르기 위한 석등(石
)이 있으며, 문구부의 바닥 밑으로 통하였던 암거(暗渠)가 발굴되어 성안의 물이 성문 밑을 통하여 배수처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밖에 문루에 사용되었던 많은 양의 기와와 전(塡)이 발견되었다.

  5) 고부산성(姑夫山城))

   고부산성은 문경시 불정동과 마성면 신현리, 하내리의 경계 지점에 있는 어룡산(魚龍山,615m) 정상에 있다. 곧 고모산성의 남쪽으로 곧바로 마주 보이는 산봉우리를 둘러싸고 축성된, 둘레 소규모 퇴뫼식 석축산성이다. 이 산성의 축조 시기는 문헌의 기록이 없어 알 수 없고,『여지도서』등 조선 후기의 지리지에 “토천 남쪽 고산(高山) 위에 있는데 고모성과 서로 마주하고 있으며 지금도 석축이 남아 있다”고 하였다.『고종실록』에는 고부산성이 고모산성과 서로 대치하여 의각(角)의 형세를 이루고 있다고 하였으며,『증보문헌비고』에는 고부성은 토천의 남쪽 높은 산 위에 있으며 고모성과 더불어 서로 대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들은 이 두 성이 같은 시기에 계립령 길 또는 조령 길의 방어를 위해 축조되었음을 말해준다.
  고부산성 남쪽 골짜기는 산수골이라 하며, 마성면의 구랑리(九郞里)와 가은읍 갈전(葛田)으로부터 점촌의 안불정(內佛井)과 외불정(外佛井)의 도둑골로 통하는 지점에 위치하여 가은 방면과 문경 방면 두 곳을 방어할 수 있게 하였다. 특히 가은 방면은 연풍과 괴산 및 청천에서 넘어올 수 있는 봉암사(鳳巖寺) 방면의 오봉정 길과 청천 방면의 관평 길이 있어 계립령 길을 거치지 않고도 신라의 내지로 침공이 가능하기 때문에 고부산성은 고모산성의 자성(子城)으로서 동쪽의 길목을 지키는 동시에 북쪽을 감시하는 보루(堡壘)의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성의 둘레는 약 270m로서 비교적 소규모에 속하며, 석축의 성벽은 무너졌고 아직 정밀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자세한 성곽의 현황은 알 수 없다.

  6) 마고산성(麻姑山城))

   문경시 문경읍 마원리 우무실〔井谷〕마을 뒷산인 봉명산(鳳鳴山)에 있는 산성으로 남쪽으로 고모산성과 약 4㎞ 떨어져 있다. 문경 시내를 북쪽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위치이며, 동쪽에 있는 문경-상주 간 길목을 지키는 동시에 멀리 조령과 계립령 방향의 동태를 감시하기 위해 설축된 산성으로 보인다. 이 산성은 조선시대의 각종 문헌기록에 보이는 요성(요城)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증보문헌비고』에 보면 요성은 문경현의 동쪽 4리에 있는데 돌로 쌓았고 둘레가 565척이라 하였으며, 왜성비국(倭城備局)에는 정곡성(井谷城)이라 기록되어 있다고 하였다. 또 일제 강점기에 간행된『환여승람(
輿勝覽)』에는 군의 동남쪽 4리 되는 산 위에 돌로 쌓았으며 둘레는 556척으로서 요성은 본래 성첩이 없고 정곡리 뒷산의 성이 이것이라 하였다. 이러한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요성이 분명해 보인다. 요성은 삼국시대에 계립령 길을 방어하던 성이며, 당시의 관산현(冠山縣)의 치소가 있던 곳이 아닌가 추측되는데 문경의 옛 지명인 고사갈이성(高思葛伊城)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산성은 봉명산 기슭에 돌로 축조되었으며 축성 방법이나 사용된 석재가 고모산성과 매우 흡사하다. 성의 북쪽은 절벽을 이용하여 설축되지 않았고 동·서·남쪽에만 자연석을 이용하여 석성을 쌓았는데 지금은 대부분 붕괴되었다. 성의 주된 방어 방향은 역시 북쪽이며 동시에 동쪽의 길목을 의식하고 있어 신라측에서 축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성의 둘레는 약 750m, 높이는 1~4m, 너비는 3~5m이다.

  7) 노고성(老姑城))

   문경시 동로면 간송리 성재 마을 뒷산에 있는 산성으로, 이 산성은 성재라 불리고 있으며 이곳의 성은 속칭 할미성이라 한다. 문경 또는 예천에서 단양으로 가는 길목이며 북쪽으로 벌치(伐峙)와 직통되는 위치이다. 성은 남·북의 협곡과 북쪽의 해발 570m 산봉우리를 돌아 설축한 석축산성으로 편마암 계통의 석재를 적당히 다듬어 쌓았다. 성벽은 비교적 완만한 남쪽에 146m 정도가 잘 남아 있는데 S자형으로 축조하여 더욱 견고하도록 하였으며 성벽 안쪽에는 너비 5.7m의 통로를 마련하였다.
  성의 둘레는 646.4m로 전체를 협축으로 쌓았는데, 현재 지상의 성벽은 남아 있지 않고 현존 높이는 6.5~9.0m로서 매우 높은 편이다. 장대(將臺) 터는 북쪽의 정상부에 있었을 것으로 보이며 치성(雉城)은 남동쪽 협곡의 좌우에 남아 있다. 건물 터는 확인되지 않으나 남쪽 성벽 안의 평지와 현재 경작지로 쓰이는 동쪽 저지대에 창고나 기타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성안의 지세는 서·북쪽이 높고 동·남쪽이 낮으며 성문 터는 동쪽에만 있다. 따라서 이 성의 주된 방어 기능은 서쪽의 벌치 길과 소백산맥 방향에 있다고 하겠으며, 축성 시기는 삼국시대 말기로 신라의 북방진출 시기가 아닐까 추측된다.

  8) 희양산성(曦陽山城))

   희양산성은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에 있는 희양산(999.1m) 북쪽 충북 괴산군 연풍면 주진리와의 경계를 이루는 능선의 고개(850.5m) 일대와 그 동남쪽 바로 아래 산사면에 축조된 석축산성이다. 능선 위에 있는 성벽은 전체 길이 288m, 높이 1~2m, 상부 폭 1m 내외로 북쪽을 지키고, 사면의 성벽은 남쪽을 방비하며 연장 130m, 높이 1~3m, 상부 폭 1~2m이다. 계곡에는 물이 빠져나가도록 큰 돌로 사이가 약간 뜨게 축조하였다. 성돌은 자연석과 할석을 사용하였으며, 능선의 성벽은 약간 조잡하고 사면의 성벽은 치밀하다. 성벽이 없는 곳은 자연 암벽으로 되어 있어 접근이 불가능하다.
  산성의 주된 방어 방향이 북쪽을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에서 축성한 것으로 보이며 농성하였을 때는 모든 방위의 방어가 가능한 산성이다.『여지도서』에는 가은현 북쪽 15리에 옛 성이 있으니 3면이 모두 석벽이라고 기록되어 있고,『증보문헌비고』에도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희양고성에서 후삼국 말기에 경순왕이 후백제의 견훤(甄萱)과 교전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9) 근암산성(近山城))

   근암산성은 문경시 산양면 현리의 뒷산에 있는 삼태기 모양의 포곡식 토축산성으로 정상부에만 길이 40m의 석축성벽이 있다. 능선부는 이중 성벽으로 되어 있으며 정상에는 옛 성황당이 있고 치마장이 있었다고 한다. 성벽의 전체 길이가 약 1.6㎞, 높이 3~4m에 이르는 대규모의 산성이다.
  현리(縣里)는 신라시대 근품현(近品縣 또는 近
縣, 후에 嘉猷縣), 고려시대 산양현(山陽縣)의 소재지로서 고려 태조 10년(927) 9월에 후백제의 견훤이 근품성을 공격하여 불태웠다는 기록이『고려사』에 보인다.

4. 맺음말

   문경은 우리나라의 영남과 중부지방을 연결하는 남북 교통의 요충지이면서 소백산맥이라는 천험의 요새를 끼고 있어 삼국시대부터 군사적으로 매우 중시되었던 곳이다. 그리고 영남 지역에서 낙동강을 따라 상류 지역으로 올라오게 되면 최종적으로 만나는 곳이 문경이다. 즉, 낙동강의 최북단에 위치한 문경은 영남 지역에서 중부 지역과 서울로 가기 위한 집합 장소가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지리적인 특성으로 인하여 신라 아달라왕 3년(156)에 처음으로 계립령 길을 개척하였으니 이는 바로 문경 지역을 신라의 북방 진출의 교두보로 삼았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반대로 소백산맥의 고갯길은 북쪽 세력이 남진하기 위한 통로가 되기도 하였으므로 이에 대한 방어 대책이 필요하기도 하였다.
  삼국시대의 중요한 교통로 인근에는 반드시 관방이 설치되었다. 작게는 그 지역을 방어하고 넓은 의미에서는 왕경으로 통하는 길을 중간에서 차단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전국적으로 많은 성곽들이 분포되어 있는데, 특히 문경 지역은 교통상의 중요한 거점이었기 때문에 교통로를 차단하기 위해 일찍부터 성곽이 축조되었음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앞에서 열거한 문경 지역의 성곽들을 통해 볼 때 몇 가지의 특징이 발견된다.
  첫째, 문경 지역의 관방 유적은 수적으로 그리 많다고 할 수 없으나 모든 성곽들이 그 전략적인 위치로 말미암아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생각된다. 시대적으로는 삼국시대에 신라에서 축조한 것이 많은데 이는 계립령 길의 중요성에 기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계립령 고개에 축조된 하늘재산성은 물론이고 고모산성· 고부산성· 마고산성· 노고성· 희양산성· 근암산성 등이 모두 신라시대에 북변을 방어하기 위하여 축조한 것이며, 이 가운데 하늘재산성과 고모산성· 고부산성· 마고산성 등은 계립령 고갯길과 직접 통하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서 주목된다.
  둘째,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 내지는 조선 초기까지는 계립령이 중시되다가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조령으로 침입한 것을 계기로 조령에 대한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선조 27년(1594) 이곳에 조곡관이 설치되고, 이어서 숙종 34년(1708)에 주흘관과 조령관이 설치됨으로써 3관문이 완성되고 영남대로의 중심 노선이 되는 한편 계립령 길은 쇠퇴하게 되었다. 조령 길과 직접 관련된 관방시설은 조령산성을 비롯하여 석현성이 있는데 모두 임진왜란 이후에 축조되어 조선 말기까지 여러 차례 보수와 개축이 이루어졌을 정도로 중시되었다.
  셋째, 문경 지역에서 소백산맥을 넘는 옛길로는 계립령과 조령길 이외에 벌치와 주항령을 넘는 길이 있는데 이와 관련된 관방으로 노고성과 견훤산성이 있다. 일제 강점기에 신작로로 뚫린 이화령은 조령과 인접해 있어서인지 크게 중시되지는 않은 듯 유적이 발견되지 않는다.
  넷째, 문경 지역에 분포한 성벽들의 방어 방향을 살펴보면 시대별로 정반대로 나타나고 있다. 즉, 삼국시대에 축성된 하늘재산성· 고모산성· 고부산성· 마고산성· 노고성· 희양산성 등은 주로 북쪽 세력을 방어하는 데 유리하도록 설축된 데 반하여 주선 후기에 축조된 조령산성과 석현성은 남쪽으로부터 침공하는 적을 방어하도록 입지하고 있다. 신라시대에는 문경이 북쪽 국경에 위치하여 도읍지 경주를 보호하는 한편 북·서쪽의 고구려와 백제를 방비하여야 하였고, 조선시대에는 왕도 한양이 문경보다 북쪽에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남쪽 왜군이 한양으로 침공하는 것을 소백산맥에서 방어하는 일이 중요하였기 때문이다. 곧 군사 방어의 전술이 도읍의 변경에 따라 달라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섯째, 삼국시대 이래 지방 행정의 중심지였던 군현(郡縣)의 치소에 성곽이 축조되기도 하였는데, 문경 지역에서는 문경현의 옛 지명이기도 한 고사갈이성(高思葛伊城)이 지금의 마고산성으로 추정되고, 근암산성은 옛 신라 근품현의 치소로 추정된다. 이밖에 옛 가은현의 치소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가은고성(加恩古城)의 터가 가은읍에 남아 있다.

과거길의 풍속과 여정

차미희(이화여자대학교 사회생활학과 교수)

조선시대의 유생들이 과거 보러 한양에 올라갈 때 문경새재를 넘고자 한 것은 문경이라는 이름이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는다’의 뜻이고, 문경의 옛 이름이었던 문희(聞喜) 역시 ‘기쁜 소식을 듣는다’라는 뜻이 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1. 서  론

  문경새재(聞慶鳥嶺,이하 문경새재로 통일함)는 그 명칭이「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라는 뜻에서 유래하기도 하였다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예로부터 조령산 마루를 넘는 가장 높고 험한 고개였다. 그리고 조선시대 태종 14년(1414)에 관도(官道)로 개통되면서부터 문경새재는 영남과 기호를 잇는, 영남에서 한양으로 통하는 가장 큰 길(嶺南大路)이 되었다. 따라서 조선시대에 문경새재는 국방상의 요충지로 자리잡음은 물론 경제·사회·문화 유통로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문경새재는 이후 교통로로서 지니는 의의가 많이 줄어들었다. 1925년에 이화령이 신작로로 개척되어 지금은 3번 국도가 지나고 있으며, 경부선 및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조령을 통과하던 교통량이 모두 추풍령으로 흡수되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문경새재는 새롭게 그 지역적 중요성이 다시 부각되고 있다. 새재 주변의 주흘산, 조령산, 부봉과 각 골짜기마다 서식하고 있는 희귀 동식물,기암괴석,약수 등으로 인해 그 자연적·환경적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또한 관문,충렬비,표석,원터,교귀정,군막터,동암문,북암문,이진터,봉수터,성터,대궐터 등의 유적이 남아 있어 그 역사적 의의도 부상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문경새재를 넘나들면서 남겨놓은 인간세상의 많은 이야기,보부상인,산도둑,화전민,과거길에 오른 선비 등에 대한 이야기들은 영남 사람들의 삶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자료가 되기에 충분하다.
  과거길에 오른 유생들의 이야기는 각종 시험을 치러야 하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친숙한 소재이다. 시험은 일단 사람들을 긴장시키고 스트레스를 주지만, 특히 합격 뒤에 따라오는 보상이 크고 대단한 실험일수록 그 시험에 임하는 사람들의 바람과 절실함이 큰 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최근 어느 관광회사에서 가족과 함께 떠나는 겨울방학 테마여행의 코스 중의 하나로 ‘죽령 넘어 장원급제로 가는 길’을 잡은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며, 과거길에 오른 유생들의 이야기는 더욱 구체화되고 풍부해질 필요가 있다.
  그러나 과거길 유생들에 대한 이야기는 대개 떠도는 이야기로 남아 있어서 자료로 확인하기 어렵고, 그 밖의 다른 자료를 찾는 일도 쉽지 않다. 가장 일반적으로 주목되는 자료는 민족문화추진회에서 발간한『한국문집총간(韓國文集叢刊)』인데, 김종직(金宗直), 이황(李滉) 등과 같이 영남의 대표적 인물들이 문경새재에 대해 남긴 글은 대개가 과거 급제 이후에 문경새재를 넘나들면서 풍경에 대한 감상이나 자기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필자가 과거길의 여정과 풍속이라는 주제의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은 문경새재박물관에서 그 동안 자료총서로 발간한 여러 권의 책들이 그 기초가 되었다. 특히 예천 사람 박득령(朴得寧)이 1834년부터 남긴 일기 자료『저상일월(渚上日月)』은 해당 주제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자료로 활용하였고, 이 외에 문집 종류, 급제자 및 입격자 명단 종류, 관찬 사료 등도 이용하였음을 밝힌다.

2. 과거길을 떠나는 이유

  “영남의 유생들이 과거를 보기 위해서 한양으로 갔던 이유는 무엇일까요?”라고 물으면, “당연히 과거 시험을 치르기 위해서죠”라는 대답이 나올 것이고, 그것은 물으나마나 한 질문이 아니냐고 핀잔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과거 시험에는 여러 종류가 있고,종류에 따라서 절차도 다양하였기 때문에 모든 과거 시험을 다 한양에서 실시한 것은 아니었으며, 영남의 유생들이 급제하고 싶어했던 과거 시험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었다는 점을 먼저 짚어보고자 한다.
  중앙집권적 양반 관료체제가 완비된 조선시대에는 양반 관료가 국가 운영의 핵심이었으며, 그들은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과거제도, 문음제도, 천거제도 등을 통해서 선발되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모든 관료들이 시험을 통해서 임용되어야 한다는 것이 원칙으로 요구되면서 과거제도가 관료 선발의 기본적 통로로 이루었다.
  과거제도에는 여러 종류가 있어서 문과시험에서는 문반 관료를, 무과시험에서는 무반 관료를 선발하였는데, 문과시험은 무과시험보다 훨씬 더 중시되었다. 양반 관료체제를 마련하면서도 문치주의를 지향하여 문반 관료를 무반 관료에 비해 더욱 우대하였기 때문이다. 관품은 관직,과전,녹봉 등 각종 특혜의 기준이 되었는데, 정국을 이끄는 핵심적 지위의 당상관은 주로 문반에 만들어져 있었고, 무반에 설정된 당상관 직책도 대개 문반 관료가 겸직하였다. 문반 관료에 대한 우대는 관직체제와 그 운영에서도 나타나 실제 담당 직무가 마련된 실직의 숫자가 문반보다 무반이 관료에게 돌아갔다. 뿐만 아니라 정국 운영의 핵심 관서와 관직을 모두 문반 관료가 주도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문과시험에서는 선발의 기준을 성리학적 교양에 두었으며, 그 교양을 체계적·지속적으로 쌓을 수 있는 경제적 여건을 갖춘 양반신분층이라야 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는데, 실제로는 관직체계 내에서 필요한 소수만을 뽑는 바람에 그 경쟁률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다. 결국 조선시대의 문과시험은 정치·경제·사회·문화 부분을 이끌어갈 핵심 엘리트를 선발하는 것으로, 굳이 지금과 비유하자면 사법고시,행정고시,외무고시 등 각종 고시를 모두 합해놓은 것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시험이었다.
  당시 과거시험에는 3년마다 정기적으로 실시하고 세 차례의 시험 절차를 두어 일정 인원을 선발하는 식년시가 있었다. 한편 부정기적으로 실시하고 선발 인원은 물론 시험 절차도 일정치 않은 별시도 있었다. 이 가운데에서 영남의 유생이 한양으로 올라가 치러야 할 시험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다. 우선 초시(1차 시험)는 경상도 자체 내에서 치르고, 초시에서 입격한 이후 복시(2차,본시험)에 응시하기 위한 것이 그것이며, 여기에 해당하는 시험은 식년시,증광시였다. 그 다음은 아예 초시부터 한양으로 올라가서 치르는 ‘별시’ 가 있었으며, 단 한 번의 시험으로 당락을 결정하는 알성시, 춘당대시, 정시 등의 친림시 역시 한양에서 실시되었기 때문에 영남의 유생들은 한양으로 올라가야 했다.
  영남의 유생들이 한양에 가서 치르는 시험의 종류로는 생원진사시(흔히 소과라고 부름)도 있었다. 생원진사시는 정확히 말하면, 관료를 선발하는 과거시험이 아니라 조선시대의 유일한 국립대학인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고, 아울러 생원과 진사라는 학위를 부여하는 시험이었다. 성균관에서는 우선 전국의 유생들을 대상으로 초시를 치렀고, 최종적으로 한양에서 복시를 실시하여 생원과 진사를 각각 정해진 수만큼 선발하였다. 이러한 생원진사시가 과거시험의 일종으로 인식되었던 것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고, 생원과 진사들이 과거시험에서 합격하는 비율이 매우 높았으며, 간혹 생원과 진사에게 하위 관직을 제수하는 경우도 있었다는 점에서 또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정리하자면, 조선시대의 과거시험은 조선을 이끌어갈 소수의 핵심 엘리트를 선발하는 시험이었다. 따라서 전국에서 모여든 쟁쟁한 수재들과의 경쟁을 뚫고 문과시험에 급제한다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영남의 유생들은 개인의 영달은 물론 가문의 영광을 위해서 끓임없이 과거 급제를 위해 길을 떠났다. 그러나 모든 과거시험이 실시될 때마다 영남의 유생들이 한양으로 올라간 것이 아니라 식년시와 증광시의 복시에 응시하기 위해서, ‘별시’의 초시에 응시하기 위해서, 알성시·춘당대시·정시와 같은 친림시에 응시하기 위해서 한양으로 올라갔다. 또한 유생들은 성균관 입학 시험인 생원진사시의 복시를 보기 위해서 한양으로 올라가기도 하였다.

3. 과거길의 여정과 풍속(1)

  조선시대에 영남의 유생들이 한양에 올라가기까지 소요되는 기간은, 출발하는 지역마다 차이가 있었지만, 5일에서 10일 정도였다. 유생들은 대개 하인을 대동하였으며, 말을 타기도 하고 짐을 싣기도 하면서 과거길을 떠났는데, 일행을 만들어 함께 떠나기도 하였다.
  과거길을 떠난 영남의 유생들은 대체로 새재를 넘기 전에 숙박을 하였다. 그 동안의 피로를 풀고 조령을 넘을 수 있는 새 힘을 얻기 위해서 숙박은 필요했다. 또한 새재에는 나무가 빼곡이 들어차 있어서 낮에도 혼자서는 넘어가기 힘들었다. 특히 장정 여럿이 안아도 남을 정도의 큰 나무들이 깊은 숲을 이루어서 호랑이를 비롯한 맹수들이 많았으며, 도둑들의 피해 역시 빈번했다. 따라서 아침 일찍 일어나서 여러 사람이 함께 새재를 넘어야 했기 때문에 새재를 넘기 전에 숙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영남의 유생들은 새재 주막에서 한 잔의 술로 여독을 풀고 서로를 위로한 뒤에, 조령원(鳥嶺院)이나 동화원(桐華院)과 같이 나라에서 설치 운영하는 여관에서 숙박하였으며, 어떤 경우에는 일반 민가에서 숙박하기도 하였다. ‘과거길의 선비와 아름다운 처녀와의 사랑과 배신 이야기’는 바로 민가의 숙박에서 생겨났으며, 구렁이 처녀귀신 이야기는 그 대표적인 예인데, 전해지는 이야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300년 전 어떤 선비가 과거길을 떠나 새재를 넘다가 조그마한 초가집에서 하루 저녁 유숙하였다. 그 집에는 부녀가 살고 있었으며, 아버지는 아름답과 착한 딸의 장래를 늘 생각해 왔다. 따라서 때마침 유숙하게 된 선비의 인품이 범상치 않음을 알게 된 아버지는 자기 딸을 맡아달라고 간청하였고, 선비는 마침내 이를 승낙하여 며칠을 더 머물다가 과거길을 재촉하고 3년 내에 급제한 후 다시 만날 것을 언약하고 떠났다.
  처녀는 매일 선비가 장원 급제할 수 있도록 정성껏 빌었고, 과연 그 선비는 문과시험에 급제하여 암행어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 선비는 옛 언약을 까마득히 잊어 버렸다. 한편 3년이 지나도록 남편은 돌아오지 않고, 그 동안 아버지마저 죽자 처녀는 고생을 참다 못해 남편을 원망하며 자살을 한 뒤에 큰 구렁이가 되었다.
  그 후 이곳을 지나는 행인들이 구렁이에게 자주 피해를 입었다. 암행어사로 지방 순시에 나선 선비는 우연히 이 이야기를 듣고 그제야 그 구렁이가 처녀의 원귀임을 알았다. 선비는 크게 후회하였으며, 처녀의 혼을 위로하고자 제사를 지내주었다. 제사를 지내자 뇌성벽력과 함께 구렁이가 나타나 눈물을 흘리며 사라진 뒤에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선비는 이 처녀의 원혼을 위로하기 위해 현재의 마성면 신현리에 성황당을 짓게 하고 매년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새재를 넘기 전에 숙박을 했던 영남의 유생들은 다음날 아침 일찍 다시 길을 떠았으며, “팔왕폭포의 명승지가 있는 용추(龍湫)는 구경할 만하다던데…”라고 하면서도 과거시험에 대한 준비와 긴장 때문에 그곳을 지나쳐야 했으며, 조령을 넘기 직전에는 급제의 소원이 이루어지길 바라며 사람들이 하나 둘 쌓아둔 탑에 다시 돌 하나를 정성껏 얹고, 부근의 조령약수를 마시며 한양까지 내달을 수 있는 의지를 다졌을 것이다.
  영남의 유생들이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새재를 넘어 한양으로 올라가면서 마음에 품었던 희망과 바람은 한결같았지만, 그것이 실현될 수 있는 가능성은 정치적 상황에 따라 시기마다 차이가 있었다.
  성종대 후반부터 중종과 명종대로 이어지는 조선 전기에는 과거길을 떠나는 영남 유생들의 희망과 기대가 실현될 수 있는 가능성이 보다 컸던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에는 훈구세력이 집권하면서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했던 한편 성종의 적극적 후원하에 영남 사림의 태두 김종직을 중심으로 한 세력이 훈구세력을 비판하고 견제하는 세력으로 성장하는 가운데, 별시가 자주 열리면서 영남 출신의 급제자가 늘어가고 있었다. 따라서 영남의 유생들은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성리학적 이상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커다란 희망을 품고 과거를 준비해 왔으며, 과거를 보기 위해서 길을 떠났던 것이다. 영남을 중심으로 한 사림세력은 중종대에 이르러 그 기반을 기호지방으로까지 확대하였으며, 더 나아가 이황을 중심으로 하는 영남학파를 형성함으로써 계속되는 네 차례의 사화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선조대에는 사림정치를 실현할 수 있게 되었다.
 <표 1>은 조선 전기에 영남의 유생들이 과거시험, 특히 별시에 급제하는 비율이 어느 정도 높아졌는가를 엿볼 수 있는 단서가 될 것이다. 영남이 “인재의 보고이다”라든지 “조선의 인재는 반이 영남에 있다”라는 소리를 듣게 된 것은 아마도 이러한 정치적 상황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표 1> 세조~명종대 사림세력의 문과 급제자 수 및 연평균 수

시기\시험종류

식년시

별 시

합 계

급제자수

연평균수

급제자수

연평균수

급제자수

연평균수

  세조5~성종15년(25년)

14

0.6

6

0.2

20

0.8

  성종16~25년(10년)

13

1.3

10

1.0

23

2.3

  연산군 재위기간(12년)

14

1.2

11

0.9

25

2.1

  중종 원년~14년(14년)

17

1.2

66

4.7

83

5.9

  중종15~32년(18년)

24

1.3

15

0.8

39

2.2

  중종33~39년(7년)

12

1.7

17

2.4

29

4.1

  명종 원년~20년(20년)

20

1.0

19

1.0

39

2.0

  합계(106년)

114

1.1

144

1.4

258

2.4

  또한 영남의 유생들이 과거길을 떠나 한양에 올라갈 때에는 죽령을 넘는 것이 더 빠를 수도 있었다. 추풍령은 경상도의 김천과 충청도의 영동을 이어주는 고개로서, 추풍령과 가까운 지역에서는 이 고개를 넘는 것이 한양으로 올라갈 때 더 빠른 길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올라가는 영남의 유생들은 멀리 돌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굳이 문경새재를 넘고자 하였으며, 이러한 양상은 심지어 호남의 유생들에게까지도 나타났다고 한다.
  이러한 양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현재까지 전해지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조선시대의 유생들이 과거 보러 한양에 올라갈 때에 죽령과 추풍령을 넘기 싫어한 이유는 죽령을 넘으면 ‘죽죽 미끄러지며’,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처럼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경새재를 넘고자 한 것은 문경이라는 이름이 ‘경사스런 소식을 듣는다’의 뜻이고, 문경의 옛 이름이었던 문희(聞喜) 역시 ‘기쁜 소식을 듣는다’라는 뜻이 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결국, 조선 전기 영남의 유생들이 과거에 급제했다는 소식이 자주 전해지면서, “나도 저런 기쁜 소식을 들어야지”하는 유생들의 간절한 바람이 문경새재를 넘음으로써 “나도 과거급제라는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거야”라고 하는, 일종의 자기 암시 내지 자기 확신과 연결 되었기 때문에 문경새재는 죽령,추풍령 등과 같은 고개보다 더 선호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4. 과거길의 여정과 풍속(2)

  영남 유생들의 과거 급제에 대한 열망은 이후 한풀 꺾이는 상황이 된다. 영남은 정치적인 당색으로 볼 때 대체로 남인에 해당되었다. 남인은 서인의 주도하에 인조반정을 성사시키고 연립정권을 구성했지만, 효종과 현종대에 서인세력에 밀려 계속 약세를 면치 못하다가 숙종대 초반에 이르러서야 겨우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 가지 못해서 숙종 전반기에는 서인과 남인이 정국 독점을 번갈아 이어가다가 마침내 숙종 20년에는 서인에게 정권을 내주면서 영남 남인은 중앙 정치의 핵심에서 밀려나게 되었던 것이다.
  숙종 후반기 이후 중앙의 정치는 지역적으로 한양, 당색으로는 서인이 다시 나누어진 노론과 소론 세력으로 서로 대립하는 가운데 운영되었으며, 이러한 가운데 영남 유생들의 중앙 정계로의 진출은 일정한 범위 안에서만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숙종 28년(1702)에서 30년(1704)에 이르기까지 식년시와 별시 급제자의 지역적 분포를 정리한 <표 2>를 통해서 엿볼 수 있다.

<표 2> 숙종대 후반 문과 급제자의 지역별 분포

시험종류\구분

급제자수

한양,지방출신 숫자(%)

각도별분표(명)

식년시

38

한양 5(14)

 

지방 33(86)

경기(4),충청(9), 경상(10),전라(4),평안(4),함경(2)

증광시

31

한양 15(48)

 

지방 16(52)

경기(2),충청(6),경상(2),전라(3),황해(2),강원(1)

‘별   시’

13

한양 5(38)

 

지방 8(62)

충청(2),경상(3),전라(2),강원(1)

정   시

13

한양 11(85)

 

지방 2(15)

경기(1), 충청(1)

알성시

9

한양 7(78)

 

지방 2(22)

충청(2)

춘당대시

8

한양 8(100)

 

지방 0(0)

 

  <표 2>에 의하면 지방 유생이 식년시의 급제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86%였다. 이러한 비율은 지방 유생의 급제 비율이 50%에 해당하는 증광시,‘별시’, 그리고 10%에 불과한 정시,알성시,춘당대시 등과 비교할 때 절대적으로 높은 것이다. 이를 통해서 볼 때에 영남의 유생들은 식년시,증광시,‘별시’와 같이 각 지역별로 입격자의 숫자가 정해져 있는 초시가 실시되는 과거시험에서는 급제할 확률이 비교적 높은 반면에 정시,알성시,춘당대시와 같은 친림시의 경우에는 급제할 확률이 매우 낮았다. 결국,숙종대 후반 남인이 몰락하면서 영남의 유생은 과거에 급제해도 고위·핵심 관직으로 진출할 수 있는 가능성이 현격하게 줄어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남의 유생들은 과거를 보아 중앙 정계로의 진출을 계속 시도하였는데, 그 진출의 시도가 몇몇 과거시험에만 국한되고 있었던 것이다.
  문경새재를 넘어 한양에 올라가면 과거에 급제할 것이라는 영남 유생들의 간절한 바람은 급제의 가능성이 한풀 꺾이게 된 조선 후기에는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의 급제 가능성이 보다 높았던 조선 전기에도 항상 소수의 사람에게만 실현될 수밖에 없었다. 과거시험에서 선발하는 숫자가 제한된 반면에 전국 8도의 유생이 모두 응시하고자 했으며, 더구나 나이 제한이나 학력 제한, 응시 횟수 제한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경쟁률은 ‘몇천 명 대 1’이라는 상상을 초월하는 기록을 남겼다. 따라서 10년을 공부하여 과거에 응시해도 낙방하는 것은 다반사였고, 실력을 갖추었다고 해도 실제 정치를 운영하는 세력과 연결되지 않으면 급제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결국 문경새재를 넘을 때에는 이 길이 ‘장원급제길’,‘금의환향길’이 되었으면 하고 바라지만, 결단코 그렇게 될 수 없는 일이었다.
  과거에 낙방하고 다시 새재를 넘어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영남 유생들의 심정, 그것을 엿볼 수 있는 몇몇 단서가 있다. 안동 출신의 유우잠(柳友潛)은 새재 마루에 올라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지난해 새재에서 비를 만나 묵었더니, 올해는 새재에서 비를 만나 지나갔네. 해마다 여름비, 해마다 과객 신세. 필경엔 허망한 명성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을까.” 유우잠은 해마다 과거시험에 응시하였지만 끝내 과거에 급제하지 못했다. 따라서 유우잠은 아들 유직(柳직)이 인조8년(1630)에 실시된 생원진사시에서 진사로 입격하게 되자 자신이 못다 이룬 꿈을 아들이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안고 살아가야 했다.
  이황의 손자인 이봉원(李逢原)이 과거에 낙방하자, 이황의 제자이자 통신사로 일본에 파견되었던 학봉 김성일(金誠一)이 이봉원을 전송하면서 그를 위로하던 글도 남아 있다. “십 년 동안 남은 힘에 과거시험 공부했고, 가정에서 시례 배워 견문도 많았다네. ……즐거이 고향 가서 하던 공부 다시 하고, 궁달로 마음에누 끼치지 말지어다.” 이봉원에게 있어서 선배이자 스승격이던 김성일이 써준 이 시가 많은 위로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후에도 이봉원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함으로써 김성일의 위로는 이봉원에게 평생의 위로로 남게 되었다.
  조선 후기, 특히 우리가 세도정치라고 부르는 시기에 영남 유생들의 과거에 대한 인식, 낙방 이후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저상일월」의 주인공 박득령이다. 그는 당시 예천의 천석꾼 지주 집안이었으며, 그는 물론 그의 형도 과거시험을 거의 해마다 부지런히 보러 다니는 전형적인 유생 집안이었다. 박득령은 친림시에도 응시하기 위해 열심히 한양으로 올라갔지만, 과거에 급제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결과에 대해서는 ‘아니나 다를까’의 반응을 보였다. 식년시와 증광시의 복시를 치르기 위해서 새재를 넘어 한양으로 올라갈 때에는 혹시나 하는 기대가 역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도 박득령은 급제하지 못했지만, 영남의 유생들이 급제자 중 많은 수를 차지하게 되자 자신에게도 급제할 가능성이 있음을 확인하고 다시 과거를 준비하기 위해서 귀향길에 오르는 모습을 보인다.
  박득령이 한양으로 과거를 치르고, 낙방한 이후 귀향하는 과정은 오랜 기간 과거길을 떠났던 과객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1839년 9월에 치른 과거시험에 대한 그의 일기를 따라가 보면 다음과 같다. 한양에 도착하면 일단 여관을 정하게 되는데, 박득령은 이 여관에서 자신이 맡았던 친구의 노자까지 도둑을 맡게 된다. 여기에서 그는 고발 한번 해보지 못하고 “인심이 이러하니 매우 두렵다” 는 표현을 남긴다. 그는 또한 고향에서는 소문으로만 듣던 천주교도의 목을 치는 현장을 확인한다. 한양의 인심, 정치적·사상적 변화 양상에 대한 정부의 입장을 몸서리를 치며 절감하였던 것이다. 박득령은 종로에 나가서 서울의 시가를 구경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 “바다가 육지로 변한 것같이 달라지고 있었다”는 느낌을 전한다. 당시 한양의 인구는 하루가 다르게 늘어가면서 30만을 넘어 사대문 밖에까지 인가가 빽빽하게 들어서는 변화를 보였다. 그리고 종로 바닥에는 무허가 상점들이 난립하여 왕래하는 행인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이러한 한양의 변화에 대해 예천의 지주인 박득령은 실로 많은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박득령은 낙방한 이후 “선비가 비록 낙방했다 하더라도 슬픈 마음이야 가질 수 없지 않은가” 라는 마음가짐으로 그 다음날 종로가의 상점을 둘러본 뒤에 같이 상경했던 일행들과 만나기로 했던 남대문으로 갔다. 그러나 일행들이 오지 않아 쓸쓸히 한강을 건너 고향으로 떠났다. 이때 박득령은 “해마다 올라오는 한양이었으나 금년처럼 우울하고 쓸쓸한 여행은 없었다. 길동무도 없이 가는 발길이 너무 무거웠다”라고 당시의 심경을 전한다. 서로를 위로하고 의지할 일행마저 놓치게 되면서 그의 마음이 더욱 무거웠을 것이다. 이런 저런 생각에 박득령은 충주의 수안보에 이르렀고, 여기에서 일행들이 뒤따라온다는 기별을 듣고 너무나 반가워 했으며, 그들을 기다리는 동안에는 수안보에서 온천을 하였다. 일기는 여기에서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지만, 이후 일행들을 만나 반가워하며 함께 문경새재를 넘어 고향인 예천으로 돌아왔고, 박득령은 또 다시 과거길을 떠났던 것으로 보인다.

5. 결  론

  지금까지 조선시대에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서 문경새재를 넘어 한양을 오고 가던 영남 유생들의 풍속과 여정을 살펴보았다. 왜 영남의 유생들이 멀고 힘든 과거길을 떠나야 했는지를 조선시대의 문과시험이 가지고 있는 위상을 통해서 알아보고자 했다. 그리고 과거길의 여정과 풍속에 관한 것은 한양으로 올라가는 과정과 낙방 이후 귀향하는 여정으로 나누어 검토하였으며, 여기에서는 조선시대 정치적 흐름의 변화도 함께 다룸으로써 영남의 유생들이 과거에 급제하기를 바람은 한결같았지만, 그것이 실현되는 것의 여부에는 정치적인 상황도 작용하였음을 살펴보았다.
  풍속은 생활사 및 문화사와 관련된 주제로서, 그것을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매우 폭넓은 연구 성과와 자료를 바탕으로 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과거길 선비들에 대한 이야기 몇 개 정도를 주변에서 전해들을 수는 있지만, 막상 연구를 하기에는 연구성과와 자료 두 가지 모든 부분에서 턱없이 부족함을 느낀다. 이 글이 과거길 풍속에 대한 연구에 작은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그네의 쉼터 옛 주막

배영동(안동대학교 국학부 민속학전공 교수)

산모퉁이 돌아서 가노라니 외로운 주막이 쓸쓸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나그네는 이 주막에 머물까, 더 가다가 물을까, 상념에 잠기기도 한다.

1. 잊혀져가는 주막과 나그네의 문화

  주막은 우리에게 잊혀져가는 옛 풍물 가운데 하나이다. 주막은 단순한 술집이 아니라, 여러 기능을 복합적으로 수행하던 공간이었다. 주막이 사라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보행에 의존하던 나그네 문화의 급격한 변화이다. 나그네 문화의 변동은 도로망의 정비와 교통수단의 변화뿐만 아니라, 정보통신 혁명에 따른 생활방식의 변화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향토색 짙은 서정시인 김소월은 1920년에「낭인(浪人)의 봄」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나그네가 주막을 찾아서 묵는 풍속을 한 편의 시로 읊고 있다.

  휘둘러 산을 넘고 / 구비진 물을 건너 / 푸른 물 붉은 꽃에 / 길 걷기 시름이어.
  잎 누른 시닥나무 / 철 이른 푸른 버들 / 해 벌써 석양인데 / 불슷는(불어스치는) 바람이어.
  꽃자기 이는 연기 / 뫼틈에 잠기는데 / 산모루 도는 손의 / 슬지는(스러지는)그림자여
  산길가 외론 주막 / 어이 그 쓸쓸한데 / 몬저 든 짐장사의 / 곤한 말 한 소래여.
  지는 해 그림지니 / 오늘은 어데까지 / 어둔 뒤 아모대나 / 가다가 묵을레라.
  풀숲에 물김 뜨고 / 달빛에 새 놀래는 / 고흔 봄 야반(夜半)에도 /내 사람 생각이어.

  이 시에서 드러나듯이, 나그네가 산을 넘고 피곤하게 길을 가다 보면 주막을 찾아서 묵과 싶은 마음 간절해진다. 산모퉁이 돌아서 가노라니 외로운 주막이 쓸쓸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비록 먼저 주막을 찾아온 짐장수가 피곤한 말을 하더라도 들어주면서, 나그네는 이 주막에 머물까 더 가다가 묵을까 상념에 잠기기도 한다.
  이런 나그네들이 지금은 어떻게 되었으며, 어디로 갔는가? 옛날처럼 사람들이 걸어서 다니는 생활방식이 잊혀지고 있다. 우리에게 신작로라는 것이 건설되고, 그 길로 차량들이 이따금씩 다니면서 보행의 문화에 변화의 조짐이 일기 시작한 것은 근 1세기 가깝게 되었다. 물론 본격적인 변화는 대중교통 수단이 발달한 1970년대를 넘어서면서, 그 후 1990년대 이래의 자가용 승용차가 대대적으로 보급됨으로써 나타나게 되었다. 이런 변화는 사람들에게 걸어서 다니는 문화를 불필요한 것, 시대에 뒤지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적어도 한참 정도의 거리를 걸으면서 우리는 시장기와 피곤한을 느끼게 되고, 이때 어디에선가 쉬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된다. 걷는 문화, 걸으면서 생활하던 옛 방식들이 사라지면서 주막도 더불어 자취를 감추고 있다. 우리의 옛 풍물 가운데 하나가 이렇게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주막의 기능은 다른 것으로 대체 되거나 세분되어 있는 셈이다.

2. 주막의 형태와 기능

  1) 주막의 발생과 형태

   주막은 원(院)이 쇠퇴하면서 생겨난 것이다. 조선 초기에 조정에 의하여 체계화되었던 원 제도는 성종대에 이르러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기 시작하였으며, 17세기를 전후하여 그 기능을 상실하였다. 그리하여 원은 18세기 이전에 혁파되어 여점(旅店),점막(店幕),주막 등으로 불리는 상업적인 전문 숙박업소로 대치되었다. 또한 17~18세기에는 교통의 요지마다 주막촌과 정기 시장이 입지하게 되었으며, 대부분의 정기 시장이 주막촌에 발달하였다. 18세기로부터 19세기 말에 이르는 기간 중에 주막촌은 비로소 중심가로를 따라 건물이 배열된 가촌(街村)의 형태를 이루게 되었다.
  주막은 그 성격상 교통로의 중요한 마디나 연결점에 입지하게 된다. 대부분의 주막은 나그네의 편의를 제공하는 역할을 담당하였기에 그들이 통행하거나 쉽게 찾아들 수 있는 지점에 설립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주막은 기본적으로 도로에 연접하게 된다. 그럼에도 다시 그 입지조건상으로 볼 때에는 고개형 주막, 나루터형 주막, 시장형 주막으로 세분할 수 있다. 이 가운데 고개형 주막과 나루터형 주막은 특히 도로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을 것이다.
  최영준에 따르면, 사설 숙박업소는 주막이라고 불린 일반 여관과 보행객주(步行客主)라 일컫는 고급 여관으로 구분되었다. “주막은 대개 한두 개의 침실과 술청으로 이루어진 작은 건물이었던 반면에 보행객주는 여러 개의 침실, 대청, 마구간, 목욕집, 정자 등이 있는 큰 집이었다. 주막에서는 여러 사람이 합숙을 하였으나, 보행객주에서는 독방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고관과 부호들이 많이 유숙하였다.”
  공간 구성상으로 볼 때, 주막은 일반 가옥의 변형이 주류를 이루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주막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애초부터 전문적으로 숙박업, 음식업을 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옛 주막이 거의 사라져 버린 상태에서, 원형을 비교적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경북 예천군 풍양면 삼강 나루터의 주막을 통하여 주막의 공간 구성의 실상을 살펴보려고 한다. 모든 주막이 반드시 이러한 공간 구성을 취했다고는 볼 수 없어도 현존하는 주막의 적절한 하나의 사례로서 이해될 수 있다.
  이 주막을 보면, 일반 가옥의 공간 구성에다가 접대공간을 갖추고 있는 형태이다. 접대공간은 실내 접대공간, 반실내·반실외 접대공간, 실외 접대공간으로 3분된다. 실내 접대공간은 방이고, 반실내·반실외 접대공간은 야외와 접하는 봉당에 설치된 평상이며, 실외 접대공간이란 마당에 설치한 평상을 말한다. 이러한 공간 구분은 계절, 나그네의 방문 목적, 연령, 일행의 구분 등에 따라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주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술과 음식을 마련하고 접대하기 쉬운 공간 배치라고 할 수 있다. 삼강 나루터 주막에서도 그러하듯이 부엌과 접대공간을 연결하는 동선을 짧게 설정하고 있다. 이 점은 혜원 신윤복이나 단원 김홍도의 주막 그림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즉, 주모가 서서 거의 움직이지 않아도 손님들을 맞이하여 술을 판매하고 시중을 들 수 있게 되어 있다.
  주막에서 주로 일하는 사람은 여자로서 보통 주모(酒母)라고 일컬어졌다. 주모는 주막의 실권자로서 경영을 도맡아 함은 물론 모든 종업원들을 지휘 통솔하는 사람으로서 일찍 과부가 된 여인이나, 과거에 기녀(妓女)였거나, 남편이 있어도 벌이가 시원찮거나 실업 상태인 집의 아낙이 주모가 되는 경향이 강했다.

  2) 주막의 기능과 이용 풍속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주막은 단순히 술만 파는 곳은 아니었다. 주막을 경영하는 주체가 누구인가에 따라서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주막에서는 물건을 팔고 사는 상업활동에 상당히 관여하였다. 그것은 주막에 장을 따라다니던 상인들이 투숙하는 예가 많았기 때문에 더욱 가능하였던 일이다.
  한말 외국인들의 눈에 비친 주막이 어떠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당시 주막의 풍정을 이해할 수 있다.
  길가 헛간인가 할 만한 것이, 처마 밑에 말먹이통과 말뚝이 있음으로써 겨우 여관인가 여기게 된다. 장짓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면 흙으로 된 바닥에 거적자리를 깐 것이 방이다. 각재(角材)를 대여섯 치 정도 켜서 자른 베게 대여섯 개가 아무렇게나 거기에 뒹굴고 있다. 이 베개가 암시하는 것처럼, 이 방은 나그네 한 사람이 결코 독점할 수 없는 곳이다. 빈부의 차별도, 남녀의 구별도 없이 되는대로 몰아놓는 그것이 관례인 것이다. ……하지만 청소라고 별다른 공력은 들이지 않는다. 거적자리를 털어서 먼지를 한쪽 구석에 쓸어모을 뿐인데, 그 동안 먼지가 뽀얗게 서리는 것이다. 따라서 먼지는 결국 청소하기 전에 비해서 추호도 감소하지 않을 따름이다. 이 먼지는 실로 무수한 이와 빈대의 소굴인 것이다. 그래서 조심 없이 누울 양이면 밤새 이들의 공격으로 인하여 한잠도 잘 수가 없는 것이다.

  이 기록은, 한말‘의 주막이란 것이 누추하고 변변치 못한 쉼터였을 뿐만 아니라, 성별 구별까지도 주막에서는 무시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글을 쓴 비숍 여사는 “익술할수록 조선의 주막은 안정을 취할 수 있는 곳이라 취한 말꾼 얼굴도, 또 말의 울음소리도 마침내는 안면(安眠)을 방해하는 것은 아니었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달레는, “길가에 있는 주막은 지저분한 누옥으로 거기에는 거의 아무것도 없으며, 대개의 나그네들은 그럴 수만 있으면 자기들의 필수품을 몸에 지니고 다닌다”고 하였다.
  주막의 기능 중에 가장 두드러진 것은 아무래도 손님에게 술을 파는 것이었고, 그 다음이 요기를 할 수 있도록 밥을 제공하는 것, 나그네를 위한 잠자리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주막에서 팔던 술은 막걸리와 소주 정도에 한정되다시피 했지만, 돈이 있는 사람에게는 특별히 빚은 술을 팔기로 하였다.
  서울에서 과거라도 치르는 시기에는 과거 보러 가는 손님들로 주막은 만원을 이루게 된다. 지위나 권세가 낮으면 돈을 낸다고 해도 주막의 상석을 차지하기 어려웠다. 양반이 판을 치고, 양반중에서도 권세깨나 부리는 자가 특실을 차지하여 거드름을 피우는 것이다. 그래서 하잘것 없는 사람도 고관대작의 일가친척처럼 허장성세를 부리면 특별한 예우를 받기도 했다. 또 손님 대접을 눈치껏 하지 못하면 주막 주인은 손님으로부터 골탕을 먹는데다가 술값,밥값 모두 떼이고 심지어 곤장을 맞는 일도 있었다는 설화가 심심찮게 전해온다.
  주막을 찾는 술꾼들의 태도도 반듯한 것만은 아니었다. “가난한 술꾼들은 남의 술을 축내거나 슬금슬금 주모의 눈치를 보아 공짜 안주나 챙기며 주막에 붙어살다시피 한다. 이들은 술을 먹고 싶고 돈은 없고 하여 추파를 던지게 되는데, 주모가 먼저 눈치를 채어서 대개 물 탄 먹걸이로 푸대접을 했다고 한다.” 또한 주막에는 외상이 많았다. 이 경우 “대개 주모가 앉은 옆벽이나 기둥에 금을 그어서 술값을 기록해 두거나, 나무막대기에 칼로 눈금을 그어서 표를 해두었다. 오늘날에서도 외상을 하게 되면 ‘그어 두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여기서 연유된 것이다.”
  오상순은「한잔 술」이라는 시를 통하여 주막을 찾는 나그네의 술 마시는 심경과 태도를 노래하고 있다.

  나그네 주인이여 평안하신고
  곁에 앉힌 술단지 그럴법 하이
  한잔 가득 부어서 이리 보내게
  한잔 한잔 또 한잔 저달 마시자
  오늘 해도 저물고 갈 길은 머네
  꿈 같은 나그네 길 멀기도 하다.

  나그네 주인이여 이거 어인 일
  한잔 한잔 또 한잔 끝도 없거니
  심산유곡옥천(深山幽谷玉泉)에 홈을 대었나.
  지하천척수맥(地下千尺水脈)에 줄기를 쳤나
  바다는 말릴망정 이 술 단지사
  꿈같은 나그네 길 멀기도 하다

  나그네 주인이여 좋기도 허이
  수양(垂양)은 말이 없고 달이 둥근데
  한잔 한잔 또 한잔 채우는 마음
  한잔 한잔 또 한잔 채우는 마음
  노방(路傍)에 피는 꽃아 서러를 말아
  꿈 같은 나그네 길 멀기도 허다.
  나그네 주인이여 설기도 허이
  속 깊은 이 한잔을 누구와 마셔
  동해바다 다 켜도 시원치 않은
  끝없는 나그네 길 한 깊은 서름
  꿈인 양 달래보는 하염없는 잔
  꿈 같은 나그네 길 멀기도 허다.

  주막을 찾아들면 으레 다른 사람과 만나게 되고, 그래서 그들과 한잔 술을 나누어 마시는 것은 한국인에게 흔히 있는 일이다. 술을 좋아하는 나그네라면 술독을 끌어안고 술을 마시기도 한다. 주막의 주인과 손님의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기도 한다. 한국에서 술은 남성 본위의 기호품으로서 연령과 성별 지위의 상징이었다. 그럼에도 주막의 주모는 그 지위나 연령에 관계없이 손님이 청하면 술을 마실 수 있었다.
  김용호의 시「주막에서」는 길가 주막을 찾아 막걸리잔을 기울이던 나그네의 심정과 모습을 아련하게 보여준다.

  어디든 멀찌감치 통한다는
  길 옆
  주막

  그
  수없이 입술이 닿은
  이 빠진 낡은 사발에
  나도 입술을 댄다.
  흡사
  정처럼 옮아 오는
  막걸리 맛
  여기
  대대로 슬픈 노정(路程)이 집산(集散)하고
  알맞은 자리, 저만치
  위엄 있는 송덕비(頌德碑) 위로
  맵고도 쓴 시간이 흘러가고……,

  세월이여!

  소금보다 짜다는
  인생을 안주하여
  주막을 나서면,

  노을 비낀 길은
  가없이 길고 가늘어라만,

  내 입술이 닿은 그런 사발에
  누가 또한 닿으랴
  이런 무렵에.

  민초들을 잘 보살폈다는 대가로 근엄한 자태로 서 있는 송덕비를 곁에 둔 길가 주막에서 소금보다 더 짜다는 인생을 안주하여 술을 마시는 나그네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거기다가 수없이 많은 사람이 입술을 대어 빨고 또 빨던 이 빠진 사발에 막걸리를 부어서 들이켜는 모습은 길가 주막에서 흔히 있을 법한 장면이다.
  주막에서 사용하는 기물이 보잘것 없는 것이었음은 1935년에 백석이 쓴 시「주막」에서도 마찬가지로 묘사되고 있다.

  호박잎에 싸오는 붕어곰은 언제나 맛있었다.

  부엌에는 빨갛게 질들은 팔모알상이 그 상 우엔 새파란 싸리를 그린 눈알 만한 잔이 뵈였다.

  아들아이는 범이라고 장고기를 잘 잡는 앞니가 뻐드러진 나와 동갑이었다.

  울파주 밖에는 장꾼들을 따러와서 엄지의 젖을 빠는 망아지도 있었다.

  자주 찾는 시장가의 주막에서, 붕어를 푹 고은 것을 호박잎에 싸오면 일품의 음식이었던 모양이다. 주막 부엌에는 옻칠이 닳을 정도로 반질반질하게 된 팔각판형 소반이 준비되어 있어서 술상이나 밥상으로 이용되고 있다. 눈알만큼 작은 사기 술잔은 싸리가 푸르게 그려진 청화백자였던 모양이다. 주막집 아들 범이는 장고기를 잘 잡았지만, 앞니가 뻐드러져서 제대로 보살펴지지 못한 서민가 아이의 얼굴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런 주막 밖에는 장꾼들이 시끌벅적한 소리와 함께 젖을 빠는 망아지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것이 시장가 주막의 한 단면이리라.

3. 문경 지역 주막의 흔적과 특성

   과거 문경에 있었던 원(院)은 조령원(鳥嶺院), 요광원(要光院), 관음원(觀音院), 관갑원(串岬院), 회연원(回淵院), 개경원(開慶院), 불정원(佛井院), 보통원(普通院), 동화원(桐華院), 견탄원(犬灘院) 등이다. 앞에서 설명한 바 있듯이 이들 원을 중심으로 하여 주막이 형성되었다. 문경 지역 원의 특징을 찾는다면 거의 험한 길목에 자리잡고 있다는 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주막도 자연히 영남대로의 험난한 길목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여기서는 문경 지역에서 비교적 그 흔적과 자료를 남기고 있는 두 곳의 주막에 다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하나는 새재의 주막촌이며, 다른 하나는 마성면 돌고개의 주막이다.

  1) 문경새재의 주막촌과 그 성격

   『해동지도(海東地圖)』의 조령성 그림에는 현재의 1관문이 동성문(東城門)으로, 2관문이 주서관(主西關)으로, 3관문이 조령관(鳥嶺關)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동성문으로 들어가면 길 우측에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이 초곡주막(草谷酒幕)이다.
  이 지도에 나오는 초곡주막은 오늘날의 상초리(上草里)에 해당한다. 한편, 이규태에 따르면, 새재 아래의 하초리 마을은 고려시대에 존재했던 화봉원(華封院)으로부터 비롯된다. “이화령에서 흐르는 물줄기와 조령천이 마주치는 목에 화봉원이 있었다 한다. 고려 때의 저명한 학자 이규보(李奎報)는, “천하의 백성들이 모두 축헌하려는데 어찌하여 화봉의 이름을 혼자서 독차지하고 있는가” 라고 읊었다. 고대 중국 화(華)란 땅을 봉(封)함 받는 장자가 요(堯)임금을 찾아가 ‘수(壽)하고 부(富)하며 아들 많이 낳으시라’고 축수했던 고사를, 원의 이름인 화봉에 비유하여 읊은 것이다. 이 화봉원이 커져서 하초리(下草里)란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이 상초리 마을은 군사 요지인 조령산성 안에 있는 마을이었다. 따라서 이 초곡 주막촌 주민들은 평시에는 첩보요원으로 활용되고, 유사시에는 수성(守城)에 동원되었다. 특히 조령 일대의 초곡방(草谷坊), 동화원 등지의 주민들은 산성별장(山城別將)의 보호하에 생업(주막 운영)에 종사하면서 첩보요원, 산불방지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새재의 주막촌은 1930년대까지만 해도 무척 번성하였다. 상인,나그네,과거 보러 가는 선비들로 인하여 그 아래 동네가 주막 마을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상푸실[上草里],중푸실[中草里],하푸실[下草里]이 온통 주막 마을이었고, 6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막걸리와 돼지고기, 산채 비빔밥을 파는 주막이 많아서 흥청거렸다고 한다.

  2) 마성면 신현리 돌고개 주막의 정체

   마성면 신현리에 석현(石峴)이라는 고개가 있는데, 이 고개는 옛 영남대로의 중요한 길목이었다. 조선 초기의 권근(權近)이「견탄원기(犬灘院記)」에서 소백산맥을 넘는 길 가운데 가장 험하다고 한 길이 이 고개 일대인 것으로 보인다.『신증동국여지승람』권29,「문경현 역원조」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여러 골짜기의 물이 모여서 내를 이루어 관갑에 이르러 비로소 커진다. 관갑은 가장 험하여 벼랑을 따라서 사닥다리 같은 길을 열어 사람과 말이 다니게 하였다. 위에는 깎은 듯한 절벽이고, 아래로는 골짜기여서 위험하기 짝이 없고 좁디좁은 길이다.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은 모두 다리가 후들거리고 오싹하게 마음을 졸이어 몇 리를 지난 뒤에야 평탄한 길에 이르게 되고 내를 건너게 되는데 그곳이 개여울[犬灘]이다.

  그리고 조선 초기 서거정(徐居正)이 지은 문경 팔영시(八詠詩)의 둘째 시는 관갑천(串岬遷)에 대하여 읊고 있을 정도로, 관갑천은 경치가 빼어난 곳이다. 이 관갑천에 대해『신증동국여지승람』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관갑천은) 용연의 동쪽 벼랑을 이르는데, 토끼벼랑[兎遷]이라고도 한다. 돌을 깨고 뚫어서 뜬 사다리처럼 길을 내었다. 굽어 돌며 구불거리는 길이 거의 6~7리나 되는데, 이어져 오는 전설에 고려 태조가 남쪽으로 정벌하여 이곳에 이르러 길이 없었는데, 토끼가 벼랑을 따라 달려가므로 드디어 길을 열고 지나갔으므로 토끼벼랑이라 부른다고 한다. 그 북쪽 끊어진 봉우리에 돌로 쌓은 성의 남은 터가 있는데, 옛날에 막아 지키던 곳이다.

  이토록 관갑천은 험난하기 짝이 없던 길이었다. 최영준에 의하면, 영남대로상에는 다섯 곳의 천도(遷道)가 있었는데, 천도란 하천의 절벽을 파내고 건설한 길을 말한다. 관갑천은 바로 그러한 천도로서 벼랑길이었다. 그러므로 험한 길목에 원을 두고 나그네들이 머물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돌고개는 또 하나의 별명을 가지고 있었으니, 바로 ‘꿀떡고개’이다. 마성면 오천리 새터 강윤구 할아버지가 들려준, 이 고개에 대한 전설은 다음과 같다.

  이 통로가 어떤 통로냐 하면 서울 과거 보러 가는 통로거든요! 문경새재를 지나기 전에 여기를 지나지 않으면 못 갔다는 말이지. 거기가 지금으로 말할 것 같으면 점촌으로 해서 요 오면 중간으로 사람하고 집이 없어. 억수로 높아. 그걸 노린 사람이 고 토째비비루[토끼비리, 즉 관갑천을 말함 - 필자] 제일 꼭대기에 숯불을 피와 놓고 요새처럼 설에 떡 하는 골비떡 있잖아요? 그거를 썰어놓고 조청, 엿이지요. 엿을 꽈 놓고서는 구워가지고 발라서 놓고 이랬어요. 안 그래도 맛이 좋을 판인데 온나절 종일 있었다가 오니께 떡이 있거든요. 안 사먹을 사램이 없어요. 참 달게 먹고 갔는데 그게 호가 나가주고 성황당 꿀떡이 되어뿌렸어요.
  그래서 그 고개를 꿀떡고개다. 참고 삼아 얘기하는데 내가 44년도에, 그러니깐 60년 가까이 됐지요, 결혼을 했는데 내 저 안동 계시니까 잘 이시겠지. 도산서원 그짝에 있는 운천이라는 동네래요. 거 가니껜 그때 장인이 강 서방. 예. 요새도 서낭당에 꿀떡 파나? 과거 이 얘기 그대로야. 그만큼 유명한 곳이래요. 그런데 요새는 아마 40대 미만은 성황당 꿀떡은 모르지. 그런 유래가 있어요.

  이 이야기는 돌고개가 어찌하여 꿀떡을 파는 ‘꿀떡고개’가 되었는지에 대하여 설명해 주고 있다. 비록 그 역사가 얼마나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하더라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 꿀떡을 사먹으면서 돌고개를 넘어다녔음을 능히 짐작하게 한다. 문경에 사는 제보자가 장가를 들었을 때 경북 안동에 사는 장인이 그 꿀떡을 물을 정도로 유명한 것이었다.
  원래 영남대로였던 이곳 ‘토끼비리[串岬遷]’, 그리고 삼국시대의 성이던 고모산성(姑母山城)의 날개성[翼城]으로 조선 후기에 축조된 석현성(石峴城)의 성루였던 진남루(鎭南樓)를 넘어서 마성면 신현리를 가자면, 고갯마루에 성황당이 하나 있고 그 옆에는 큰 신목이 서 있다. 이규태는 성황당과 신목이 있는 이곳 꿀떡고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 고개는 새재를 넘는 선비들이 요기를 위한 떡점 고개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과거를 보러 가는 선비들은 이 꿀떡고개에서 꿀떡을 사먹으며 과거에 붙게 해달라고 주술적 기원을 했던 것이다. 지금도 입학시험장에 엿을 붙이고 찰떡을 짓이김으로써 붙는다는 주술을 합격에 유감시키듯이 옛날에도 과거공부하는 아들에게는 주기적으로 점착성이 있는 떡이나 엿, 꿀을 먹이는 것이 상례가 되어 있었다. 아마 어떤 머리 좋은 상인이 이 고개에 꿀떡점을 벌인 것이 시초가 되어 이 고개를 급제의 기도처로 키워나갔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 꿀떡고개 마루 느티나무 고목 아래에 신당이 하나 차려져 있음을 보고 급제 소원의 신앙적 정착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꿀떡고개가 오직 선비들만이 통행하던 것처럼 설명된 점에서는 부풀려진 면이 없지 않다. 과거 영남대로를 이용하던 모든 사람들이 이 고개를 넘나들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니 때로는 과거 보러 가는 선비, 때로는 상인들의 무리, 혹은 신혼행렬, 때로는 단순한 볼일을 가는 사람들이 모두 이 고개를 거쳤다. 앞에서 들어본 강윤구 할아버지의 이야기처럼, 험로에 지치고 허기를 느끼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꿀떡을 사먹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이 꿀떡은 오직 과거보러 가는 선비들만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나그네들을 위한 노점상의 형태로 이해된다. 다만 판매하는 물품이 꿀떡이라는 점에서는, 선비들이 과거길이라는 점과 깊이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엿보인다.
  최근에 발견된, 1797년도 성황당 건립시의「상량문」을 보면, 과거 급제와 연관된 내용은 전혀 없다. 따라서 이 성황당이 애초 과거 급제를 비는 신앙적 성소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의미가 부여되면서 과거 급제와 깊은 관련을 맺어왔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한 근거는 성황신의 좌정 유래담과 성황신을 그린 그림에서 확인된다.
  성황신 그림으로는 여인상 2개와 남자상 1개가 모셔져 있는데, 이 가운데 남자상은 완전한 관복 차림을 하고 있는 젊은이이다. 이는 어느 성황당에 모셔진 신상에서도 보기 드문 사례로 이해된다. 언제부터 이런 관복 차림의 화상이 모셔진 것인지는 불분명하지만, 관복 차림의 남성 그림은 영락없이 과거에 급제한 젊은 선비의 모습이다. 그런 점에서 이 성황당의 성황신은 과거길의 애환, 염원 등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어 보인다. 아니나 다를까, 이 성황신 이곳에 좌정하게 된 유래에 대한 이야기는 과거길 선비와 관련하여 매우 그럴 듯하게 전개된다.

  (전략) 이기 왜 성황당이 생겼나 하면, 옛날에 거참 사람이 먼제 살고 하루 종일 가도 사람 한번 못 보고 살고, 그런데 어떤 선비 하나가, 한양을 가자면 이 길 말고는 갈 수가 없어 이짝 말고는.
  성황당 이름이 분명했는가 몰라도 고 오니께 약간 해가 저물어. 저 밑에 보니께 집이 하나 있어. 거길 드갔다네. 그래 드갔는데 예쁜 여인이 나와갖고, 하룻밤 자고 일어나니 한데서 문을 이래 열라고 하더래여. 여인의 목소리라. 내가 잠깐 드가서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이라더라고. 그래 할 수 없이 뭐. 그래 거절할 수도 없고 해서 그 뭐라. 들어오라고 그래 모양이라.
  그래 문을 열고 들어왔거든. 그 여자가 참 과연 참 그야말로 보니깐 이쁘더래. 내가 여게서 몇 년을 살아도 내 집에서는 사람 하나 온 적이 없다. 그랬어. 오늘 참 선비께서 오니 내 마음이 좋으니 그래 우에 그리그리 그러다 보니 합쳐서 한테 거 하룻밤을 지낸 모양이라. 지내가지고 그 이튿날 떠날 적에 그 여인이 하는 말이 당신이 요번에 가믄 글귀가 이러이러한 게 나오고, 제목이 나오고, 과거를 하되 돌아올 적에 나를 괄신 말아주시오. 당신 과거는 합니다. 그리고 떠났어.
  그 사람이 그 길로 떠나니 과연 가니께 글씨도 그 글씨고 해서 과거를 급제를 했어. 이 사람이 내리갈 때는 어데로 내리갔나 하면 저짝 길로 내려왔대여. 전라 어데 좌도로 왔데래여.그래 하룻밤 날 가만히 생각을 하니, 전에 생각이 나거든. 내가 그런 이력을 배반을 했구나. 그래 그 길로 이 사람이 군졸도 밑에 따라다니는 졸개들한테 얘기를 않고 이리 온 모양이라.
  와보니 집은 있는데 사램이 없어. 쪼금 있다니께 어디서 찬 돌개바램이 쌔앵 불고 문이 휙 열리더니 뱀 한 마리가 들어오더래여. 고만 선비를 데리고 탱탱 감아서 고만 둘이 다 같이 죽었어. 그 왜냐면 이 여자는 참다참다 못해서 상사병으로 죽어서 뱀이 됐다는기라 말하자면. 이렇게 낭패가 났대여. 그래 날 적에 아 이 동네 큰일났다.
  동네 책임자를 요즘 말하자면 이장택이지. 그 정말로 사흘밤 꿈에 내가 사실은 동민을 해코지할라고 하는 게 아니라 하도 서러워서 내가 한숨을 쉬느라고 쉬다 보니까 그리 됐으니 나를 좀 받들어 위해주면 내가 동네를 편케 해주마 하고 사흘고 내리 현몽을 하거든. 그래 그러가주고. 지방 노인분들이 모의를 해서 지은 집이 성황당을 짓대여. 지었어. 그 지어가지고 위하는 거는 그래그래 됐대여.

  이러한 성황신의 좌정 유래담은 앞의 성황당 상량문과는 전혀 별개의 내용이다. 아마도 상량문의 내용이 유자들의 인지구도를 담고 있다면, 이 좌정 유래담은 민중들의 인지구도를 반영하고 있는 것 같다. 과거를 보러 가는 선비들이 과거에 급제한 이후에도 그것이 누구와 맺은 약속이든 잘 지켰을 때 복을 받는다는 민중의식을 담고 있다. 또한 이런 전설은 선비들에게도 자신의 행실에 행여 불찰이 없었는지 되돌아보도록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이 전설에서 하룻밤을 묵은 집은 사실상은 주막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이 일대에 어떤 주막이 있었단 말인가? 아직까지 그 정체가 명확하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진남루에서 상황당에 이르는 중간 지점에는 몇 개의 주막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현장을 답사해 보면, 진남루에서 완만한 고개를 오르는 오른쪽으로는 산길 주변답지 않게 제법 평평한 집터 같은 것들이 여러 개 있다. 주민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바로 이곳에 몇 개의 주막이 있었다는 것이다. 마치 조령성의 동성문(東城門,주흘관)을 들어섰을 때 길 우측으로 초곡주막(草谷酒幕)이 있었던 것처럼, 석현성의 남쪽에 있던 진남루를 들어서면 바로 주막이 있었다. 이 둘은 참으로 유사한 배치이고 구성인 것 같다.
  선비들이든 상인이든, 이곳 돌고개를 넘어 오르다가 진남루를 거쳐서 주막에서 잠시 쉬거나 아예 숙박을 하고 갔던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꿀떡도 이들 주막에서 만들어 판 것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왜냐하면, 농사짓던 농민들이 언제 꿀떡을 만들어서 팔러 나오겠는가 하는 점에서 의문이 생기기 때문이다. 게다가 주막을 경영하던 사람은 나그네를 상대로 하여 장사를 하는 데 익숙했던 반면에 일반 농민들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꿀떡은 성황당의 성황신과 결합되어 과거 급제의 염원을 실현하는 하나의 매개물로서 그 의미가 정착되어 온 것 같다. 주막에서 꿀떡을 먹든 아니면 성황당 쪽으로 와서 먹든 간에 점착성이 큰 꿀떡, 끈기가 있는 꿀떡을 먹고 과거에 급제하여 금의환향할 수 있기를 빌었음직하다. 그리하여 돌고개, 진남루, 성황당, 주막, 꿀떡은 이 일대의 영남대로 고갯길 문화의 세트였다고 할 수 있다.

고갯길의 이야기와 노래

   한양명(안동대학교 국학부 민속학전공 교수)

호랑이가 산신이고 산신이 호랑이다. 가장 두려운 존재를 믿음직한 신으로 환치하는 민중들, 절묘하지 않은가?

1. 새재가 새재인 까닭

  새재는 왜 새재일까? 새재의 ‘새’는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 ‘새’가 어떤 의미를 갖느냐에 따라서 새재의 의미는 달라진다. 어떤 이는 조(鳥)를 뜻한다 하고 어떤 이는 초(草)를 뜻한다고 한다. 또 어떤 이는 신(新)을 뜻한다 하고 어떤 이는 간(間)을 뜻한다고 한다. 모두 나름대로 의미를 갖고 있다.
  먼저 날아다니는 새와 문경새재는 어떤 연관이 있을까? 새재를 한자로 표기하면 조령(鳥嶺)이다. 조령은 ‘새들도 날아 넘기 힘든 고개’라는 뜻에서 붙였다고 한다. 문헌에 조령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1531년(중종 26)에 완성한『신증동국여지승람』이다. 이 책의「문경현 산천조」에는 “조령은 현의 서쪽 27리, 연풍현의 경계에 있는데 초점이라고도 부른다[鳥嶺 在縣西二十七里 延豊縣界 俗號草岾]”고 적혀 있다. 이후에 발간된『팔도지리지』(1650년대),『동국여지지』(1660년대),『여지도서』(1757년),『문경현지』를 비롯하여『조선왕조실록』등 각종 문헌에는 ‘조령진(鳥嶺鎭)’,‘조령산성(鳥嶺山城)’ 등과 같이 조령이라는 이름을 널리 쓰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서 달리 주목되는 것은 초점(草岾)이라는 이름이다. 새재를 달리 초점, 즉 ‘풀고개’라고 불렀다는 것이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초점은 속칭 정도로 거론되었지만 이보다 이른 시기의 문헌에서는 초점을 공식적인 이름으로 거론하고 있다. 1414년(태종 14)에 편찬하여 여러 번의 개찬·개수과정을 거쳐 1451년(문종 1)본이 남아 있는『고려사』지리지「문경군조(條)」를 보면, “험조처가 셋 있는데 초점(현의 서쪽), 이화현(현의 서쪽), 관갑천(현의 남쪽)이다[險阻處 三 草岾 在縣西 伊火峴 在縣西 串岬遷 在縣南]”라고 적혀 있다.
  뒤이어 1425년(세종 7)에 편찬된『경상도지리지』의 경상도 사방경계와 험조처, 1454년(단종 2)에 완성된『세종실록지리지』의 경상도 대천(大川), 문경현 험조처에도 초점이라는 이름이 나타난다. 조선시대에 이 지역의 행정구역명은 문경현 초곡(草谷)이었다. 지금도 상초리(우푸실), 하초리(아래푸실)라 하여 그 지명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로 보아 적어도 1400년대까지는 고개가 자리잡고 있는 지역명에 근거하여 초점이라는 이름, 즉 풀고개로서 새재라는 이름이 널리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다가 조선중기에 영남대로의 관문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조령이라는 이름이 주어지고 민간에서도 통용된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새로운 고개로서 새재이다. 새재는 과연 ‘묵은 재’가 아닌 새재인가? 그렇다. 새재는 이미 있던 고개인 ‘하늘재’를 재쳐두고 새로 개척한 고개이다. 하늘재는『삼국사기』의「신라본기」에 계립령(鷄立嶺)이라 기록된 고개로서 서기 156년 신라 아달라 이사금 3년에 개척되었다[阿達羅尼師今 三年 夏四月 開鷄立嶺路]. 문경새재와 직선거리로 약 6㎞ 정도 떨어져 있는 하늘재는 문경시 관음리와 충주시 미륵리 사이의 고개이다. 이 고개는 조선 초기에 문경새재가 개통되기 이전까지 영남과 기호를 잇는 주요 교통로로서 무려 1천여 년 동안 이 지역 고개 가운데 으뜸이었다. 그러다가 새재에 제 몫을 넘겨주고 물러났으니 ‘하늘재’는 ‘묵은 재’이고 ‘새재’는 ‘새로운 재’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새재가 과연 사이에 있는 고개인가, 하는 문제이다. 그렇다. 새재는 사이에 있는 고개이다. 새재를 중심으로 놓고 보면 이우릿재(이화령)와 하늘재가 양편에 있으니 새재의 새를 ‘사이’의 새라고 할 법도 하다.
  지역 사람들은 새재를 두고, 날아다니는 새도 울고 넘을 정도로 높은 재, 풀이 무성한 재, 묵은 재를 두고 새로 만든 재, 두 고개의 사이에 있는 재 등의 다양한 의미를 부여하였다. 아리랑을 두고 스무 개 남짓의 기원설이 말들어진 까닭이 그러하듯이 새재를 두고 적지 않은 유래설이 만들어진 것도 이 지역 사람들에게 새재가 각별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2. 새재 성황신과 최명길

  최명길(崔鳴吉, 1586~1647)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것이 있다. 1636년 병자호란을 당하여 척화론(斥和論) 일색의 조정에서 홀로 강화론(講和論)을 주장하였고, 그해 12월 청군의 침입으로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으로 들어가서는 주전론(主戰論)이 일색인 가운데에서도 주화론(主和論)을 주장하여 난국을 현실적으로 타개하려고 한 보기 드문 현실주의자가 바로 최명길이다. 대의명분에서는 분명히 척화론자(주전론자)들에게 밀리는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현실을 냉철하게 판단하고 신하로서, 선비로서 도리를 다한 이가 바로 최명길인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지역에서 널리 회자되어 온 전설은 그에게 강화론(주화론)의 논리를 제공한 것이 새재 성황신이라고 말한다. 전설의 내용은 이러하다.
  최명길이 어렸을 때 고향인 청주에서 안동부사로 있는 외숙부를 찾아가다 새재 동쪽에 이르러 늙은 여인을 만나 동행하게 되었다. 그 여인은 새재 성황신이었다. 성황신은 “안동부사가 서낭의 위패를 가져다가 창고 속에 넣어 버렸으므로 그를 죽이러 가는 길”이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최명길은 성황신을 달래어 돌려보내고 안동부사에게 말하여 위패를 되돌려놓고 서낭신에게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그 후 여러 달 만에 집으로 돌아오는데, 이번에는 새재 서쪽에 이르러 서낭신을 또 만나게 되었다. 서낭신이 말하기를, “만주에서 천자가 나서 천하의 신들이 모두 치하하러 가는 길”이라고 하였다. 최명길이 놀라며 크게 근심하니, 서낭신은 “이는 천운이니 그대도 천명을 어기지 말고 나라를 구하라”하고는 사라졌다. 최명길은 뒷날 병자호란 때 이 일을 생각하고 청과의 화친을 주장하였다.
  또 다른 각편(version)에는 “안동좌수가 성황신께 폐백으로 바쳐진 치마를 가져다가 딸에게 입히자 성황신이 딸을 죽이려고 하였는데 이 사실을 성황신에게 듣고 양해를 구한 최명길이 좌수 집을 찾아가서 치마를 돌려주게 함으로써 딸을 살려주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내용은 다르지만 최명길이 성황신과 소통해서 타인의 어려움을 해결하고, 뒷날 국난을 당하매 성황신의 도움으로 슬기를 발휘하게 되었다는 내용은 다를 바가 없다.
  전설이, 글을 갖지 못한 민중의 의식의 역사라고 하였을 때 나는 이 전설을 통해서 몇 가지를 읽는다. 성황신은 갖가지 애환을 안고 새재를 오가는 민중의 신이다. 민중이 모시는 신에는 그들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 따라서 성황신은 민중 그 자체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민중의 대변자로서 성황신은 왜 최명길을 도왔을까? 최명길의 어떤 면모가 전설 속에서 그를 긍정적인 인물로 형상화하게 했을까?
  최명길은 질 게 뻔한데다, 지고 나면 종묘사직의 위기는 물론이고 민중의 삶이 도탄에 빠질 것이 분명한 전쟁을 피하려고 한 주화파였다. 민중은 오랜 전쟁 경험을 통해, 멀리 갈 것도 없이 불과 한 세대 전 임진왜란기의 처참했던 삶을 통해 전쟁을 두려워하고, 아니 혐오하고 있었다.『연려실기술』에 의하면 사람이 사람고기를 먹어야 할 정도로 인간이기를 포기해야 했던 것이 임진왜란이었다.
  이런 민중의 입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전쟁을 주장하는 주전파들과 최명길 사이에서, 전설의 전승 집단인 민중은 망설이지 않고 최명길의 손을 들었다. 그리고 기꺼이 그를 응원하였다. 최명길에게 최선의 방책으로서 화친을 알려준 게 누구던고? 성황신이고 민중이다. 성황신이 민중이고 민중이 최명길이며 최명길이 성황신인 의식의 민중사적 순환이 이 전설속에 갈무리 되어 있다.

3. 새재와 신립장군

  임진년, 동래를 공략한 왜군이 파죽지세로 북상하자 선조는 당시 최고의 무용을 자랑하던 신립(申砬,1546~1592) 장군을 삼도순변사로 임명하며 보검을 하사했고, 그는 유성룡(柳成龍)의 휘하에 들어가 부장 김여물(金汝) 및 80명의 군관과 모병 수백 명을 이끌고 충주로 떠났다. 이때 군관 60여 명과 군졸 4천여 명을 이끌고 남하하였던 순변사 이일(李鎰)이 상주에서 대패하고 쫓겨와서 죽기를 청하였으나 그의 재주를 아껴 오히려 선봉에 세웠다. 이일은 왜군이 대적할 수 없을 정도로 대군이라고 보고하였다. 이에 김여물 등이 아군의 수가 열세임을 들어 지형이 험한 조령에 잠복하여 전투를 벌일 것을 주장했다. 그럼에도 신립은 넓은 벌판에서의 기병전을 극구 주장하여 충주성의 서북쪽 10리 지점에 있는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다. 마침내 4월 28일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적군의 대대적인 포위 공격을 맞아 아군은 참패했고 미처 피난 준비를 하지 못했던 충주의 백성들도 많은 희생을 당하였다. 이에 신립은 그를 따르던 김여물 등과 함께 남한강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역사적 사실은 이러하나 전설은 다른 사연을 소개하고 있다.

  임란이 일어나고 영남에서 대패하자 선조는 신립을 급파했다. 북진하는 왜군을 저지하기 위해서 제 장졸들과 문경에 진을 치고 있는데 도승이 나타나 “조령에 진을 치면 적을 격퇴할 것”이라고 일러주었으나 신립은 결정을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꿈속에, 북한산에서 만난 적이 있는 처녀가 나타나서 “좁은 새재를 버리고 충주의 달래강에 배수진을 치면 대승할 것” 이라고 하였다. 이에 신립은 부하들의 청을 물리치고 탄금대로 가 배수진을 쳤으나 대패하고 죽음을 맞았다.

  전설 속에서, 탄금대에 배수진을 치도록 한 것은 북한산에서 만난 적이 있는 처녀이다. 그렇다면 이 처녀는 누구인가? 상당히 긴 전설이라 줄거리만 소개했지만 원래의 전설 속에는 액자의 형태로 신립과 북한산 처녀의 사연이 소개되어 있다.

  젊은 시절 신립이 북한산으로 사냥을 갔다. 돌아오는 길에 날이 어두워서 민가를 찾아드니 처녀 혼자만 있었다. 자고 가길 청했으나 처녀는 꺼리면서 “이 집에는, 자기를 탐하다가 아버지에게 죽음을 당한 머슴귀신이 있는데 그 귀신이 일가족을 죽이고 지금은 자신만 남아 있노라”고 말하였다. 이에 신립은 귀신을 잡겠노라 약속하고 마침내 귀신이 나타나자 활로 쏘아 죽였다. 다음날 처녀는 따라가길 원했으나 이미 혼인한 신립은 장인이 두려워 처녀의 청을 거절하고 길을 나섰다. 이에 처녀는 지붕에서 떨어져 자결하였다. 그 뒤로 신립이 전투에 나갈 때마다 그 처녀가 나타나서 작전을 얘기해 주었고, 그대로 하기만 하면 백전백승이었다.

  역사 속의 신립은 전술을 잘못 택해 패배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비운의 장군이지만 전설 속의 신립은 귀신의 말을 쫓다가 패망한 어리석은 장수이다. 그리고 그 패망의 원인은 외면한 사랑에 있다. 처녀는 자신의 애틋한 사랑을 외면한 신립이 보는 앞에서 죽음을 택하였고, 결정적인 순간에 신립을 배신함으로써 못다 한 사랑의 한을 풀었다.
  왜 민중은 신립의 비극을 한 편의 치정 드라마로 만들었을까? 여기서 나는 민중의 가치관을 본다. 민중은, 오랑캐와 화친하길 주장함으로써 유가(儒家)의 명분을 포기하고 스스로 고독한 자리를 자청함으로써 민중에게 돌아갈 고통을 차단하려 한 최명길을 택했지만, 부하들의 현실적 판단을 장수의 권위로 부정하고 자신의 그릇된 판단을 믿다가 수많은 민중을 죽음으로 몰고 간 신립을 버렸다. 민중의 입장은 분명하다. ‘누가 그들의 삶에 도움을 주었고 누가 그들의 삶에 해를 끼쳤는가?’ 하는 것이 판단의 기준인 것이다.
  전설은 사후에 형성되고 오랜 세월을 거치며 전승되는 것이기에 특정 사건에 대한 민중의 해석과 평가를 담고 있다. 최명길은 성공했고, 신립은 실패했다. 민중은 언제나 성공한 자의 손을 들어줄까? 그렇지 않다. 민중은 비록 실패했다 하더라도 그들의 삶은 위한 자, 위하려고 한 자, 위할 가능성이 있는 자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마의태자, 궁예, 최영, 임경업 등에 이르기까지 실패한 인물들도 신이 되었다. 성공과 실패를 떠나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이들은 하다못해 마을의 서낭신으로라도 좌정했다. 그런데 신립은 이도 저도 아니다. 그러기에 신립의 실패는 그저 자업자득의 실패일 따름이다.
  그렇다면 이 전설에서 신립을 패망으로 이끈 처녀는 무엇을 상징할까? 물론 민중이다. 민중은 시공을 뛰어넘는다. 사후(事後)의 민중은 사건을 해석하면서 사전(事前)으로 넘어가고, 사전의 가상적 시공에서 대본을 쓰며 자신의 배역을 결정한다. 민중의 맡은 배역은 ‘사랑을 외면당한 비련의 처녀’이다. 민중은 그들이 쓴 드라마에 그들 자신이 출연하여 ‘사랑을 외면한 신립’에게 복수한다. 사랑과 전쟁의 줄긋기, 또는 치환. 대담한 구도가 아닌가? 그런 점에서 전설은 역사 속에 사는 민중의 모노 드라마이다. 누가 이야기했던가? “뒷날 역사가 판달할 것이다.” 그렇다. 민중은 역사 그 자체이고 전설은 판결문이다.

4.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산신령

  새재의 마을들은 산촌이다. 산촌치고 산신을 모시지 않는 곳은 찾아보기 어렵다. 새재에도 산신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전해온다. 이야기의 플롯과 내용은 다른 데와 비슷하다. 한결같이 산신의 영험함을 구구절절이 읊고 있다. 그런 가운데 흥미로운 이야기 한 편이 있어서 소개한다.

  조령을 개척할 때의 일이다. 문경현감의 명을 받아 왕에게 올릴 문서를 갖고 새재를 넘던 역졸이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다. 문서를 기다리던 왕이 이를 알고 봉명사를 보내 호랑이를 잡게 했다. 현지에 왔으나 호랑이를 잡을 묘책이 떠오르지 않은 봉명사는 산산당을 찾아 제사를 지내고 어명을 제단 위에 붙여놓고는 인근의 혜국사에 머물면서 소식을 기다렸다. 야반 삼경이 되어 호랑이의 울부짖음이 들리더니 다음날 아침 산신당 제단 앞에 여산대호 한 마리가 죽어 있었다. 봉명사는 호랑이의 가죽을 벗겨 왕에게 바치며 사실을 아뢰었다. 그 뒤 새재에는 호환이 사라졌다. 어느 날 전씨 성을 가진 이인(異人)이 혜국사에 머무는데 꿈에 산신령이 현몽하여 “나라에 득죄하여 아직 면죄받지 못하였으니 나라에 상소하여 죄를 벗겨달라” 고 간청했다. 이인은 약속대로 상소를 올렸고 나라에서는 산신령의 죄를 사해주었다.

  이야기의 압권은 왕명을 산신당의 제단에 붙이자 산신인 호랑이가 자진함으로써 왕명을 따른 점, 죽어서도 죄가 사면되지 않자 간청하여 결국은 사면된 점이다. 말하자면 산신은 군신간에 오고 가는 문서의 전달을 방해함으로써 공무집행방해죄를 저질렀고, 왕은 그에 대한 응징으로 산신을 죽이려 했으며, 왕의 뜻을 알아챈 산신은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신하의 도리를 다한다.
  바로 이 대목이다. 산신도 왕의 신하이다. 신하여야 한다. 호랑이를 응징하려 한 왕이나 왕명을 산신의 거처 앞에 붙인 봉명사나 스스로 죽은 산신이나 모두 호랑이도 왕명을 거역할 수 없는 신하임을 인정하고 있다. 오죽했으면 죽어서도 죄사함을 받으려 했을까? 여기서 나는 절대권위로서 왕권을 본다. 왕토에 사는 존재라면 신이건 동물이건 식물이건 그들은 왕의 것, 왕의 신하이다. 왕에게 허리 숙인 정일품송이나 사면을 애걸한 산신이나 왕의 신하라는 점에서는 매한가지이다. 이데올로기, 거짓된 이념의 울타리 안에서 민중은 속고 있었고, 이 이야기는 그것을 증거하고 있다.
  또 하나, 글을 쓰는 나도 헷갈릴 것 같은 일. 호랑이가 산신이고 산신이 호랑이이다. 새재를 넘나드는 과객들을 잡아먹는 것도 호랑이이고 산신당 앞에서 행로의 안전을 비는 과객의 기도와 정성을 받아 잡수는 분도 호랑이이다. 가장 두려운 존재를 가장 믿음직한 신으로 환치하는 일을 우리 민중은 태연하게 해내고 있었다. 절묘하지 않은가?

5. 열녀담을 각색한 민중의 생각

  새재의 입구 하초리에는 일심각(一心閣)이라는 정려각이 서 있다. 정려의 주인공은 윤소사(尹召史)라는 여인이다.『여지도서(輿地圖書)』의「문경 인물조」는 열녀 윤소사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정병(正兵) 조막룡(趙莫龍)의 아내이다. 남편이 쌍령전투(雙嶺戰鬪)에서 죽자 6년간 소복을 하며 마음을 잡아 완전히 절개를 지켰다. 그 아버지가 가엾게 여겨 재혼을 권하니 따르지 않고 스스로 목을 매어 자결했다. 1650년(효종 1)에 그 일이 알려져 정려를 세웠다.〕
  친정아버지가 재혼을 권했다는 것은 당시에 재혼이 통용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럼에도 윤소사는 절개를 택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재혼이 현실이라면 절개는 이데올로기이다. 조선왕조는 지배체제의 공고화를 위해서『삼강행실도』류의 책자까지 반포하면서 충효열(忠孝烈)의 이데올로기를 적극적으로 전파하였고, 그 결과는 상하를 불문하고 곳곳에서 나타나 수많은 열녀들이 초인적인 열행(烈行)을 이루었다. 열의 보편윤리적 가치는 부정되어야 할 까닭이 없다. 그러나 그것이 특정 집단의 이기적 목적을 위해서 강요된 것일 때에는 문제가 달라진다. 이때 열은 도구화된 이데올로기의 장(場)으로서 선택이 아니라 의무가 되고, 죽은 인간 때문에 살아 있는 인간은 인간적인 삶의 포기를 강요받는다. 이데올로기의 무서움은 마치 밥을 먹는 것처럼 자연스러움에 있다. 원래 그런 것처럼, 너무도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는 데 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는 만들어진 것일 뿐이다. 윤소사의 아버지는 인간적 삶의 소중함을 딸에게 전하였고, 딸의 사랑 또는 이데올로기를 택하였다.
  민중의 판단은 달라진다. 그들은 윤소사의 이야기를 그들의 생각에 맞게 각색했다. 앞의 사례에서도 보았듯이 민중은 각색의 전문가들이고, 각색된 내용에는 사건에 대한 그들의 생각이 담겨있다. 각색된 내용 가운데 하나는 이러하다.〔하초리 근처에 노총각과 부부가 이웃하여 살고 있었다. 노총각은 가난했고 부부는 부자였으며, 특히 그 부인은 미색이 빼어났다. 재물과 미색이 탐난 총각이 남편을 산중으로 유인하여 바위로 눌러 죽였다. 남편을 애타게 기다리던 부인은 노총각의 계략에 빠져 같이 살 게 되었고 아들 셋을 낳았다. 어느 소낙비 내리는 날, 남편이 떨어지는 비를 보며 싱긋이 웃었다. 부인이 왜 웃느냐고 묻자 그제야 사실을 털어놓으며 “남편을 죽일 때 피가 꼭 오늘 내린 비처럼 흘러내렸다”고 하였다. 자신의 불륜에 절망하고 남자의 악행에 분노한 부인은 남자와 소생의 자식들을 칼로 찔러 죽이고 자신도 목숨을 끊었다. 이 사실이 관청에 알려져 열녀비를 세우게 되었다.〕
  남편에 대한 정 때문에 죽음을 택했고 그 공으로 정려가 내렸다는 점에서는 사실과 일치하지만 나머지 내용은 전혀 다르다. 사랑의 라이벌이 등장한다. 삼각관계이다. 라이벌의 사랑은 지독하여 남편을 죽음으로 이끈다. 그리고 여인을 취한다. 어떤 이유에서건 여인은 수절하지 않고 다른 남성을 맞아 아들을 셋씩이나 낳으며 인간적 삶의 즐거움을 누린다. 아들 셋은 두 남녀의 행복이 최고조에 달했음을 보여준다.
  절정이다. 늘 그렇듯 절정은 파국을 준비하고 있다. 마침 내린 소낙비는 지난 삶의 복락을 씻어내는 상징이다. 소낙비를 바라보던 남자는 행복에 겨워하고 민중은 그를 용서하지 않는다. 인간적 삶의 추구를 수긍하되 보편윤리적 가치를 놓치지 않는 것이 민중이다. 남자는 살인자이고 위계에 의해서 남의 여자를 뺏은 자이다. 그럼에도 남자는 지나치게 행복하다.
  이제는 사실을 밝힐 때가 되었다. 민중은 남자 스스로 죄를 토설케 한다. 여인은 무죄이다. 그녀는 사실을 몰랐고 인간적인 삶에 충실했다.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여인은 보편윤리의 수호자가 된다. 그녀를 분노하고 절망케 한 것은 단지 다른 남자와의 만남이 아니라 남편을 죽이고 자신을 속인 남자와의 만남이다. 여인은 살인과 위계에 의해 이룩된 모든 성취를 부정하고 목숨을 끊는다.
  민중은 남편을 기다리다 목숨을 끊은 한 열녀의 이야기를 그들의 가치관에 맞게 각색하였다. 각색의 기본방향은 보편윤리의 범주 안에서 인간적인 삶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여인을 중심에 두고 보면 사실 속의 여성은 수동적일 뿐이다. 그러나 전설 속의 여성은 적극적이다. 불가피한 현실을 수용할 뿐만 아니라 부당한 현실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용기를 갖고 있다. 김수영 시인이 노래하였듯이 동풍에 눕는 듯하다가도 곧장 일어서는 풀이 되어 있다. 풀은 민중이다. 사실 속의 여인은 이념적 인간이지만 전설 속의 여인은 한없이 순하다가도 어느 순간 오뉴월 찬서리로 변하는 영락없는 민중의 아낙네이다.

6. 걸어가는 산, 주저앉은 산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옛이야기를 듣다 보면 걸어다니는 산이나 떠내려온 산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새재를 호위하는 주흘산, 문경 고을의 진산(鎭山)인 주흘산도 한때는 걸어다니는 산이었다.〔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의 일이다. 도읍지는 정했는데 도읍을 지켜줄 주산(主山)이 없어 전국의 산들에 통기하여 주산을 모집했다. 여러 산들이 도읍의 주산이 되기 위해 앞다투어 한양으로 모여들었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주흘산도 열심히 한양으로 달려갔지만 이미 삼각산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크게 낙심한 주흘산은 돌아오는 길에 지쳐서 문경에 주저않아 버렸다. 주저앉은 산이라 하여 주흘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삼각산에 한이 맺혀 다른 산들과는 반대로 한양을 등지고 앉아 있다.〕
  솔거를 알 것이다. 황룡사 담벼락에 소나무를 그렸는데 새들이 진짜 나무인 줄 알고 앉으려다가 떨어지곤 했다는 전설을 남긴 화가이다. 이 전설에서 나는 솔거가 대단한 화가였다는 사실을 넘어서 고대로부터 이어져오는 일원론적 세계관을 본다. 나와 세계가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생각, 그러기에 나무도 바위도, 산도 강도, 날짐승도 길짐승도 내 생각처럼 움직일 것이라는, 움직일 수 있다는 생각이 고대인들의 사유를 지배하고 있었다. 이런 생각은 솔거의 전설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까지 이어졌다. 누군가 소나무 한 그루를 그렸다는 것은 지상에 소나무 한 그루가 더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허구와 사실 사이에 거리가 없다. 신사임당이 그린 꽃그림에 벌나비가 앉았다는 이야기도 마찬가지이다. 사임당의 그림 솜씨에 놀라기 앞서 이 땅에 더해진 꽃 한 송이를 본다. 비보풍수(裨補風水)에서 조산(造山)의 경우도 한가지이다. 조산을 그저 만들어진 돌무더기 또는 흙무더기가 아니라 엄연히 산으로 보는 인식 속에서 여전히 유효한 일원론적 세계관이 자리잡고 있다.
  전설 속에서 주흘산은 명예를 탐하고 실망하며 토라지는 산이다. 또한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주저앉는 산이다. 돌아앉는 산이다. 이와 같은 산의 인격화에는 일원론적 세계관이 갈무리되어 있다. 나와 산은 다른 존재가 아니기에 내가 그렇듯 산도 감정이 있고, 내가 그렇듯 산도 걷고 앉는 것이다. 이것은 우공이산(愚公移山)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 이야기에서 우공은 산을 옮기려고 하였지만 주흘산은 제가 알아서 옮겨다닌다. 우공이산의 이야기가 세계와 불화하기 시작한 뒤 불행해진 인간들의 이야기라면, 주흘산 이야기는 아직 세계와 나를 구분하지 않는 행복한 인간들의 모습이 남아 있는 이야기이다.

7. 새재의 노래, 아리랑

  진도에 가서 아리랑을 들어보면 대개 첫 대목에 “문경새재는 왠 고개인가 구부야 구부구부가 눈물이로구나”라는 사설로부터 시작된다. 저 남쪽 바다의 섬마을에서 불려진 아리랑 첫 대목의 현장인 문경새재에도 아리랑이 있다. 새재의 제2관문인 조곡관에서 한참을 올라가다 보면 아리랑비가 서 있다.
  아리랑 고개와 문경새재, 어떤 연관을 갖고 있을까? 전근대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시기에 민중의 삶을 오롯이 담아내는 예술적 그릇이었던 아리랑 속의 고개는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노래의 맥락 속에서 보면 아리랑 고개는 넘어가야 할 고개라는 점에서 고단한 삶의 고개이고, 임이 넘어가신 고개라는 점에서 이별의 아픔을 담은 고개이지만, 사람마다 삶의 곡절과 사랑의 무늬가 다르기에 제각각의 의미를 간직한 고개일 수 있었다.
  문경 새재 아리랑에서 아리랑 고개는, 아리랑 고개 일반의 뜻을 공유하면서도 남다른 데가 있다. 새재를 중심으로 삶을 꾸려가는 이들에게 아리랑 고개는 새재라는 고개로 구체화한다.〔아리랑 고개 올라가면 30리요 내려가도 30리라 / 60리를 당도하니 큰 새재 다 넘어가는구나. / 오라는님은 아니 오고 나 혼자 넘어가는구나.(김도화 할머니의 아리랑 고개) 〕〔 길이 난 고개라면 발을 벗고도 가지요. / 그렇지만 아리랑 고개는 무서운 고개 / 문경새재가 아리랑 고개가 되었네. / 아리랑 고개는 큰 고개 아리랑 고개가 적막강산 / 아리랑 고개가 뭔 고개냐 영감님 넘어간 고개로구나. / 아리랑 고개가 무섭네요 정든님 넘어가신 고개 / 오실 때가 되었는데 왜 아니 오시나 / 아리랑 고개가 그렇게도 무섭던가요.(김도화 할머니의 문경정선아리랑)〕
  가락이나 사설 양면에서 아리랑의 전형성을 갖추진 않았지만, 새재를 앞에 두고 평생을 살아온 할머니들의 노래에서 아리랑 고개는 구체성을 얻는다. 할머니들에게 아리랑 고개는 고단한 삶의 과정에서 실제로 넘은 고개이고, 그러기에 관념적일 수 없는 고개, 새재이다. 그러나 아리랑은 사랑 속에 문제를 제시하고 사랑속에 생각을 표현하는 노래이다. 아리랑이 겉으로는 사랑 노래이면서도 사랑 노래일 수만은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 점에서 새재아리랑도 예외가 아니다. 할머니들은 아리랑 고개를 새재로 구체화하면서도 사랑의 끈을 놓지 않고 정든 임을 찾고 있다. 이때 임의 의미는 중층적이다. 말 그대로 임일 수도 있고, 한용운의 임이 그러하듯이 꿈, 열악한 현실을 넘어서서 도달하고 싶은 물리적·정신적 이상일 수도 있다. 아주 범박하게 이야기하자면 아리랑이 즐겨 불리던 지난 세기 초반, 일제의 침략과 수탈로 도탄에 빠진 삶을 벗어나고자 하는 꿈이 임으로 형상화한 것일 수 있는 것이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 / 문경새재 물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 / 홍두깨 방망이는 팔자가 좋아 큰애기 손질로 놀아나네. /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 / 문경아 새재는 웬 고갠지 구부야 구부구부가 눈물이 나네. /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
  이 노래를 부른 이는 문경새재의 초입에 있는 아래푸실에서 평생을 살아온 송영철 할아버지이다. 할아버지는 이 노래를 젊어 한때 새재를 넘나들며 곶감장사를 할 때도 불렀고, 일본 북해도에 징용으로 끌려가서 탄광생활을 할 때도 불렀으며, 농사짓고 나무할 때도 불렀다. 할아버지에게 아리랑이야말로 삶의 노래였고, 따라서 아리랑 사설에는 할아버지의 삶이 녹아 있다.
  홍두깨방망이가 팔자가 좋은 것은 큰애기 손에서 놀아날 수 있기 때문이다. 큰애기와 홍두깨, 고도의 성적 은유가 숨어 있다. 그저 홍두깨를 미는 과년한 처녀를 연상할 일이 아니다. 남성 상징으로서 홍두깨와 한창 물이 오른 여성의 만남을 떠올릴 일이다. 아찔하다. 큰애기 손길에서 홍두깨방망이는 재미를 보는데 노래하는 이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야 하고 넘어가는 굽이마다 눈물이 앞을 가린다. 왜일까? 할아버지의 사설 가운데에는 이런 대목도 있다.
 〔문경새재 쇠무푸리나무 말채 쇠채로 다 나가네. / 문경은 새재야 참싸리낭구 꼬깜아 꼬지로 나가네. / 문경은 새재야 뿌억싸리는 북어야 꼬지로 다 나가네. / 고대광실 높은 집도 나는야 싫어 올통불통 멍석자리 얕은 정 주세.〕
  이런저런 나무의 용처를 알려주려는 게 아니다. 새재를 드나들며 나무를 하는 나무꾼의 지식을 드러내려고 하는 게 아니다. “나무는 그러한데 나는 뭐냐?”라는 물음이 담겨 있다. 나무들은 어떠한가? 제각각 생긴 대로 제 몫을 하고 있다. 제게 주어진 소용대로 쓰이고 있다. 돌아갈 곳, 쓰일 곳이 있는 삶은 행복하다. 그런데 나는 어떠한가? 무망한 삶에 정처 없이 고갯길을 오르내리고 있다. 한번 넘으면 그만인 고개가 아니라 끝도 없이 오르내려야 하는 고개를 넘어가고 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고대광실 높은 집이 아니다. 호의호식이 아니다. 내 생긴 대로의 소용에 맞는 삶, 멍석자리 위에서 나누는 소박한 사랑이다. 그런데 그마저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 삶의 고개는 가물가물 이어지고 한 고개를 넘어서면 또 다른 고개가 등을 보이고 있다. 삶이 나를 속이고 있다. 속는 삶, 여기에 지난 세기의 초반을 정처 없이 살아온 민중의 간난신고가 서려 있다.
  새재아리랑의 가락은 정선아리랑과 비슷하다. 선법은 메나리토리에 이 지역 나무꾼들이 즐겨 부르던 신세타령인 어사용과 유사하다. 정선을 떠난 아리랑이 고개를 넘어넘어 새재의 민중 품에 안긴 모양이다.

마을공동체의 신앙, 길손들의 믿음

   안태현(문경새재박물관 학예연구사)

신께서 머무는 곳은 남쪽으로 칠십 고을의 백성을 진무하며, 당집은 새가 날개를 편 듯 자리잡고 있으니 이에 우리나라 억만년의 아름다움입니다.

1. 길손들의 믿음에 주목하는 이유

  한때 우리를 텔레비전 앞으로 이끌었던<전설의 고향>에 꼭 한번쯤은 등장하는 대목이 있다. 해는 지고 캄캄한 밤, 과거를 보기 위해 길을 떠난 나그네가 깊은 산중에서 길을 잃고 헤맨다. 나그네는 멀리서 반짝이는 불빛을 발견하고 찾아가지만 그곳에는 여우 혹은 다른 영물이 둔갑해 있어 위기를 맞는다는 내용이다.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옛날 이야기에도 고개를 넘던 나그네가 호랑이나 사나운 짐승을 만나 위험을 겪는 내용은 숱하다.『구비문학대계』라도 펼쳐보면 호랑이를 비롯해 길에 얽힌 이야기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우리에게 친근한 장면 중 또 하나는 고갯마루나 큰길 옆, 마을입구에 자리잡고 있는 서낭당이다. 서낭당은 작은 돌을 무더기로 쌓아놓고 가까이에 큰 나무〔神樹〕가 있는 형태가 많다. 대개 나무, 바위, 나무와 돌담, 나무와 바위, 나무와 당집, 바위와 당집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나뭇가지에는 아이들의 장수를 위해 걸어놓은 헝겊 조각, 상인이 이재(利財)를 꾀하기 위해 단 짚세기, 신랑·신부가 새집으로 옮길 때 부모계의 가신(家神)이 따라오지 못하도록 신부가 자기 옷을 찢어서 걸어놓은 헝겊 조각 등이 걸려 있다.
  서낭은 마을의 안녕과 평안을 위해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모시는 마을의 수호신이다. 그래서 ‘동네 서낭님’이라고도 한다. 즉 ‘나를 위해서’보다는 ‘우리 동네를 위해서’ 모시는 신이다.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여 의논 끝에 고사 지낼 사람을 뽑고, 모두 똑같은 몫으로 돈이나 쌀을 내어 제물을 차려 동네가 잘되게 해달라고 축원하며, 고사가 끝나면 온 동네 사람들이 한데 모여 잔치를 벌인다. 이는 마을 공동체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이자 대표적인 마을 신앙이다. 하지만 고갯길, 특히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는 곳에 위치한 서낭은 마을의 신을 넘어 그곳을 지나는 모든 이의 신으로 자리잡는다. 흔히 그곳을 지나는 사람들은 안전한 여정을 기원하기 위해 돌을 주워서 단 위에 던지거나 침을 뱉기도 하는데 이것은 도로를 배회하는 악령의 해를 피하기 위함이며, 또 이때 자기가 원했던 바를 마음속으로 또는 소리내어서 기원하기도 한다.
  이것이 길손들의 믿음에 주목하는 이유이다. 떡을 팔러 고개를 넘든, 과거를 보기 위해 고개를 넘든 그 위험은 마찬가지이다. 길손들은 자연스럽게 고갯마루의 서낭당에 의지하게 되고 여기에서 길손들의 믿음이 다져진다. 그래서 고개마다 비슷한 이야기가 생겨나고 비슷한 서낭 형태가 생겨났는지도 모른다. 우리나라 고개의 시조(始祖) 계립령이 문경에 있고, 조선 팔도의 대표 고개 문경새재가 문경에 있다. 한양에서 동래에 이르는 영남대로는 이 지역의 길과 고개의 문화를 대변하는 말이다. 이를 넘나들던 숱한 나그네들의 사연, 그리고 지역민들이 남긴 서낭당을 통해서 길손들의 믿음과 신앙을 추측코자 한다.

2. 고을마다 마을마다 신(神)이 있다.

  동해안에는 서낭당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 마을마다 남서낭과 여서낭을 모시는 것은 보통이고 여기에 처첩까지 합하면 서낭당은 금방 서너 개로 늘어난다. 남자 신이 머물고 있는 곳은 보통 남서낭당, 할아버지당, 수서낭당이라고 하며 개중에는 큰당, 본당이라고 하여 여서낭보다 상위에 두기도 한다. 여신이 머무는 곳은 암서낭당, 할머니당, 해신당, 해랑당, 해당 등으로 불리며 첩이 머무는 곳은 작은서낭당 또는 작은할머니당으로 불린다. 남자 서낭당이 마을 전체를 수호하는 기능이 있다면, 여자 서낭은 바닷일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이는 동해안 어촌마을 공동체 신앙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산촌에서는 산신에 대한 믿음이 지극하다. 문경 지역 역시 골이 깊은 산촌이 많은데 보통 마을의 주산에 최고신인 산신을 모시고 마을 안에 여러 신을 모시고 있다. 산신이 머무는 곳은 산신당 혹은 산지당이라 부르고, 그 아래에 상조산당, 하조산당이 차례로 있다. 마을 입구에는 수구당이 있다. 마을 입구에는 수구신이 버티고 있고 마을 중간중간에 각기 다른 신이 마을을 지켜준다. 그리고 이들은 산신 아래에서 하나가 된다. 평야촌은 이와 같은 우주관념이 더 극대화된다. 좌청룡 우백호를 비롯하여 한 마을에 십여 개에 이르는 서낭당이 있다. 마을의 허한 곳이 그만큼 많기에 이를 비고(裨補)하는 차원에서 많은 신이 필요한 것이다.
  공동체 신앙의 특징은 이와 같이 그 지역의 생태지리적 환경을 살펴보았을 때 잘 드러난다. 하지만 읍치(邑治)의 성황당을 비롯하여 유교적 제의를 지내는 ‘성황당(城隍堂)’은 역사적 배경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 조선시대 중앙집권화 시책의 일환으로 각 군현에 성황당, 사직단(社稷檀), 여단(
檀) 등을 설치하여 수령이 제사를 지내게 하였는데, 이것이 읍치의 성황제이다. 마을의 당집이 성황당으로 불리며 유교식 제의로 규격화되는 것도 이즈음의 일이다. 당굿과 유교식 제의가 혼재하는 마을이 존재하는 것은 이와 같은 이유에서이다. 하지만 마을의 역사가 그리 오래지 않은 곳은 애초부터 유교식 제의를 시작하여 그 혼재마저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이렇듯 공동체 신앙은 생태지리적 환경 못지 않게 역사적 배경 또한 잘 살펴야만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있다.
  문경은 우리나라 산의 등줄기인 백두대간이 남북을 가로지른 구간에 자리잡고 있다. 그러므로 백두 대간 북쪽, 즉 기호지방으로부터의 문화는 지리적으로 단절된 셈이다. 낙동강 수로를 이용해 남쪽에서 올라온 문화와 남한강 수로를 이용해 북쪽에서 내려온 문화가 이 지역을 기준으로 각각 북쪽과 남쪽의 끝을 이루고 있다. 그 끝을 이어주는 것이 바로 길이다. 문경 지역은 예로부터 하늘재, 문경새재 등의 고개와 영남대로 같은 간선도로의 발달로 유명한 곳이 되었다. 산과 강이 자연적 현상에 의해 이루어진 지리적 공간이라면, 길은 인간에 의해 인위적으로 형성된 지리적 공간이다. 적어도 문화의 전파에 있어서  길은 문화를 열어주고 닫아주는 관문의 구실을 한다. 문경이 역사적으로 교통·군사의 요충으로 주목받아 온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이 글은 조선시대 우리나라 최대의 간선도로 중 하나인 영남대로 주변의 몇몇 공동체 신앙을 대상으로 한다. 다행히 최근에 발견된 서낭당의 상량문과 중건기들은 18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동안 이 지역 공동체 신앙의 자세한 면모를 밝혀주고 있다.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서낭당은 모두 세 개인데, 직선거리상 불과 20㎞ 이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영남대로를 끼고 일렬로 늘어선 꼴이다. 특히 각각의 서낭당과 관련된 배후의 마을들은 군사마을, 노변마을, 역촌마을이라는 각기 독특한 배경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3. 오가는 나그네의 정성 - 문경새재 성황당

  기호지방에서 영남대로를 따라 내려오다 보면 문경새재를 반드시 넘게 된다. 여기서부터가 경상도 땅이다. 문경새재의 공동체 신앙으로는 현재 상초리 주민들에 의해서 모셔지는 성황당이 있다. 마을 단위의 성황당으로선 건물의 규모가 매우 훌륭하다. 이 성황당은 ‘새재 성황신과 최명길’이라는 설화로 더욱 유명하며 지금도 전국 각지의 무속인들이 자주 찾는 곳이다. 1970년대 후반 보수 공사를 하면서 발견된 중수 상량문에는 이 성황당을 중수하게 된 배경과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이 부기되어 있었다. 그 내용을 번역해 보면 다음과 같다.
 「대개 고을의 북쪽에 주흘산이 있고 주흘산 아래에 성황사가 있으니, 사우를 지은 지가 백여 년이 넘었지만 신령스럽고 빛날 수 있었던 것은 날마다 내려진 복이 성하였기 때문이다. 아, 세월이 점점 오래되어 기둥과 상량이 썩고 무너짐에 이르렀구나! 이에 여러 장인들의 정성을 모아 좋은 때에 소나무 기둥을 세우고 좋은 날에 상량을 올린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상량한 뒤로는 모든 담들이 안녕하여 육축이 번식하매, 새는 날갯짓하고 꼬리 달린 짐승들은 서로 뒤섞여 아름다움을 이루기를 바랍니다. 제비도 날아 새로운 상량을 하례하고 묘우(廟宇)의 중건에 인하여 해가 빛나는 것은 복록이 새롭게 구비되었음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신께서 머무는 곳은 남쪽으로 칠십 고을의 백성을 진무하며, 당집은 새가 날개를 편 듯 자리잡고 있으니 이에 우리나라 억만 년의 아름다움입니다.
  아침저녁으로 나는 꽃다운 향기는 오는 사람 가는 나그네가 드리는 정성 때문이며, 초하루와 보름에 나는 향불은 마을의 늙은이와 동네의 아낙들이 매일 비는 기도 때문입니다. 처마에는 10리의 장풍(長風)을 맞아들였고 문(門)에는 새벽 밝은 달이 빛나고 있네. 윗기둥과 아랫집은 크고 씩씩한 길함에서 취하여 가지런하고 의지하는 것 같습니다. 오로지 바람은 풍년을 위탁하는 경사가 지붕 위에 있고, 그 지붕 위의 지극하신 신께서 내려오셔서 백성들이 그 복을 받기를 원하옵니다. 이날이 바로 갑진년 봄 2월이다. 도광 24년(1844) 2월 초10일 기둥을 세우고, 같은 달 20일 미시(未時)에 상량을 하다.」
  중수 상량문의 내용으로 미루어보아 현재의 성황당은 1844년에 중수된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내용 중에 밝혀져 있듯이 이미 사당은 그보다 100여 년이 앞선 1740년경에 건립되었다. 이 성황당은 문경새재 제1관문 바로 옆의 성벽 위에 위치하고 있는데, 제1관문의 축성 시기가 숙종 34년(1708)인 점을 감안하면 1관문 성의 축성 당시에 성황당도 함께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곳에는 당시 ‘조령진’이라는 군사시설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곳의 책임자인 진장(鎭將)의 주관하에 성황당이 건립되었다. 일반적으로 산성 등의 요충지에 군사시설이 들어서게 되면 그 안에 주민들을 이주시켜 거주하게 하거나 사찰을 유치하여 유사시에 병력을 활용하게 했던 사례가 자주 나타난다.『조선왕조실록』「숙종 33년 8월 19일조」에 “조령에 사찰을 세우고 관문을 설치하는 일을 청하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동장(洞長)의 이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주민들을 대표하여 명단에 올라 있는 것으로 보이며, 석경선(釋慶仙)이라는 승려가 참여한 모습도 보인다.
  자연적이든 인위적이든 간에 사람들이 모여 하나의 마을을 형성하게 되면 그들을 종교적으로 결집시킬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 군사 또는 노변마을에 지나지 않을 이곳에 적합한 종교시설로는 성황당이 가장 적절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수차례에 걸친 조령진의 존폐를 거치면서 제사 집단과 형식 등은 많은 변화가 있었겠지만, 관과 주민, 나그네들에 의해 모셔지던 성황당이었다. 상량문의 내용에 나와 있듯이 “신께서 머무는 곳은 남쪽으로 칠십 고을의 백성을 진무하며, 당집은 새가 날개를 편 듯 자리잡고 있으니 이에 우리나라 억만 년의 아름다움입니다. 아침 저녁으로 나는 꽃다운 향기는 오는 사람 가는 나그네가 드리는 정성 때문이며, 초하루와 보름에 나는 향불은 마을의 늙은이와 동네의 아낙들이 매일 비는 기도 때문”이라는 표현이 걸작이다.

4. 어영차 상량을 밀치니 - 돌고개 성황당

  일정한 경계를 이루고 있는 고갯마루에는 돌무더기〔積石〕나 장승, 동신목과 같은 신앙의 대상물이 자리잡고 있는 경우가 많다. 문경 지역 영남대로상에도 이러한 것들과 더불어 성황당이 자리하고 있다. 여기에는 다양한 설화들이 전승되고 있기도 하다. 돌고개 마을 성황당에는 여신(女神) 그림이 모셔져 있는데, 그 주인공은 원한을 품은 ‘처녀귀신’으로 회자되고 있다. 한편 앞에서 언급한 문경새재 성황당의 ‘새재 성황신과 최명길’이라는 설화는 ‘죽령산신과 최명길’이라는 이름으로 죽령에서도 똑같은 유형으로 전승되고 있다. 이것은 고개 또는 길을 통해서 전승되는 설화의 한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영남대로상 가장 험난한 구간 중의 하나였던 관갑천(串岬遷)의 돌고개 성황당은 여신이 모셔져 있는 성황당과 함께 동신목, 돌무더기가 함께 자리잡고 있는 복합 경관을 연출하고 있다.
  지금까지 공동체 신앙과 관련된 연구에서 돌무더기나 동신목 등은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신체(神體)로서의 의미만이 강조된 경향이 있다. 큰길 주변이나 노변마을의 경우 도로 표식으로서의 역할이 강하였음을  간과한 것이다. 서낭 혹은 성황의 기능적인 면모를 살핀 논의 중에서도 길의 표식으로서의 역할을 강조한 글과 군사적 의미를 강조한 글이 있기는 하다.
  기록에는 이와 관련한 중앙의 정책이 자주 시행되었음을 살펴볼 수 있다. 먼저「태종 14년 10월조」에는 “고제(古制)에 의하여 척(尺)으로써 10리를 재어서 소후(小후)를 설치하고, 30리에 대후(大후)를 설치하여 1식(一息)으로 삼으소서”라는 기록이 있으며,「태종 15년 12월조」에는 “매 10리마다 소표(小標)를 두고, 30리마다 대표(大標)를 두되, 혹은 돌로도 쌓고 흙으로도 쌓아 그 편의에 따라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는 기록도 있다. 또「세종 23년 8월조」에는 “새로 만든 보수척(步數尺)으로 이를 측량하여 30리마다 하나의 푯말을 세우되, 혹은 토석(土石)으로 모아놓든가, 혹은 수목을 심어서 표지하게 하소서”라는 기록이 있으며,「단종 1년 5월조」에는 “주나라 제도에 나무를 세워서 도로를 표시하였다는…… 오는 봄부터 경외의 큰길 좌우에 흙의 알맞은 데에 따라서 소나무, 잣나무, 배나무, 밤나무, 느티나무, 버드나무 등 나무를 많이 심고 벌목하는 것을 금지하소서”라고 하였다. 이처럼 노변에 위치한 돌무더기나 동신목 등은 중앙의 정책하에 도로 표식으로 작용하던 것이 마을 공동체 신앙의 대상으로 자리잡은 경우도 있음을 반증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1999년 돌고개 성황당의 전면적인 개수가 이루어졌는데, 건립 당시의 상량문 1점과 중수 상량문 1점이 각각 발견되었다. 건립 상량문은 1797년에 작성된 것이며, 중수 상량문은 1890년에 작성된 것이었다. 그 중 건립 당시의 상량문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엎드려 바라옵건데, 천지신명께 비옵나이다. 국가의 운명과 관련되는 것은 명산대천의 제사로 예로부터 법전이 있는 것이다. 누가 귀신은 그와 관련된 부류가 아니면 흠향하지 않는다 하였는가? 징험할 수가 있으니 흠양 드림에 또한 많은 의식이 있다. 대저 계림 70주의 관방(關防)은 서쪽으로 태백산이 담당하고, 새재 길 삼천 리의 험준함은 남으로 섬(동쪽) 오랑캐를 억제했네. 평평하고 거칠 게 우리 마을의 위아래에 접하여 뻗쳤고, 한 줄기 물은 큰 정자와 짧은 이정표의 중간에 얽히어 ‘돌고개’라 일컬어진 까닭이다. 큰 나무는 길 가는 수많은 나그네를 편안히 쉬게 할 수가 있고, 산언덕에 만약 사람이 살았다면 전설에 신령스러움이 많았으리라. 금무(금巫)가 단풍숲을 짓는 것을 보고는 들에선 북 치며 노래하는 가락이 있었다. 아직도 우사와 띠집이 모자라 사람들은 자신의 재산을 털어 집을 짓기로 모의하였다. 이에 좋은 날을 점치니, 돈으로, 혹은 곡식으로 가지고 와 비용이 다 마련되었으며 원근에 있는 사람들도 정성을 보태었다. 선남선녀가 대소민의 정력을 이끌어 다하니, 제주 민자(閔子)의 사당을 모방하여 다듬지도 않았고 새기지도 않았으며, 금성(錦城) 무의(武義)의 사당 같이 흠향 드리고 제사하네. 검은 술을 빚은 동이와 누런 송아지 잡은 도마의 신은 오히려 나를 돌아보고, 주렴 같은 흰 구름과 병풍 같은 푸른 산은 그 검소함을 밝게 하네. 여섯 곡조 노래 불러 많은 망치 고르게 올라간다.
  어영차 상량을 동으로 밀치니, 바다 속에서 해가 나와 먼저 붉네요. 다만 신의 마음 이와 같이 돌보시니, 해마다 시작도 같고 끝도 같으소서. 어영차 상량을 남으로 밀치니, 낙동강 흐르는 물 쪽빛과 같네요. 강 위의 상인들은 북 치고 춤을 추며 순풍에 무사히 돛을 펴게 하소서. 어영차 상량을 서쪽으로 밀치니 가을에 익은 벼와 삼밭이랑에 가득하다. 모두 말하는 즐거움 신의 은혜라 하고, 술 취함 붙드는 사람들 수렁과 같구나. 어영차 상량을 북으로 밀치니, 높고 높은 한자리 별 극에 달렸네. 어찌 마을의 편안과 즐거움만 생각하겠는가, 태평이 동국에 만세토록 이어지리. 어영차 상량을 위로 밀치니, 밝고 밝게 오직 울리는 소리가 하나의 이치이네. 자부에 임하여 오르내림과 같고 신께서 우리의 아름다운 형상을 도우신다. 어영차 상량을 아래로 밀치니, 깨끗한 제사 겨울도 없고 여름도 없네. 산골짜기 풍속 정성이 박하다고 싫어하지 마시고, 향기 나는 술안주, 아름다운 술, 난초자리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상량(上樑)한 뒤로는 물이 땅에 있음과 같이 하늘에서 아름답게 사용하시어 여러 집 많은 식구가 길이 번영하도록 멀리까지 복을 내려주시고, 삼재(三災)와 오해(五害)가 모두 떠나가고 여기 풍년을 즐기게 해주소서. 가경 원년(정조 20, 1797) 1월 13일 사시에 상량하다.〕
  이 글에서 제시하는 세 편의 고문서 중에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상량문의 구성은 돌고개의 지정학적 위치와 위상을 언급했고, 성황당을 짓게 된 배경과 제사의 내용이 담겨 있으며, 상량 때의 염원을 노래하고 있다. ‘어영차 상량을 밀치니[兒郞偉抛樑]’라는 우리말 민요의 한자어의 표기가 흥미롭다.
  돌고개의 지정학적 위치를 언급하면서 이곳이 영남대로의 험조임을 말하고 있다. 이곳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삼국시대 때부터 있었다는 고모산성과 ‘토끼비리〔串岬遷, 兎遷〕’라는 옛길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는 곳이다. 문경새재를 지나 이곳을 반드시 거쳐야만 남쪽으로 향할 수 있다. 그 다음으로 사우를 만들게 된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내용으로 보아 1797년 이 성황당이 지어지기 전에는 당집이 없었고, 단지 동신목과 돌무더기만이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도 성황당 옆에는 동신목과 돌무더기가 있다. 앞에서 언급되었지만 이곳의 동신목과 돌무더기는 조선시대 도로상의 표식인 ‘후’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 상량문에서도 “새재 길 삼천 리의 험준함은…… 우리 마을의 위 아래에 접하여 뻗쳤고, 한 줄기 물은 큰 정자와 짧은 이정표의 중간에 얽히어 ‘돌고개’라 일컬어진 까닭이다. 큰 나무는 길 가는 수많은 나그네를 편안히 쉬게 할 수가 있고”라는 대목이 있다. 돌고개 성황당이 있는 곳의 위치와 경관, 그리고 길 가는 나그네에 대한 배려가 엿보인다.

5. 덧없이 변하는 세월을 따라 - 유곡역의 국사당

  문경 지역은 역사적으로 군사적 요충지인 문경새재와 더불어 교통의 요지로서 주목되어 왔다. 그 중심이 유곡역이다. 유곡역은 영남대로를 관장하는 가장 큰 규모의 역관 중의 하나였으며, 문경에서 유곡은 읍치 못지 않게 번성한 곳이었다.
  유곡에는 다섯 개의 작은 마을이 있고 각각의 마을 신앙이 존재한다. 마을은 아골, 한적골, 마본, 신리, 주막거리로 구성되어 있는데, 중심 마을은 아골이다. 유곡역 관아가 있었던 곳이라는 의미에서 아골이 되었다고 한다. 다른 마을은 당이 마을과 인접해 있는 데 비해 국사당(局師堂)이라 불리는 아골의 당은 동네에서 멀리 떨어진 산정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에도 유곡동의 각 마을을 둘러사고 있는 각각의 당은 나름대로의 위계질서가 있다. 정월 열나흗날 자시를 전후하여 모두 제를 올리기는 하지만, 아골에서 가장 먼저 제를 올린 후 다른 마을에서 제를 지낸다.
  아골 당의 중건기에 의하면 당의 명칭은 국사당이며 유곡역의 비보사찰이었던 운암사(雲巖寺)에서 건축 재료를 대고 주민들의 참여로 중건되었다고 한다. 중건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저 재악산 아래, 영강의 위, 운암의 동쪽 지점을 생각해 본다. 예로부터 국사의 신당이 있어서 많은 복을 내리고 삼재를 물리치고 백성들의 폐해를 몰아내어 지금까지도 시화(時和)의 음덕을 입고 있다. 그 밑에 동네가 있으니 바로 유곡골이다. 덧없이 변하는 세월을 따라 마룻대와 기둥은 끝내 무너지게 되었다. 단청은 떨어져 나가 위 아래로 비바람이 드니 향기 높은 봄가을로 부질없이 슬퍼하노라. 이끼가 끼어 주춧돌을 덮자 지나는 나그네가 탄식을 일으키고, 거미줄 들보에 치니 동네의 노인들이 눈물을 흘리노라. 지난 경오년 동짓달에 모두 모여 의논하고 신미년 중봄에 이를 많은 사람이 뜻을 모았다. 재목과 기와는 자원해서 보시하니 승려와 농부의 공덕이 참으로 크구나. 터는 예전 그 자리이건만 농한기를 이용해서 중건을 했다. 재력을 조금씩 분담하니 열흘 사이에 당이 지어졌다.
  빛나구나! 훌륭한 당집이 이루어짐이여. 순식간에 목수들이 일을 마쳤네. 두 글자의 아름다운 편액을 다시 거니와 천년 후에도 당의 이름 영원히 전해지리라. 엎드려 원하건대, 상량한 후에 제사를 올리고 제물을 바치오니 이내 흠양하시고 이내 강림하소서. 모든 사람이 다 복을 받고 온갖 짐승이 모두 편안하니 참으로 공화(功化)와 성대한 덕이 멀리 미친 때문이다. 기둥과 서까래, 난간이 썩지 않을지니 신이 지키고 귀신이 보호함이라. 정월 대보름날 살진 희생과 향기로운 술을 올리나니, 어이 훗날에 쉬이 무너질까 두려워하리. 오히려 후인들이 계속해서 수리하는 것이 즐거우리라. 전주 이강진은 졸렬함을 잊고 글을 짓는다.〕
  유곡동 아골 당집의 현판으로 만들어져 있는 중건기는 신미년(1931)의 것이다. 앞에서 제시되었던 문경새재 성황당과 돌고개 성황당의 상량문보다는 훨씬 후대에 기록된 것이지만 이 당집의 내력을 상세히 말해 주고 있어 주목된다. 중건기의 구성을 보면 먼저 ‘국사당중건후동민열록(局師堂重建後洞民列錄)’이라 하여 관련 인물들의 명단이 제시되고, 그 다음에 당의 위치, 기능 등이 적힌 중건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역촌(驛村)의 공동체 신앙은 다른 곳과 달리 역로와 역마의 안녕을 기원하고 있다. 대체로 중앙과 사방의 방위를 따라 모두 다섯 군데의 당이 있고 각각 당제가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영남대로상의 역은 아니지만 유곡역과 같이 큰 역이었던 안기역(安奇驛)의 경우 청룡, 백호, 주작, 현무, 중앙을 의미하는 동쪽의 공민왕상을 모시는 국왕신당(國王神堂), 서쪽의 소백당(小白堂), 남쪽의 조산(造山), 북쪽의 괴목총사(傀木叢詞)와 중앙의 성황당(城隍堂)이 있었으며 매년 4월 초파일 안마제(安馬祭)가 거행되었다. 또 석수사(石水寺)라는 비보 사찰이 있었는데 안기역 찰방이 이 사찰의 중수에 간여했다는 기록이『안기역지(安奇驛誌)』『영남역지(嶺南驛誌)』에 소개되어 있다. 또 김천역 산하 부상역(扶桑驛)의 경우에도 상당, 마당, 중당, 하당 등 4~5개의 당이 있는데, 상당은 백은사(百恩寺)라는 사찰이며 역촌에서 나타나는 마당(馬堂) 등이 존재하였다.
  유곡역이나 부상역의 경우 문헌에는 공동체 신앙과 관련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역촌들의 공동체 신앙을 살펴보면 공통점이 발견된다. 먼저, 역촌에는 다수의 당이 존재한다. 보통 다섯 개 정도인데 역로와 역마의 안녕을 기원하는 역촌 특유의 방위 개념이 자리잡고 있다. 다음으로 비보사찰이 존재한다. 유곡역의 경우는 운암사라는 절이 그 역할을 감당하였는데, 중수기에 잘 나타나듯이 절에서 당의 중수에 필요한 재목을 맡기도 했다. 한편, 안기역에는 석수사, 부상역에는 백은사라는 사찰이 있어서 사찰의 중수에 역 찰방이 직접 관여하기도 하고, 사찰 자체가 공동체 신앙의 제의 장소가 되기도 했다. 이처럼 역촌의 공동체 신앙과 비보 사찰은 직·간접적인 연관을 맺고 있었다.

6. 마을 공동체의 신앙, 길손들의 믿음

  커다란 고목나무에 울긋불긋 천이 늘어져 있고 나무 밑에는 제법 커다란 돌무더기가 있다. 지나가던 나그네가 돌 하나 던지고 침을 한번 탁 뱉는다. 이것이 ‘서낭대접’이라고 어린 시절에 배웠다. 길거리를 배회하는 귀신의 해를 피하기 위해서라는 것은 커서야 알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의 문화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이후에는 그 모든 것이 짜여진 한 편의 극본 같은 길 위의 민속임을 알게 되었다. 여기서는 길가의 민속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장승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구체적인 사료의 제시를 통해 조선 후기 영남대로변 문화현상의 한 면모를 살펴볼 수 있었다는 점에 만족한다.
  <문경새재는 왠 고갠가>라는 민요에서처럼 문경을 모르는 사람도 문경새재는 한번쯤 들어본 경험이 있다. 백두대간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길목에 위치한 문경새재는 조선시대 백성들의 발품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다. 그리고 이 주변에는 이곳을 넘나들던 수많은 나그네의 염원을 담고 있을 서낭당이 있다. 마을 공동체에서 모시는 서낭당에 길손들은 여행길의 안전과 장원급제의 꿈, 거부의 꿈, 사랑하는 가족·연인과의 아름다운 재회를 빌었다. 즉 마을 공동체의 신앙이자 길손들의 믿음인 것이다.
  문경새재 성황당은 이곳에 군사시설이 주둔한 이후 건립되었다. 건립 초기에는 조령진이라는 관에 의해 제사가 주도되다가 조령진의 잦은 존폐에 의해 나중에는 주민들이 성황당 제사를 모시고 있다. 문경새재는 조선시대 최고의 간선도로로써 임진왜란 이후 군사적 요충지로 새롭게 부각되면서 이곳에 조령진이 주둔하게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고갯길에 자리잡은 성황당은 나그네들의 쉼터이자 소원을 비는 곳으로 길손들의 신앙이 집약되었다. 이는 성황당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서 잘 드러난다. 고갯길에는 어김없이 원한을 품은 처녀귀신 이야기가 있다. 이 처녀의 원한을 사지 않으려면 그곳을 통행하는 나그네의 남다른 정성이 필요한 것이다.
  돌고개 노변마을의 성황당은 처음에는 돌무더기와 나무로 이루어져 있다가 나중에 당집이 건립되었음을 상량문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우리 민속신앙의 역사와 고대 문화적인 요소들을 간과하고자 하는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돌고개 성황당과 같은 길가의 공동체 신앙의 대상물들도 당시 역도(驛道)의 재편성 등과 관련하여 도로상의 표식으로서 이정표와 같은 역할과 기능을 수행했다는 점에 주목해야했다. 즉, 도로를 표식하기 위해 일괄적으로 탄생한 돌무더기나 나무 등이 이후에 마을 공동체의 신앙물로 변화한 것이다.
  유곡역 마을의 국사당은 역촌 공동체 신앙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역은 역도를 지나는 문물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존재한다. 그래서 역촌에는 말의 안전을 비는 마당(馬堂)이 있으며 4월 초파일에 안마제(安馬祭)를 지낸다. 또한 역을 중심으로 청룡, 백호, 주작, 현무, 중앙을 의미하는 당을 두었으며, 주변에는 비보사찰을 두어 역을 보호하기 위한 소우주를 완성하고 있다.

문경새재 넘어가면 새 세상이 있다는데

안상학(시인)

새재는 높고 험한 고갯길이다. 새조차 힘들 게 넘나들 정도로 높고 험하다 해서 새재라고 한다던가. 험하고 험한 주흘산과 조령산 사이로 난 길이라서 새재라고 한다던가.

1. 문경새재 서른 굽이 먼저 넘은 벗 따라가세

  흔히 큰 산을 넘어가는 길을 재라고 한다. 이와 유사한 명칭으로 고갯길이 있지만 다르다. 고갯길은 언덕바지나 야산을 넘나드는 짧은 길이나 큰 재를 넘는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나지막한 언덕길 정도를 이른다. 새재는 고갯길이지만 큰 산을 넘어가는 데에서 재가 된다. 재는 많은 고개를 가지는 큰 고갯길인 셈이다. 예컨대 인생길을 큰 재로 보았을 때 재빼기를 마흔으로 간주하며 태를 묻은 땅에서 출발하여 스무 고개, 서른 고개를 넘어 마흔을 정점으로 내리막이 된다. 쉰 고개, 예순 고개 넘으면 어느덧 피안이 가까운 강가에 이르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굳이 인생을 고갯길로 명명하자면 마흔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새재는 높고 험한 고갯길이다. 새조차 힘들게 넘나들 정도로 높고 험하다 해서 새재라고 한다던가. 험하고 험한 주흘산과 조령산 사이로 난 길이라서 새재라고 한다던가. 하여간 높고 험한 재다. 이름타령이 나온 김에 조금 더 하자. 새재는 새것, 새로운 것의 의미인 새재라고 보는 쪽도 있는 모양이다. 이름이 어떻게 붙여졌든지 간에 이 글에서는 그리 중요하지 않지만, 나는 새〔新〕재에 관심을 가질 작정이다. ‘새 세상’을 찾아 새재로 찾아든 그 수많은 의병들의 꿈과 좌절의 파노라마가 녹아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신경림 시인의 장시(長詩)「새재」의 주인공인 돌배도 예외는 아니다. 지주와 소작인,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나뉘는 불평등한 세상에 대한 자각을 했을 때도 새재를 꿈꿨고, 일제의 억압과 착취를 온몸으로 겪을 때도 새 세상이 있다는 새재를 꿈꿨다. 이리저리 내몰리다 마지막 선택한 곳이 새재다. 일제와 부일세력과 맞서 싸우다 처참하게 최후를 맞이하기까지 그는 새재를 약속의 땅으로 믿었다. 새 세상을 건설하기 위하여, 인간답게 사는 새로운 세상을 펼치기 위하여 가족도 사랑도 버리고 선택한 곳이 새재인 것이다.

  문경새재 넘어가면 / 새 세상이 있다는데 - 「새재」,1장 4절 부분
  문경새재 서른 굽이 / 먼저 넘은 벗 따라가세 - 「새재」,2장 4절 부분
  머루 다래 따먹고 / 새재 서른 굽이 주흘산으로 갈거나. / …… / 열두 길 벼랑 올라가야 / 하늘 하나 보이고, / 열두 길 바위굴 지나야 / 햇볕 한 조각 보여, / 그래서 가난한 사람 / 활갯짓하고 모여 사는 / 새 세상이 있다더라, 여우볕들 있다더라. - 「새재」,3장 6절 부분
  새재 가파른 벼랑에선가 / 멀리서 늑대 울음이 / 낭군 찾아 객지땅 / 주막거리에 얼쩡대는 / 피엉킨 연이의 통곡이 되어 / 높이 걸린 내 머리에 와 / 부서지고 있다. - 「새재」,4장 5절 부분

  각 장마다 새재가 등장하는 이 시는 모두 4장 1,057행으로 이루어진 장시다. 전형적인 기·승·전·결 구조를 가진 서사구조의 이야기시이다.
  돌배라는 청년이 불평등한 현실에 눈을 뜨면서 사랑하는 사람인 연이와 가족을 버리고 반란을 이르킨 후 도망을 친다(1장, 기), 수배자가 된 몸으로 금점판에 이어 철도 노동판에 잠입하여 일을 하지만 거기서도 일제와 맞서 싸우다 역시 도망을 치게 된다(2장,승), 막다른 길에 이르러 막연히 꿈꾸어 온 ‘새 세상이 있다는’ 새재로 가서 의병활동을 벌이며 승승장구한다(3장,전), 그러나 내부의 적과 일제의 강력한 억압에 부딪혀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체포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4장,결)는 게 대충의 뼈대이다.
  이 시에서 새재라 던지는 메시지는 자못 크다. 그만큼 새재는 이 시에 있어서 중요한 무대가 되고 있는 셈이다. 현실적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도피처임과 동시에 새로운 세상을 창조할 수 있는 이상세계로 상정되어 있다. 지주와 탐관오리들의 수탈과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곳, 또 하나의 억압구조인 일제의 마수에서 달아날 수 있는 곳이 새재이다. 바꾸어 이야기하자면 빼앗기만 하는 나라를 평등과 나눔의 나라로,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 모든 굴레에서 해방되는 나라로 만들 수 있는 꿈과 희망의 땅이 곧 새재인 것이다. 이는 곧 새 세상으로 나아가는 전초기지인 셈이다.

2. 「새재」속의 이상세계 여우별들

  신경림의 장시「새재」의 무대는 주인공 돌배의 고향인 충청북도 충주시 목계에서 시작하여 금점판, 충주 음성 철길 공사판을 거쳐 새재를 거점으로 한 의병활동 루트인 풍기, 영해, 문경 등이다. 마지막 무대는 체포되어 형구대의 이슬로 사라지게 되는 충청북도 괴산군 현풍이다. 돌배는 이 무대를 따라 이동하면서 현실 인식과 깨달음, 실천적인 삶과 투쟁, 장렬한 최후의 수순을 밟아간다.
  1장은 목계에서 돌배가 불합리하고 불평등한 현실에 눈떠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돌배는 남한강변 목계창의 사공이다. 인근 가흥창, 복여울나루, 개치나루를 돌며 장짐을 나르는 젊은이이다. 연이라는 여인과 사랑을 나누며 결혼을 꿈꾸는 소박한 청년이자 오일장을 떠돌며 계피떡을 파는 어머니를 모시고 평범하게 살고 싶은 순박한 아들이다. 또한 인근 씨름판을 휩쓸고 다닐 정도로 기운이 세고 의협심이 강한 장부이기도 하다. 여기까지는 한낱 범부에 지나지 않았다. 배를 탄 손님들이 “나라를 도둑맞았다”고 할 때도 “나라란 우리에게 빼앗기만 하는 곳 / 땅에서 쫓아내고 집을 빼앗는 곳 / 지아비를 빼앗아가고 지에미를 짓밟는 곳”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내게는 오직 강이 있을 뿐이다. / 배를 저어가는 두 팔”로 그저 열심히 일해서 “동그란 어깨에 노랑저고리 / 취할 듯 진한 살구꽃내음”을 지닌 외팔이의 딸 연이와 결혼하여 홀어머니 모시고 그렇게 한 세상 살다 가는 범부이기를 원하는 그였다. 그러나 흉년이 이어지고 지주의 수탈이 극에 달하자 비로소 “내게는 억센 주먹이 있다”고 자각을 한다. 아무리 흉년이 들어도 호의호식에 오입질도 마다 않는 정참판, 먹을 것이 없어서 “물찌똥 곱똥을 싸고 / 힘없이 자릿바닥에 엎드려 누”운 아이들이 빚어내는 극한 대조를 보면서 억센 주먹을 어디에 쓸 건지 고민을 한다. “문경새재 넘어가면 / 새 세상이 있다는데, /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 모여 사는 / 새 세상이 있다는데” 하며 막연한 각오를 다진다.
  2장은 반란의 장이다. “왜놈 청놈”의 비호 아래 “곳간에 백미 현미 썩는 소리”가 날 정도로 축제를 하며 주색잡기에 빠져 사는 정참판을 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벼랑에 걸린 달을 보니 / 그렇다 우리는 깨닫는다. / 이 기름진 땅 / 강가의 모든 들판은 / 우리 것” 이라는 자각은 곧 “우리에게서 이것을 빼앗은 자”인 정참판을 적으로 규정하게 되고 반란으로 이어진다. 근팽이, 팔배, 모질이와 함께 단 넷이서 머슴을 때려눕히고 헌병보조원의 허리를 꺾고 정참판 집을 초토화시켜 버렸다. 여기서부터 이들은 수배자가 되어 떠돌게 된다. “어기야디야 어기야디야 뿌연 달빛 물안개도 / 원수되어 흐르는 강 / 도둑맞은 문전옥답 / 차마 발이 안 떨어져 / 문경새재 서른 굽이 / 먼저 넘은 벗 따라” 고향마을을 등지게 된다.
  3장은 수배자의 몸으로 금점판에 잠입하여 피신했다가 옮겨 앉은 철도 공사판에서 반란을 주도한 후 새재로 가서 의병들과 합류하는 대목이다. 고향을 떠나서 넓은 곳으로 나간 팔배는 3년 가뭄으로 기근에 시달리는 민생의 피폐할 대로 피폐해진 상황을 목도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철도 공사판에서 강제 노역에 시달리며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현실에 분개한다. “나라는 망했다 해도 / 배부른 자는 배부른 채 / 나라를 빼앗은 자의 편에 붙어 서서 / 배곯는 자를 더욱 배곯릴 궁리를” 하는 현실에 몸서리친다. 일제와 부일세력이 하나가 되어 힘없고 헐벗은 민중의 고혈을 짜는 현실을 인식하게 된다. 민중을 핍박하는 나라의 실체를 깨닫게 된 것이다.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났다는 등, 지사가 할복자살을 했다는 등, 의병이 일어나서 관가를 쳤다는 등 하는 소문을 접하고 점차 항일운동으로 가닥을 잡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의병으로 투신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는 공사판의 ‘아낙네’를 성희롱하는 ‘왜놈 기사’를 돌배가 때려눕히자 울분을 참고 있던 철도 공사판의 노동자들이 삽시간에 반란을 일으키는 대목이다. 여기서 그는 싸움이라는 것이 결코 조직화·무장화되지 않은 맨주먹으로는 대적이 안 되는 것을 깨닫고 새재로 옮겨가게 되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 모여 사는 / 새 세상을 찾아서,/ 억울한 사람 모여 사는 / 새 세상을 찾아서,/ 우리끼리 땅 일구고, 씨뿌리고,/ 거두고 / 밤에는 모여 앉아 옛얘기” 할 수 있는 문경새재의 이상세계인 “여우볕들”을 찾아서 가는 대목은 눈물겹기까지 하다. 한 무지렁이 인생인 돌배가 현실을 깨닫고 시대적인 상황을 제대로 받아들이며 어떻게 싸워야 할지에 대한 해답을 얻기까지의 과정은 만만치 않은 감동을 준다.
  마지막 장인 4장은 새 세상을 찾겠다고, 인간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처절하게 싸우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돌배의 희망과 투쟁, 고통과 좌절을 그리고 있다. “연풍 청산 청안 괴산에 활개치는 왜놈들”로 표현되는 일제, “영해 문경 풍기 가은에 / 다리 뻗고 나는 양반”으로 표현되는 관료, “삼년 가뭄 아우성에도 / 이밥 찰떡에 배탈난 양반” 으로 표현되는 지주 등으로 대별되는 중층 모순구조를 깨뜨리고 민족해방과 조국독립을 위한 가열찬 투쟁을 이어간다. 그러나 함께 싸우던 양반 계층이 자신의 안녕을 위하여 이탈하고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하여 ‘의병’을 일으켜서 돌배가 속한 의병진을 친다. 여기서 돌배는 일제가 아닌 동족의 총탄에 몸을 상하게 된다. 부상당한 몸으로 연풍 향회당으로 압송된 돌배는 돌형구에서 목이 잘리고 그 머리는 종대에 걸리게 된다. “까마귀에 쪼아 먹힌” 그의 눈은 더 이상 그리운 연이의 얼굴을 그릴 수 없고, 새 세상을 보겠다던 빛나던 눈빛마저도 사라지고 말았다. ‘서럽게 닫힌’ 그의 귀에는 “새재 가파른 벼랑에선가 / 멀리서 늑대 울음이” 들려오고 “낭군 찾아 객지땅 / 주막거리에 얼쩡대는 / 피엉킨 연이의 통곡이” 잦아들 뿐이다.
  여기까지가「새재」의 줄거리이다. 장돌뱅이의 아들이자 한 여인의 연인인 청년, 어머니라는 혈연도 ‘살구꽃 내음’ 아릿한 인연도 뒤로 두고 새재로 상징되는 ‘새 세상’을 찾아 표표히 떠날 수밖에 없었던 한 인간의 이야기. 불같이 일어나서 활화산처럼 타오르다 싸늘한 주검으로 내몰린 인생유전이 어디 돌배뿐이었으랴. 새재 어느 여우볕 바른 곳에서 풀꽃처럼 스러져간 그 수많은 영혼들의 아우성이 이 시 한 편에 녹아있는 것이다. 역사라는 이면에서 이름 한 줄 걸치지 못하고 그물에 걸리지 않고 빠져나간 물처럼, 무슨 배설물처럼 아무렇게나 버려진 한 인간의 이야기를 민요가락에 생생하게 올려놓은 신경림의 마음그물이 자못 새롭게 느껴지는 시이다.

3. 「새재」의 현장 목계 - 새재 - 연풍

  신경림의「새재」는 목계(牧溪)에서 발원하여 새재에서 유장하게 흐르다가 연풍(延豊)에서 그 도도한 흐름을 멈춘다.
  발원지인 목계는 그의 고향인 충청북도 충주시 노은면에서 그리 멀지 않는 엄정면에 속하는 마을이다. 목계나루 근처의 한 이름 없는 무덤에서 전해오는 이야기가 이 시의 바탕무늬가 된다. 이 시의 서문에 이렇게 적혀 있다.

  언덕으로 뻗어올라간 / 탱자나무 울타리 / 저것은 도적의 무덤이라 / 그렇게 배웠지만, / 도적의 무덤이라 / 말하라 배웠지만, / 저것은 한 이름없는 / 젊은이의 무덤.
  “1913년 새재에서 싸우다가 / 원통하게 목잘려 / 원귀로 객지를 떠돈 지 몇 해 / 이제사 고향땅에 돌아와 / 잠들다, 병진년에” -「새재」, 서문 부분

  ‘병진년’이면 돌배가 죽은 지 3년 만인 1916년이다. 죽어서도 바로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돌배의 원혼을 뒤늦게 고향에 안치시킨 것이다. 그러나 가진 자들이 자신의 혐의를 감추려고 돌배의 무덤을 의병이 아니라 도적의 것으로 몰아세웠다. 그 뒤틀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신경림이 이 시를 통해서 바로잡은 것이다. 여기에 연이라는 여인의 삶을 끌어들여 이야기의 뼈대를 만들었다. 단순히 설화적인 옛이야기에 바탕을 두고 시인의 상상력과 역사인식, 새재를 중심으로 한 현장 답사를 통해서 살을 붙였다. 돌배와 연이라는 각각의 인물을 짝지어 안타깝고 서글픈 러브스토리를 창조한 것이다.
  이 시의 또 하나의 의미망은 시대적인 목소리를 담은 데 있다. 이 시를 구상하고 현장답사를 하며 집필한 시기는 1970년대 중반 무렵이다. 암울한 시대에 대응하는 시적 목소리를 일제 강점기의 이야기를 통하여 우회 전달하려는 의도가 그것이다. 늘 빼앗기고 당하기만 하는 민중에게 현실을 깨닫고 어떻게든 떨쳐 일어서야 하지 않느냐는 반문이 주된 메시지이다. “밟혀도 분노할 줄 모른다”는 패배의식에서 벗어나 “우리는 싸워야 한다(인간답게) / 살기 위해서./ 우리는 이겨야 한다(새 세상에) / 살아남기 위해서” 무언가 실천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고 다그치고 있다. 이 시가 1978년 계간『창작과 비평』을 통해서 발표되자 문단에서는 민중문학의 신선한 목소리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1979년 시집『새재』가 출간되자 염무웅은『창작과 비평』(1979년 여름호)에 서평을 발표했다. 여기서 그는 “서정시로서 뛰어나게 성공한 여러 부분들을 포함”한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아울러 그는 더 “훌륭한 장시가 되기 위한 튼튼한 서사적 골격이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설화적인 내용과 시대적인 상황이 어우러져 장시「새재」가 탄생한 것이다.
  돌배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목계는 남한강을 통틀어 가장 큰 시장이 서던 나루였다. 자연 성시를 이루었고 활기가 넘치는 곳이었다. 얼마 전 필자가 목계에 들렀을 때 나루 근처에서 만난 노인은 “여기 줄(줄다리기)이 대한민국에서는 가장 컸지요. 줄이 우리 같은 사람 한 길은 되었으니까. 여기 장도 대한민국에서 최고 컸지. 지금은 언제 그랬나 싶게 짜그라들었지만……”하고 회상한다. 그의 눈빛에서는 한 시절의 영광과 퇴락을 곱씹는 표정이 묘하게 엇갈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현재 목계는 충주댐으로 유량이 줄어든 남한강변에 퇴락한 시골마을로 남아 있다. 장터도 반나마 제방을 쌓으려면 사라졌고 반나마 남은 곳은 옛 일본식 건물 몇 채가 군데군데 남아 있을 뿐 그 옛날 강항(江港)과 장터의 활기를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대신 민물고깃집이나 수석집이 노변에 흩어져 있을 뿐이다. 뱃길의 요충지였던 곳이 배가 다니지 않으면서 시나브로 옛 모습을 잃어버린 것이다. 대신 싹싹하게 포장된 국도가 목계를 관통하고 있어서 온갖 자동차들이 쉬지도 머무르지도 않고 쌩쌩 지나가 버리는 여느 시골마을이나 다름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신경림은 목계의 지난날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 청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 잡초나 일깨우는 잔 바람이 되라네 /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나루에 /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 산은 날러더 들꽃이 되라 하네 /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 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 민물새우 끓어넘는 토방 툇마루 /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 짐 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 『새재』「목계장터」전문

 「새재」의 중심 무대인 새재(鳥嶺,632)는 흔히 문경새재라고 불리는 곳이다. 조령산(鳥嶺山,1017m)과 주흘산(主屹山,1106m) 사이로 흐르는 조령천을 거슬러 오르는 길은 조령산과 마패봉(馬牌峰,925)으로 이어지는 산등성이의 가장 잘록하고 낮은 과협(過峽)을 통과하여 괴산군 연풍읍 수옥리로 이어진다.
 「새재」의 주인공인 돌배가 굳이 새재를 고집한 까닭은 목계에서 가장 가까운 의병활동 거점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목계에서 남쪽으로 바라보면 멀리 소백산맥이 남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장엄한 남록을 바라보며 저 “문경새재 넘어가면 새 세상”을 만날 수 있다는 꿈을 꾸었으리라.
  새재는 험준한 조령산과 주흘산을 끼고 있는 곳이다. 편리한 교통의 요충이자 은둔하면서 유격전을 펼치기 좋은 지형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의병활동의 거점으로서는 천혜의 요새인 셈이다. 적의 추적을 쉽게 피할 수 있으며 인적·물적 불리함을 상쇄하고도 남을 지형적 호조건을 선점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1913년에 새재에서 체포될 때까지 의병으로 활동한 것으로 봐서 정미의병(1907)의 잔여 세력으로 봐야 할 것 같다. 그렇지만 돌배가 언제부터 의병진에 뛰어들었는지 분명하게 못박은 대목은 없다. 또 한 가지 의문은 반경이 꽤 넓다는 점이다. 새재 인근의 문경, 연풍은 물론이고 영주, 풍기, 멀리는 동해바닷가 영해까지 원정을 나간다. 이러한 내용이 얼마나 사실적인지는 역사적인 자료에 기대어 봐야 알겠지만, 다소간에 시인의 상상력이 동원된 것만큼은 사실인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그리 중요한 점이 아니다. 이 시에서 찾아내야 할 메시지는 역사적 사실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의 실천적인 삶의 자세에 있기 때문이다. 한낱 사공에 지나지 않던 돌배가 실천적인 삶을 통하여 강고한 민족의식으로 무장한 의병으로 거듭나는 모습은 자못 비장하기까지 하다.

  우리는 비록 쉰이지만 / 한 고을이 이러서면 / 열 고을이 눈을 뜨고 / 열 고을이 일어서면 / 온 나라에 뜨거운 바람 이는 것.
  왜놈들 다시는 이 땅에 / 발 못 붙이게 하라. / 양반님네 다시는 이 고장에서 / 그 헛기침 못하게 하라, / 그 거짓 웃음 못 웃게 하라.  - 「새재」,4장 1절 부분

  새재에 남은 원혼이 어찌 돌배뿐이겠는가. “설익은 다래 따먹고 / 모싯대 꺾어 먹”어며 저항을 하던 선남들이 돌배뿐이겠는가. “팽나무 시무나무 빽빽한 숲길 / 칡넝쿨 다래넝쿨 발목 묶는 바윗길”을 누비며 이 땅에서 일제와 지주 등 모든 억압을 몰아내기 위해서 싸운 원혼들이 아직도 그들이 누비던 바윗길이며 숲길에 남아 있을까.「새재」는 그 많은 원혼들의 진혼곡이다. 새 세상이 오면 고향으로 “모내기 전에 돌아가리라 / 황새떼 오기 전에 돌아가리라”하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그 많은 “억센 주먹”들의 최후가 돌배로 형상화된 것이다. 작금의 문경새재는 비록 재의 기능을 상실한 채 거대한 ‘문화재 단지’로 보호되고 있지만 이 시가 가지는 이야기는 남아 있는 것이다. 찾는 이들에게 한 번쯤은 문경새재 단풍나무가 유난히도 붉게 물드는 까닭은 돌배의 삶과 연결시켜 보라고 권하고 싶다.
  마지막 무대는 연풍이다. 돌배의 삶의 흐름이 멈춘 괴산군 연풍읍의 향회공당은 현재 천주교 성지로 남아 있다. 병인박해(1866) 때 천주교인들을 처형할 때 사용한 피에 전 형구돌이 남아 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상상력만으로 실감하기 어려운 옛일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게 도와주고 있다.

4. 「새재」가 낳은 노래 두 마디

  「새재」는 장시지만 쉽게 읽힌다. 민요가락이 고스란히 녹아 있기 때문이다. 무거운 주제를 마치 옛날 이야기 하듯 다루고 있는 민요가락이 가지는 힘이다. 자칫 지루해지기 십상인 장시의 약점을 민요가락으로 극복하려는 시인의 의도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군데군데 민요가락을 녹여서 길고 지루한 형식을 속도감 있는 노래로 끌어올린 것이다.
  신경림은「새재」를 쓰기 위해서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현장답사를 했다. 동시에 사라져가는 민요를 취재하면서 가락을 익혔다.『새재』는 신경림 시에 민요가락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시집인 셈이다. 민요가락을 현대시(민중시)에 끌어들인 최초의 시도인 셈이다.
  「새재」는 장시임에도 불구하고 민중 노래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입에 쩍쩍 늘어붙는 민요가락이 시에 녹아 있어서 마치 노래같은 시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긴 시를 노래로 만들려는 시도를 했을까. 게다가 시가 가지는 힘이 자못 커서 1980년대 운동권의 필독서이기도 했기 때문에 노래가 되었을 때의 반향 또한 컸다. 그 많은 민중가요 중에서도 널리 애창하는 곡이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새재」가 노랫말이 된 것은 두 곡이다. 1980년대에 대구 지역 노래패 ‘산하’를 이끌던 작곡가 유완순이 1983년에 ‘새재’라는 제목으로 작곡을 했다. 시에서 발췌하여 노랫말로 썼다. 1985년에는 문홍주가 역시「새재」에서 발췌한 노랫말로 ‘돌아가리라’라는 제목을 붙인 곡을 발표했다. <새재>는 투쟁적인 내용을 발췌하여 비장감이 돋보이는 곡이며, <돌아가리라>는 낭만적인 가사를 발췌하여 흥겨운 가락이 매력적인 곡이다. 이 두 곡은 한 시에서 발췌하였지만 노랫말 구성에서는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혁명성과 낭만성이 공존하는 시의 특성을 묘하게도 칼로 자른 듯 분리하여 곡을 만들었다. 하나는 혁명적이고 하나는 낭만적이다. 한때 모작 시비를 불러일으킨 곡이기도 한 이 두 노래는 어쨌거나 1980년대 운동권에서 자주 불린 것만큼은 사실이다.

  (1절) 이 억센 주먹을 어디에 쓰랴 / 이 억센 두 다리를 어디에 쓰랴 / 이 억센 가슴을 어디에 쓰랴 / 나라란 우리를 짓밟기만 하는 곳 / 나라란 우리에게 빼앗기만 하는 곳 / 나라란 우리를 죽이기도 하는 곳 / 땅에서 쫓아내고 집을 빼앗는 곳 / 다 같은 사람인데 왜 우리만 굶주리는가 / 다 같은 백성인데 왜 우리만 헐벗는 건가 / 이 기름진 땅 강가의 모든 들판은 우리 것이다 / 저 맑은 하늘도 별빛도 꽃도 새도 풀벌레도 우리 것이다.

  (2절) 지리산에서 죽은 애들 모여들어라 / 소백산에서 묻힌 애들도 불러들여라 / 저주받은 넋끼리 팔짱을 끼자 / 우리는 싸워야 한다 살기 위해서 / 우리는 싸워야 한다 살아남기 위해서 / 친구들의 죽음 위에 죽음을 쌓으면서 / 이마로 땅바닥 치고 원통해 울부짖다 / 나는 이를 문다 쏘리라 마지막 한방까지 / 너희들이 다스리는 세상을 향해 / 이 뼈에 사무친 원한도 함께 쏘아 보내리라 / 가진 자 너희들은 너희들 편 / 나는 다만 우리 위해 싸우다 살아남기 위하여 죽을 뿐이다.  - <새재>, 노랫말 전문

  (1절) 모내기 전에 돌아가리라 황새떼 오기 전 돌아가리라 / 정참판네 하인들 눈 뒤집고 우릴 찾는다 해도 / 두 팔을 들어 어깨를 끼고 열이 아니다 스물이 아니다 / 빼앗긴 땅 되찾으리다 쫓겨난 우리는 모두 형제들이다 / 찔레꽃이 지기 전에 돌아가리라 새우젓배 오기 전에 돌아가리라 / 그 어느 한 곳 찾아 몸 숨길 건가 이 억센 두 주먹 불끈 쥔 채

  (2절) 이 억센 가슴 어디에 쓰랴 더딘 봄날 푸진 햇살만 / 등줄기에 따스운데 잠 덜 깬 연이는 나를 수줍게 웃네 / 이 억센 다리를 어디에 쓰랴 그의 몸에선 비린 물내움 / 그의 몸에선 신 살구내음 취할 듯 진한 살구 꽃내음 / 이 억센 주먹을 어디에 쓰랴 부엉이가 울고 여울이 울고 / 여울 속에서 이무기 울고 새벽하늘 성근 별 헛헛한 가슴

  (후렴)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두 팔 들어 어깨를 끼고 /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이 억센 주먹 불끈 쥔 채  - <돌아가리라>, 노랫말 전문

5. 새 세상이 숨쉬는 문경새재

  흔히 고개는 이별과 만남의 장소로 표현된다. 그것은 슬픔과 기쁨으로 때로 섞바뀌기도 한다. 문경새재라고 해서 이런 사소한 인간의 희로애락이 없을까. 하지만 문경새재는 여느 재와 다르다. 과거 보러 가는 선비에게는 청운의 꿈을 이루려 가는 길목이고 장사치들에게는 한탕을 꿈꾸며 넘는 관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대장부 한 목숨 바쳐 새 세상을 찾아 떠난 이상세계이기도 한 것이다. 장시「새재」에는 그런 문경새재의 정한을 노래하는 대목이 있다.

  한양이라 오백릿길 / 찾아가는 황소떼 / 두루마기자락 허리에 찌른 / 터벅대는 소몰이꾼, / 저것이 문경 새재 / 서러운 서른 굽이
  박달나무 젖은 이슬 / 키장수 체장수 눈물일까. / 봄바람 타고 올라왔다 / 찬 바람에 묻어 돌아가는 / 안동 영해 청상과수 한맺힌 눈물일까
  저 고개 넘으면 / 새 세상이 있다는데, / 우리끼리 모여 사는 / 새 세상이 있다는데,  - 「새재」,3장 7절 부분

  돌배가 찾아 떠난 곳이 새재 어름에 있는 ‘여우볕들’이다. 그러나 신경림 자신도 모르는 이 지명을 가진 이상세계는 문경새재 근처에는 어디에도 없다. 다만 비슷한 지명을 쓰는 ‘여우목’이 있을 따름이다. 천주교인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 산 곳이다. 계립령(525m)에서 동쪽으로 보이는 꼭두바위 너머 대미산(1115m) 자락인 여우목고개 밑에 형성된 마을이다. 박해를 피해 찾아든 천주교인들이 주로 살았던 마을이라는 점에서 어쩌면 궤를 같이하고 있지만 분명 여우볕들은 아니다. 어쩌면 신경림 스스로 설정한 이상세계의 지명일 것이다. 여우볕이라 함은 사방 산으로 둘러싸여 하루 중 볕이 드는 시간이 짧은 곳을 이를 것이다. 어떻게 보면 어두운 세상에서 따뜻하고 밝은 곳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새 세상을 꿈꾸며 살아가는 터전의 이름으로는 썩 어울리는 지명이다. 문학은 꿈꾸는 공간이기도 하다. 돌배가 찾아간 이상세계. 여우볕들은 지금 새재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지만 한 번쯤 꿈꾸어 볼 만한 곳이 아니겠는가. 인간의 고통과 꿈이 공존하는 세상이 지속되는 한은 말이다.